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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6일 수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3.07.26|조회수24 목록 댓글 1

2023726일 수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1독서 : 탈출 16,1-5.9-15

복 음 : 마태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더운 여름날,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료는 일명 아아라고 불리는 것으로,

우리 성당 카페에서도 제일 많이 나갑니다.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를 줄여서 부르는 것이지요.

사실 이 아이스아메리카노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컵 가득히 얼음을 넣고 물 150ml를 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에스프레소 2잔을 넣으면 그만입니다.

저 역시 간단하고 맛있어서 즐겨 마시는 음료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는 지인과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문했던 음료는 둘 다 아이스아메리카노였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아이스아메리카노 안에 들어있던 얼음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얼음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얼음이 모두 녹아 물이 된 것입니다.

이 물을 가리키면서 1시간 전에는 얼음이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얼음이었다는 사실보다, 지금 물이라는 사실만 남게 됩니다.

 

왕년에~’라는 말을 쓰며 과거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분을 종종 봅니다.

그 영광이 과연 본질 자체가 변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본질은 같고 잠깐의 변화만 있었던 것입니다. 얼음과 물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랑스러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깐의 변화를 가지고 본질 자체가 바뀐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겸손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일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들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 능력과 재주를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교만을 통해서는 하느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하느님의 영광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하거나, 낸다 해도 별 볼 일 없는 결과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씨를 뿌렸는데 길가, 돌밭, 가시밭에 떨어집니다.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밭에서는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 상태가 길가, 돌밭, 가시밭, 좋은 땅으로 비유됩니다.

 

어떤 마음을 갖춰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커다란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요?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이 아닌 낮추고 낮춰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 힘만으로는 결코 맺을 수 없는 결실이 세상에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8월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과 크루즈 여행을 함께 했습니다.

크루즈여행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많이 간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주로 왔고, 젊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첫날 저녁 ‘COOL’이라는 공연을 보았습니다.

70년대 80년대에 유행했던 팝송을 주제로 한 공연이었습니다.

그때는 고고에서 디스코로 넘어가던 시대였습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청계천에 가서 레코드 판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귀에 익은 흥겨운 음악을 들으니 제가 8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매일 저녁 공연을 보는 즐거움이 있고,

짐을 다시 꾸리지 않는 것이 크루즈 여행의 장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굳이 고민하지 않고 정해진 식당을 골라서 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80년대는 풍요와 번영의 시대였습니다.

국민소득 천불과 수출 백억 불의 시대였습니다.

자가용이 보편화되던 시대였습니다.

86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의 시대였습니다.

교회에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고,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예비자들이 교회를 찾았고, 본당을 새로 늘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를 넘어 저는 1991년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서양의 팝송과 생맥주 그리고 프로야구와 영화에 젖어 있을 때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사물놀이와 민중가요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등장했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근로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농활을 통해서 우리 농촌의 현실을 제대로 알아가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서양의 철학과 서양의 신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과 우리의 신학을 연구하며 신학의 토착화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80년대는 공존의 그늘에서 힘들어 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대였습니다.

저도 돈 보스코 센터에서 1년 정도 봉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직업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함께 갔습니다.

야학을 하는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신학교에서는 해방신학, 아시아신학, 민중신학을 토론하였습니다.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한 젊은이는 북한으로 가서 남한의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한 사제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의 무서움도 젊은이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BTS의 음악이 팝송의 본 고장에서 1위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시대를 그리워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지만 굶주림 앞에서 자유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굶주린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달라고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라는 현실 앞에서 이집트의 풍요를 그리워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깨닫지 않는다면, 스스로 일어서지 않는다면

만나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만나는 씨를 뿌려야 얻을 수 있습니다.

