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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3.07.27|조회수35 목록 댓글 1

2023727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1독서 : 탈출 19,1-2.9-11.16-20

복 음 : 마태 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 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교 1학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종이에 사람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며 종이를 구겨보세요.

이제 좋은 말을 하며 종이를 다시 펼치세요. 어때요? 구겨졌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죠?

그래요. 나쁜 말을 하고 나면 나중에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답니다.

그러니까 친구한테 나쁜 말을 하면 안 되겠지요?”

 

아이들은 이 말을 듣고서 친구한테 나쁜 말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친구한테 나쁜 말 하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냥 듣기만 하고 반대쪽 귀로 흘려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런 예는 아이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말이 아닙니다. 어른 역시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구겨졌던 흔적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나쁜 말과 행동을 통해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은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서 이야기해주는 것과 그냥 서술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특히 상대방이 말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또 상대방이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를 들어서 쉽게 설멍합니다.

특히 사랑한다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손길이 이러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가장 쉬운 비유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일상 삶 안에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쉬운 일상의 비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곧바로 알아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만이 구원의 대상이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가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이 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전해야 하며,

내가 깨달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 신비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할까요?

나쁜 흔적, 상처 되는 흔적이 아닌,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흔적을 만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크루즈 여행 중에 ‘One Day More’라는 쇼를 보았습니다.

유명한 뮤지컬의 절정 부분을 모아서 공연하였습니다.

레미제라블, 팬텀오페라, 시카고, 미스사이공, 위키드와 같은 뮤지컬의

귀에 익숙한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화려한 무대와 멋진 의상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저도 오페라는 볼 기회가 없었는데 뮤지컬은 관심이 있어서 몇 번 보았습니다.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시카고, 미스사이공, 아이다, 팬텀오페라, 위키드, 라만차의 사나이,

알라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명성왕후, 몽유도원도, 광화문연가와 같은 뮤지컬을 보았습니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뉴욕에 살기 때문에 손님들이 오면 가끔 브로드웨이로 가서 뮤지컬을 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의 삶에 보는 것이 무척 많습니다.

영화, 연극, 뮤지컬, 오페라, 음악회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는 것도, 순례를 가는 것도 대부분 보는 것입니다.

 

저의 32년 사제생활을 뮤지컬로 만든다면 어느 부분을 만들까 생각해 봅니다.

8년간의 보좌신부 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젊음의 패기와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기도와 성찰보다는 무모한 도전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8년간의 본당신부 시절은 안정과 성숙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결과를 볼 수 있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8년간의 교구청 시절은 연대와 화합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성가에 나오는 것처럼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은 기쁨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처럼 동료 사제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8년간의 외국생활은 다름을 받아들이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지내면서

고정된 관념과 틀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One Day More’라는 말처럼 하루하루가 모여서 32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의 시대가 열리면서 저는 매일의 묵상을 통해 저 자신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의 묵상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그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사건은 창조의 시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는 시간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시간이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면

하느님과 함께 지낼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보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으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당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가장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고,

가장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고, 가장 아픈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영어로 본다는 단어는 ‘See, Look, Watch’가 있습니다.

보인다고 할 때는 Se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수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검토하다, 살펴본다고 할 때는 Look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주의 깊게 한참을 본다고 할 때는 Watch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저는 본다는 것에도 3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목안(目眼)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은 심안(心眼)입니다.

신앙으로 보는 것은 신안(信眼)입니다.

눈으로 보아서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참된 진리를 얻기 어렵습니다.

