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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5일 화요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3.07.25|조회수42 목록 댓글 0

2023725일 화요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1독서 : 2코린 4,7-15

복 음 : 마태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혹시 자신에게 바꾸고 싶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바꾸고 싶은 것이 많은데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못 바꾼다면

이런 경우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습니까? 차를 바꿀까요? 집을 바꿀까요?

고급스러운 명품 옷과 비싼 보석류? 혹시 자기 외모를 바꾸겠다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이 제일 먼저 바꾼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부분이 참 재미있습니다. 글쎄 로또 당첨자들이 제일 먼저 바꾼 것은 자기 배우자라고 하네요.

 

로또에 당첨된 후 배우자와 헤어지고, 몇 달 안에 직계 가족과 의절하고,

친구들과도 연을 끊는 것이 순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되면 불신의 형벌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을 멀리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쾌락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결국 고통스러운 결말을 맞이하고 맙니다.

 

불신하게 되면 그 어떤 사람과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인데도 돈의 유혹 속에서

사람에 대한 의심이 더 커져서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는 있을까요?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된 보이는 인간을 멀리하는데,

보이지 않는 주님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세상의 권력을 탐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세상의 권력처럼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권력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열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지요.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니, 동고동락했던 동료인 제자를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겸손한 사람만이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갖출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섬기는 삶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더 나아가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맘껏 누리는 유일한 방법은 이 믿음 안에만 있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랍장의 손잡이가 떨어져서 순간접착제로 붙여 보려고 하였습니다.

성격이 급하다보니 접착제가 손가락에 묻었습니다.

떨어진 손잡이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손에 묻은 접착제를 떼어내려고 하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저 같은 분들이 많았는지

손에 묻은 접착제를 떼어내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식용유, 소금, 마가린, 세제, 비누, 아세톤을 이용하는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하려면 일회용 장갑을 끼고 하는 것이 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에 묻은 순간접착제는 불편하기 때문에 빨리 떼어내야 하지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의 관계는 순간접착제로 붙이듯이 계속 끈끈하게 이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관계에 금이 가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것 중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소감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감사와 찬미를 드렸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성지순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평과, 비난이 함께했으면 나쁜 열매를 맺는 성지순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았지만, 불평과 비난의 마음이 있었던 분들 중에는

제가 그분들을 향해서 글을 썼다고 오해하였습니다.

오해가 풀려서 웃음으로 만났지만, 처음에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3년 동안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권위에 놀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그 무엇으로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도 이 가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는 욕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욕망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그 욕망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재물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겸손의 길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강하게 묶어 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크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모두 뿔뿔이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두려움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하였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던 베드로도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두려움때문입니다.

어둠을 이기는 것은 작은 불빛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오직 성령의 빛입니다.

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이제 용기를 내서 다시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과 함께하니 두려움은 담대함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환난도, 박해도, 칼도, 죽음도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야고보 사도는 욕망을 버리고 겸손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두려움을 버리고 담대함으로 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

 

왼손에는 겸손을 들고, 오른손에는 담대함을 들고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곧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인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복음의 능력으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입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란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8-10)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했습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와 아들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곧 진정 청해야 할 바가 무엇이고, 진정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무엇을 먼저 행해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이요, 으뜸인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다면 내 아내를 왕비로 대하고,

내가 왕비처럼 살고 싶다면 내 남편을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여기고,

내가 예수님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예수님으로 바라볼 일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자신도 그렇게 무시당하게 되고,

남을 정당하게 대우하면 정당하게 대우받게 되고,

남을 존중하면 그만큼 존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곧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도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을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필시 그도 나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뻔하고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살지를 못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가 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들어 올림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높이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하느님 되게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원”(<규칙서> 머리말 45)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학교에서 주님 섬기기형제 섬기기를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섬기면서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청하게 하시고,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가서 특별한 지위를 청한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22)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한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셨다.

죽음의 시련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겠는가?

수난의 괴로움은 아주 큰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23) 그렇게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에게 목이 베였고(사도 12,2 참조), 요한은 파트모스로 귀양을 갔다.