씨를 뿌려서 거두는 만나를 먹어야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고, 아폴로는 거름을 주었지만 결실을 맺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뿌리는 씨가 길가에 떨어지고, 자갈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2023년이라는 밭에 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뿌리는 씨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고,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나는 씨는 뿌리지 않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태오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요,

둘째는 뿌려진 씨에 대한 이야기, 곧 열매인 결실에 대한 이야기요,

째로는 씨가 뿌려진 땅에 대한 이야기, 곧 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첫째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서

밭을 구별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해주며,

째로는 그 씨앗은 열매를 맺고 실현되고 성취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며(이사 55,11),

셋째로는 씨가 뿌려진 밭을 잘 가꾸어야 할 하느님 자녀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

 

그렇다면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게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내가 좋은 땅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땅이 좋은 땅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은 땅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씨앗이 뿌려지기 전의 땅의 상태가 좋은 땅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뿌려진 후에 땅을 갈고 가꾸는 것에 의해 그 땅의 성질이 결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씨를 가꾸는 농사법은 먼저 밭을 잘 쟁기질한 다음에 씨가 뿌려진 것이 아니라,

어느 땅이든 상관없이 먼저 씨가 뿌려진 다음에 그 밭이 쟁기질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밭에 씨앗이 선사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그러니 씨앗이 내 안에 뿌려진 채 여전히 묻혀 있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며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요,

그 열매로 자신의 배를 채우기보다 타인에게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4)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씨앗의 모시고 살며, 씨앗을 기르며 살게 하소서.

오늘 제가 당신 말씀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시고,

당신 말씀으로 제가 거룩해 지게 하소서.

아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고 햇빛으로 타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 버리지만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바라는 것은 결국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앗을 뿌린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4)

여기서 길이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넷길 세상이다.

이 길에는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고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길은 단단하여 씨앗을 덮을 만큼 충분한 흙이 없다.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6)

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지나가는 악마들에게 채여 간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겨울이라고는 없는 날씨가 맑고 편할 때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운 시기나 박해가 닥치면 쉽게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

신앙인은 가치관이 올바로 서 있어야 한다.

이 가시덤불은 하느님보다도 재물을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재물에 관한 관심과 욕망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 60,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제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라는 밭에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와 가시덤불을 걷어내어 좋은 땅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을 살 수 있다.

 

 

 

 

 

 

성 요아킴이여, 기뻐할지어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직자 수도자 부모로 산다는 것 때로 큰 기쁨이요 보람이지만,

반대로 그들의 부모라는 신분, 그 자체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님들 역시 한 본당이나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 신부나 수도자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언행에 있어서 신중 또 신중해집니다.

너무 나서서도 절대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뒤로 물러나 있어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적절하고 균형 잡힌 처신을 하느라 죽을 고생을 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하느님께서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신 나자렛의 마리아,

그녀의 부모셨던 요아킴과 안나의 삶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 마리아가 부여받은 엄청난 사명이 자신들로 인해 어긋나면 안 된다는 마음에

요아킴과 안나는 늘 조심조심, 조마조마, 기도 속에 살아가셨을 것입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일생에 대한 저작이나 문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 가운데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사제가 저술한 책에 의하면,

안나 성녀의 생애는 구약시대의 유명한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늙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던 요아킴과 안나는 눈물의 기도 끝에

기적처럼 아이를 갖고 출산하였는데, 그녀가 마리아였답니다.

 

안나의 자비심은 각별했답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행하던 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을 열고,

구차한 사람들에게 손을 폈던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천상적 지혜로 충만했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특별한 성덕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요아킴은 유다 가문들 가운데 가장 정통적인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나자렛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엄수했고,

평온한 청년 시절을 지냈습니다.

혼기가 차자 레위족 가문의 소녀 안나와 혼인하였습니다.

두 분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충만한 신앙생활을 통한 완덕의 길을 추구함으로써,

마리아의 사명을 준비하였습니다.

 

성 요아킴이여, 기뻐할지어다.

무릇 세상의 구세주 예수님을 나으신 어머님이

곧 당신의 따님이기 때문입니다.”(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수고와 땀의 열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이 튼실해야 하고 땅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맞은 기후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기후는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제 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수해를 입은 모든 이들이 하루빨리 본래의 생업에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씨앗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졌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 중요합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좋은 씨앗이 아니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맞은 기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니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필요합니다. 김매기를 하는 인간의 협력입니다.

 

좋은 땅이 아니라면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어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또한 좋은 씨앗을 구하려면 그만한 경륜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후를 맞추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을 얼마나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폭우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커서 가슴이 아픕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연을 너무 거슬러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씨앗인 말씀이 있어도 무관심하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인 마음이 있어도 전해주는 말씀이 없으면 또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면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푀멘).