마음으로 보아서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와 부활을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믿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고 가르치신 것이

하늘나라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것을 땅에서 가르치셨으니,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의 낯익은 사물이나 상황으로 예를 들어 쉽게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지 않고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마태 13,34)라고

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하고 여쭙자,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 주시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의 신비"가 모두에게 가려져 있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곧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를 아는 일이 허락되어 있고,

반면에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하기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이는 마치 불공평한 처사처럼 여겨집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 아무도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사도 4,34)

초대교회의 모습에 견주어보아도 너무도 빗나간 처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공평한 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고 기적을 보여 주시지만,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탤런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마태 25,28-29 참조),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에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밝히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 이사 6,9-10)

 

위의 두 번째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어가 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로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원하지 않고 거부한 완고함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완고한 마음을 주신 것(탈출 4,21)

이집트인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듯이(탈출 14,4.18),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의 눈과 귀를 닫는 것은

진정한 하느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이는 이미 온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듣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믿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주님!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시어

하늘나라의 신비를 제 눈이 볼 수 있고, 제 귀가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오늘도 도처에, 그리고 제 안에 벌어진 당신 사랑을 찬양하나이다.

아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11) 하신다.

제자들은 하늘나라를 원하고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신비를 알아듣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맞이할 마음이 없으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2)

이것은 열정과 열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넉넉히 주시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2) 라는 말은

자기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모르며, 그것이 없어져도 없어진 것조차 모른다.

그러니까 그는 하느님께 아무것도 바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여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세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그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했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하는데,

보면서도 보지 않고 들으면서도 듣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더 악해지고 당신과 멀어지더라도 회개하면 치유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구원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신앙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본다.

우리가 어떤 일에 빠져있으면 앞으로 나아가게 되며, 더욱 풍요해진다.

그러나 관심 없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에 무관심하게 되면 가장 중요한 것,

신앙마저도 빼앗기게 되고 빼앗긴 줄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믿지 않고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싸움까지 걸어왔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고, 또 체험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가지지도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겠는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모르면,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게 된다.

주님을 체험하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우리가 되도록

삶의 매 순간을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거기에 참 기쁨이 있다.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깨달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나쁜 것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물론 견뎌내야 할 고통도 만만치 않지만, 그에 못지않은 축복도 반드시 있습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깨달음으로 다가옵니다.

 

무엇보다도 큰 깨달음 하나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정말 무()와 같은 존재라는 것,

정말 보잘것없고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깨달음입니다.

 

동시에 이런 나에게 하느님께서 큰 자비를 베푸셔서 오늘 내가 있구나, 하는 깨달음,

그분으로 인해 내 삶이 가치를 지니고 내 인생이 빛을 발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함께 길을 걸어가는 동료 인간들, 때로 고통 덩어리요,

떼어놓고 싶은 혹이요, 애물단지, 걸림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선물이었다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족한 존재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라고

그 사람을 내게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난데없이 불쑥불쑥 다가오는 고통이나 시련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혹독한 고통 앞에 하느님을 원망했었는데,

세월이 좀 더 흘러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더 큰 그릇, 더 큰 나무가 되라고,

더 당신 가까이 다가오라고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보내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 대하는 이 하루,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지만,

사실 삶은 가장 큰 축복이며 눈부신 환희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런 일련의 깨달음 이후 삶은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입니다.

구약의 백성들, 특히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깨달음의 노력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여러 의미 있는 언행들,

그분의 특별한 가르침, 그분이 보여준 표징들을 보고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런 깨달음의 노력을 완전히 포기한 결과는

정체된 신앙, 그릇된 신앙, 그리고 멸망과 죽음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또 다른 깨달음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깨달음 중에 가장 큰 깨달음은 아무래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피붙이들이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그분만은 나를 버리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깨달음,

우리 각자는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라는 사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항상 내 가까이 현존하시고,

우리 매일의 삶을 동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깨달음.

 

 

 

 

 

 

속뜻을 헤아리는 지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세상 것에 눈이 밝으면 영적인 것을 놓칩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왕이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영원히 귀한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중복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겔러는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과 나의 일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육을 넘어 영혼의 맑은 눈과 귀를 가졌습니다.

우리도 영을 갈망하는 가운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에둘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때로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 편합니다.