이렇게 그들은 잔을 마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3)

하늘나라는 주는 이의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것이다.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4)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청을 했으며,

동시에 불쾌해했던 다른 제자들도 아직은 세속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세속적인 첫 자리를 찾는 것은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의 모습이지, 제자들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신다.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욕망으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이런 욕심은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제자들 가운데는 꼴찌, 즉 섬기는 사람이 첫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증거를 보고 있다. 그분은 가르치는 대로 행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

우리는 그분과 같이 보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겸손한 분이시다. 자랑거리를 쫓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다.

스승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참된 제자가 아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8)

우리는 아무리 낮아져도 주님께서 낮아지신 만큼 낮아지지 못한다.

그분이 낮아지심으로써 우리가 모두 올라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가장 큰 영광, 즉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야고보 사도가 처음에는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는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처음에는 주님께 당신을 따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분을 위해 순교하신 분이시다.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처음에 뜻이 엇갈렸을지라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희도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오늘 야고보 사도 축일의 복음을 읽으면서 떠오른 단어는 엇갈림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신 뜻과 야고보 사도의 따르는 뜻이 엇갈렸다는 뜻입니다.

 

뜻이 엇갈리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야고보 사도 간에 처음에는 뜻이 엇갈렸습니다.

 

주님의 뜻은 야고보 사도가 당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당신과 함께 고통의 잔을 마시게 되는 것이었는데

야고보 사도의 뜻은 꽃길을 가고 축배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고배를 마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아예 따르지를 않았을 텐데,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마침내 뜻이 엇갈리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났을 때

주님께서는 적지 아니 실망하셨겠지만, 그것을 드러내시지 않고,

당신께서 마실 고배를 너희도 함께 마실 수 있겠냐고만 물으십니다.

 

이에 야고보와 동생 요한은 마실 수 있다고 호기롭게 대답하는데

주님께서도 너희도 마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래서 그 예언대로 야고보 사도는 첫 번째로 수난하게 됩니다.

뜻은 엇갈렸지만, 운명은 엇갈리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야고보 사도가 자기의 뜻이 좌절되었을 때,

그제서야 자기 앞에 놓인 운명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고,

그때라도 엇갈렸던 자기 뜻을 주님의 뜻과 일치시켰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모범이 되는 점이고,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로 갈 때

나의 성공과 성취를 목적으로 갔다가도

그것이 주님 부르심의 참된 길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그때라도 주님과의 일치로 나의 목표를 바꾸는 겁니다.

 

우리도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수없이 청하고,

우리도 야고보처럼 수없이 주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마리아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창설자 마리 드 라 빠시옹의 말씀처럼

우리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 청원할 때 처음엔 성공과 성취를 주십사 청했다가도,

궁극적으로는 성공과 성취가 아니라 사랑과 일치를 청해야겠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보여주세요.

 

반영억 라파엘 신부

 

프란치스코성인은 가난을 상징했던 분이었고, 평화를 대변했던 분입니다.

피조물을 사랑하고 돌보던 분이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늘의 우리에게 위대하게 보이는 것은

교회가 가난해지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의 정신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인이 보여준 겸손과 봉사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고자

교황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하셨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추기경단 앞에서 순명을 서약받았는데

교황좌에 앉아서 받은 것이 아니라 추기경들이 서 있는 자리로 내려와 선 채로 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광장에 모인 신자들 앞에 나타나 그들에게 목례로 인사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황금색 망토를 걸치지 않으셨고, 빨간 구두를 새로 마련하지도 않으시고

평상시 신던 검은색 구두를 신으십니다. 방탄차를 타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서로에게 소통하려면, 가림막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방문 중에도 한국에서 만든 경차를 타셨고

꽃동네에 오셨을 때는 거창하게 준비된 의자를 마다하고 평범한 일반의자에 앉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출세하신 그분은 세상 것을 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 삶이 끝까지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존경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을 권위에서 오기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받고 있나요?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요?