그리고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좋은 땅이고 그 마음 안에 귀한 말씀을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4,7).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에 접하게 되고 서운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길바닥, 돌 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적잖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결실은 내 생각대로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주변의 풀은 우리가 뽑아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4. 뿌린 씨 전부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5. 뿌린 것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7. 종자는 남겨두어야 한다.

 

 

 

 

 

 

복음의 씨앗과 마음의 밭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만약 우리들 가운데 몇 사람이 약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생애를 놓고 각각 한 권의 책을 집필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10명이 각각 책을 썼다고 해서 그 10권의 책이 결코 모두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 중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료들을 모아야 한다.

우선 가장 중요한 자료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들이 되겠고, 그 밖에도 사도행전이나 서간들,

필요하다면 구약성서와 위경들을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아들인 모든 자료들을 토대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저자가 10명이라면 10명이 쓴 10권의 책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저자마다 자료들을 분석, 종합, 해석, 편집하는 방법이 다르고,

사용하는 문체나 문장의 표현과 유형이 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가장 가까운 시기에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과 행적에 대하여 기록한 책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한다.

복음서가 4개인 이유는 4명의 저자가 서로 다르게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4개의 복음서에 붙여진 각각의 이름들이

그 복음서를 실제로 집필한 저자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복음서들이 적어도 예수님의 직제자인 마태오와 요한,

그리고 직제자의 제자인 마르코와 루카라는 사람의

사도적 권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한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통상 마르코 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서 기원후 50년경에 수집된

예수 어록집을 근거로 기원후 70년경에 집필되었고,

그다음에 예수 어록집과 마르코 복음을 토대로 빨라도

80년 이후에 마태오복음서와 루카 복음서가 기록되었으며,

90년 이후에서 100년 사이에 비교적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요한복음서가 집필되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공관복음서라 불리는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서는 그 분량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상 비교적 대동소이한 양상을 띠고 있으면서,

전체적 사건 자체와 저자 개인의 특수성과 고유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넷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서는 개인의 특수성과 고유성이

한층 가미되어 돋보이는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각의 복음서를 대할 때, 이런 관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줄곧 마태오 복음을 평일 미사의 복음으로 들어왔으며,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 계속 듣게 될 것이다.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카 복음을 평일 미사의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참고로 연중 제1주간부터 제9주간까지는 마르코 복음을 듣는다.

 

주지하다시피 연중시기는 다른 시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있었던 가르침과 행적을 묵상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활철학과 그 정신을 따라잡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마지막 수난, 죽음, 부활 사건을 뺀

나머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대략 대여섯 개의 군락으로 엮었다.

이를 크게는 다섯 개의 설교집성문과 한 개의 기적사화집성문으로 나눌 수 있다.

 

마태오는 우선 굵직한 10가지 기적사화를 8-9장에 모아 놓았고,

5-7장에는 산상설교를, 10장에는 파견설교를, 13장에는 비유설교를

18장에는 공동체 설교를, 24-25장에는 종말심판 설교를 모아 엮어놓았다.

오늘 복음은 세 번째 설교집성문인 비우설교에 해당된다.

비유설교에는 전부 7개의 비유와 그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데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비유를 통한 가르침의 대상을 본다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오가 집성한 비유설교의 주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의 모두 하느님 나라와 그 신비에 관한 것이다.

비유설교에 등장하는 7가지 비유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느님 나라의 어느 한 측면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주면서

하느님 나라의 특성과 성격을 상징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알려준다.

비유설교의 부차적인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지상 宣布者具現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란 말 그대로 神祕(mysterium)이다.

신비란 인간의 이성적 理論認識을 초월하는 不可思議하고 영묘한 비밀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밝혀주려 하신다.

그러나 신비 자체가 인간의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말도 지식도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깨우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자.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이는 복음이 선포되는 환경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의 말씀이 항상 좋은 조건에 뿌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씨가 뿌려진 장소와 결과를 비교한다면 비유자체는 쉽게 이해된다.