상처받고 아파할 사람은 그만큼 관계의 형성이 덜 되었으니 비유가 편할 것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에게는 직접 얘기해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 많은 사고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면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이 외에는

다른 이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이에게

비유로 말씀하시어 깨닫게 하시고,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이에게는

바로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듣느냐?

말과 표상을 통해 제시되는 실재를 파악하느냐는 분명 다릅니다.

분명 믿는 이들은 속뜻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 입맛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드러난 사실과 사실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은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자로(子路)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곧장 하다니?’

염유(冉有)가 여쭙기를, ‘들었으면 곧장 해야 합니까?’

공자 대답하시되, ‘들었으면 곧장 해야지.’

이에 공서화(公西華)가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는 까닭을 묻자 공자 대답하시되,

염유는 물러서는 사람이라서 나가게 했고, 자로는 나서는 사람이라서 물러서게 하였다.’(論語-先進)”

비유를 통해서 진실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먹고 싶은 것만 먹음으로써 병을 만듭니다.

마음이 무디고 건성으로 보고 듣는 사람은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유는 넘치는 풍요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풍요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능력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진정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씀은

보고 들은 것을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속뜻을 알았으면 뜻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비를 보고 듣는 눈과 귀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비유설교 집성문(13)은 총 7개의 비유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3-9) 가라지의 비유(24-30)

겨자씨의 비유(31-32)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44)

진주의 비유(45-46) 그물의 비유(47-50)이다.

비유 말씀의 대상을 보면, 전반부 4개는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을 향한 것이며,

후반부 3개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13(정확히 13,1-53) 전체를 분석하여 보면

비유 말씀 사이에, 비유에 대한 설명과 주변 말씀이 들어있다.

 

이 부분은 모두 예수께서 군중이 아닌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으로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7), “씨뿌리는 사람 비유의 설명”(18-23),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34-35), “가라지 비유의 설명”(36-43),

그리고 비유의 결론”(52-53)에 관한 내용들이다.

따라서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이 서 있는 자세로 배에 앉아 가르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오직 전반부 4개의 비유 말씀(파종, 가라지, 겨자씨, 누룩 비유)뿐이다.

 

4개의 비유 말씀 외에 다른 말씀들은 군중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주신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11-13)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오 복음사가의 편집의도와 함께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오 복음 공동체의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복음 공동체는 왜 이스라엘 백성의 절대다수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였냐는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분명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외면은

하느님의 계획과 예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때마다 이사야 예언서(6,9-10)를 인용하곤 하였던 것이다.

(마르 4,12; 마태 13,14-15; 요한12,39-40; 사도 28,26-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만 하늘 나라의 신비를 밝혀주심으로써

제자들은 점점 더 깊이 알아듣게 되고 대다수의 이스라엘은 점점 더 못 알아듣게 됨으로써

가지고 있는 지식까지도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는 소명과 선택의 신비도 포함된다.

소명과 선택은 동시에 인간이 가진 신비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나라는 분명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잘못과 고의로 이 선물을 거부한다면 하느님께로 되돌아 가 버린다.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마태오 복음 공동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하느님 존재의 신비)에 관한 마지막 道具(instrument), 象徵(symbol)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직접 보는 눈과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는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16)

우리도 日常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마태 13,16)

“But blessed are your eyes, because they see,

and your ears, because they hear.”

 

기 여호수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왜 저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또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들은 누구이며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는 과연 너희들일까? 저 사람일까? 하는 고민을 해 봅니다.

 

그러다 문득, 매일 기도를 하고 묵상하고 조배 하며,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쉽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은 너희들(제자) 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세상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꼭 비유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마태9,13) 예수님께서

단순히 너희들과 저 사람들을 나누시며 차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성실히 묵상하며 기도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면

비유든 아니든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제자입니다.

 

나는 제자로 살아가고 있나요? 저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나요?

 

 

[출처] 마태 13,10-17 연중 제16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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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7.27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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