지금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 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 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이 아니라 그야말로 교종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참된 제자의 도 : 겸손과 섬김의 삶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은 12사도 중의 하나이며 성 요한 사도의 형인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따르게 하시고,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는데,

12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동기 요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데오, 열혈 당운 시몬,

그리고 가리옷사람 유다입니다.(마르 3,13-19; 마태 10,1-4; 요한 1,35-51 참조)

 

여기서 우리는 오늘 축일을 맞는 야고보聖人

53일이 축일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聖人을 구별하기 위하여

前者를 성 야고보(), 후자를 성 야고보()로 구별합니다.

그는 베싸이다 태생으로 어부였던 아버지 제베대오와 어머니 살로메의 아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제자로 삼으신 직후,

아버지 제베대오와 더불어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제자로 삼았습니다.(마태 4,18-22)

 

야고보는 44년경 헤로데 아 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됨으로써

12사도 중 첫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으며,

전승에 의하면 성인의 시신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안장되었고,

오늘날 여기에 대성전이 서 있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야고보 사도는 애제자로 통하는 자기 동생 요한과

수제자인 베드로와 함께 셋이서 자주 등장합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께서 이 세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생각이 각별했던 모양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럽게 변한 모습을 이들에게만 보여주셨고,(마태 17,1-8; 마르 9,2-8; 루카 9,28-3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예수께서는 이 세 사람과 그의 부모만 따로 데리고

방에 들어가 아이를 소생시키는 기적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마르 5,21-43; 마태 9,18-26; 루카 8,40-56)

뿐만 아니라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려가시어 게쎄마니 동산에서 고통과 번민에 싸여

기도하며 보내신 마지막 시간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마르 14,32=42; 마태 26,36-46; 루카 22,39-46)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이란 이름을 붙여주셨다고 하는데(마르 3,17),

그 이유는 루카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묵어가기 위하여 선발대를 보냈으나 거절당하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하고 묻습니다.(루카 9,51-54)

물론 두 사람은 예수님께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었는데(루카 9,55)

그 꾸지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오늘 복음에도 거듭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의 원전(마르 10,35-45)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딱 한군데만 고쳤습니다. 즉 마르코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께 와서

도래할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각각 주시기를 청했다고 하지만,

마태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와서는 어머니가 예수께 청을 드리는 것으로 고쳤습니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예수님 수난사를 종합하면 이 어머니의 이름은 살로메인데(마르 15,40; 마태 27,56)

왜 마태오는 느닷없이 죄없는 어머니를 이 장면에 끌어넣었을까요?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마태오는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야고보와 요한의 체면을 생각하였고, 사도단 가운데서 그들이 차지하는 명예를 지켜주려 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타 섞인 말씀은 어머니를 건너뛰어 두 제자에게 향합니다.(22-23)

또한 다른 열 제자들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화를 냅니다.(24)

그렇다면 나머지 열 제자들이 화를 낸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문제의 발단은 사실상 앞서간 복음에 있는데,

우선 부자 청년과 낙타와 바늘 귀”(마태 19,16-26)의 대목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받게 될 것인지 묻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하고

분명히 말씀 하십니다.(19,27-28)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백배의 상과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니,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들떠 있었고 뿌듯했겠습니까?

열두 제자들은 제각기 속으로 주님의 좌우 자리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태가 이쯤되면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20,17-19)

그들에겐 들리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모두를 불러놓고 참된 제자상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제자란 봉사하는 자이며, 종 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옥좌의 자리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야고보 사도처럼

순교로 목숨을 내어놓은 후에 받게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참된 제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그저 종으로서 봉사해야 하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섬기는 사람 (마태 20,26)

 

한 아델라 수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8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웃에게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나와 조금 거리가 있는 이웃, 혹은 먼 곳에서 자연재해나 어려움에 처한

면식 없는 이웃에게는 쉬이 안타까워하고 마음을 열면서도,

나와 가까운 이에게는 때때로 나의 틀로 바라보며

너그러이 넘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너그럽지 못함은 나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하느님이 주신 일상을 아름답고 기쁘게 살아가기보다는

팍팍하고, 힘겹게 버텨냄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야 맙니다.

 

나의 틀, 자아를 넘어서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의 시선으로 내 가까운 이웃에게

기쁨과 사랑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해봅니다.

 

 

[출처] 마태 20,20-28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작성자 베네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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