길바닥새의 밥, 돌밭말라죽음, 가시덤불숨막혀 죽음,

좋은 땅100, 60, 3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결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렇게 비유란 표현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보조관념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면에 나타나지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원관념은 비유 뒤에 숨겨져 있다.

따라서 원관념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비유는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그 지혜는 다른 어떤 지식이나 슬기로움이라기보다는

바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말하는 알아들을 귀’(9)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귀 기울여 듣고 머리로 깨달아 마음에 심는다면 복음은 필히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 밭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간악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온갖 환난과 박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나 그 밖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기대치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조건, 즉 알아들을 귀가 있는 마음에 뿌려진 씨앗은

그 씨앗이 담고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백 배 이상의 열매를 가져오는 법이다.

하나의 낟알이 뿌려져 100개의 낟알을 열매 맺는다는 것은 분명히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과장되었기에 하나의 복음의 씨앗이 가져오는 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씨앗이기 때문이며,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돌보아 주고 가꾸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보나벤뚜라 수녀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왜 뜬금없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연상되는 걸까.

크리스틴을 곤돌라에 태우고 지하 아지트로 내려가는 유령이

예수님과 닮은 것도 아니고 장면의 맥락이 유사한 것도 아니다.

근데 왜? 공통점은 수상 교통수단이 등장한다는 것 뿐인데.

 

아마도 내 상상 속의 배에 탄 예수님과 그날 분위기가 어둡고 신비로워서 그런 듯하다.

언제나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일찍 기상, 출근해서

아직 어스름한 하늘이 드리운 호숫가 보트에 올라타는 예수님이 그려진다.

그 아침에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겠다고 모인 이들에게도 눈길이 간다.

오늘 하루도 부지런히 살자는, 복음과 전혀 상관없는 묵상 잠깐 해주시고.

 

예수님 말씀은 어떨 땐 너무 간단하다.

오해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너무 소박해서 문제가 될 지경이다.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 뒤에 예수님의 해설이 따라 나온다.

그 해설에 의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각종 땅으로 비유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오늘 복음 묵상에서는 씨뿌리는 사람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주인공 농부가 씨를 흩뿌리는 동안 어떤 씨는 길로 떨어지기도 하고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지기도 한다.

주인공이 거기 뿌리고 싶어서 뿌린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손이 헛나가거나 손가락 사이로 씨앗이 흘러 나갔을 수도 있다.

그는 이제 갓 농사일을 배우는 사람일 수도 있다.

좌우지간 씨를 뿌리는 주인공의 묵묵한 손짓을,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뿌려지는 씨앗들이 톡톡 튀며 여기저기 땅에 올라앉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본다.

 

주인공은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밭 안에 씨가 뿌려지지는 않는다.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들은 헛수고를 상징할 수도 있다.

물론 그의 부주의나 그닥, 솜씨 좋지 못한 손놀림처럼 그의 탓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약간의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좋은 땅에 자리 잡은 씨들 덕분에 수확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이 내는 수확의 합이,

나쁜 땅으로 튕겨져나가 사라져버린 씨들의 합보다는 언제나 월등하다.

 

100, 60, 30...

숫자들을 되뇌일 때마다 입꼬리가 근질거리며 올라 간다.

나는 밭 노동이라는 걸 수녀원에 와서 처음으로 경험한 주제지만

그래도 열매를 거둘 때 신난 기분은 좀 알기 때문이다.

 

사실 씨를 뿌리고 키우는 농사의 찐 주인공은 하느님이시고,

100배의 수확은 전적으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얼마나 힘과 위로가 되는지!

나의 어설픈 노력과 미숙한 솜씨 때문에 허비하는 것들, 실패하는 것들도 많지만

종내는 하느님께서 그 노력의 씨들 가운데 크게 키워주시는 것이 분명, 있음을 나는 안다.

 

예수님도 그 아침에 자신에게 몰려든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

이들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누가 회개할지,

누가 100배의 결실을 맺을 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침부터 완전한 율법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그들에게 정성껏 설파하신다.

당신이 하실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고,

언제 어디선가 그것을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아시기 때문이겠지.

 

 

[출처] 마태 13,1-9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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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7.26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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