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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9일 토요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3.07.29|조회수59 목록 댓글 1

2023729일 토요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1독서 : 1요한 4,7-16

복 음 : 요한 11,19-27 또는 루카 10,38-42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또는> 루카 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옛날, 어느 마을에 벼농사를 짓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짓는 벼농사가 옆집 농사보다 안 되고 있음을 눈으로도 쉽게 구분할 수 있었지요.

벼의 크기 자체가 옆집과 비교할 때, 너무 작고 보잘것없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땀을 흘리며 정성을 다해 농사를 지었는데도 다른 집의 농사보다 부족했으니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의 경험 부족을 놀릴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들 몰래 밤마다 나가 자기 집 벼를 살짝살짝 위로 뽑아 올린 것입니다.

 

아침에 자기 집 벼를 보면 이제 흐뭇해졌습니다. 옆집보다도 훨씬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습니다. 이 청년의 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수수 한 번에 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잔머리로 흥한 자, 잔머리로 망한다.”

 

실제 우리 말 속담에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사람은 노력이 없기에 쉽게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선 벼처럼 뿌리가 얕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잔머리로 될 것이 아닙니다.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 특히 사랑의 길에 충실할 때

주님께 제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편하고 쉬운 넓은 길이 아닌, 불편하고 어려운 좁은 길로 가라는

예수님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열렬히 환대하였지요.

특히 마르타는 정성껏 시중을 들었고 마리아는

주님 말씀을 경건하게 들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마지막 표징이면서, 당신의 부활을 예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마르타와의 대화를 통해서 부활에 관한 당신 생각과

자기 신원을 확실하게 드러내십니다.

 

이 대화를 통해 마르타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관계에 있었으니 미리 오셔서

라자로를 고쳐 주신다면 슬픔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충분히 예수님께 실망하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실망하지 않고 또 원망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과 원망으로 일관된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늘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잔머리에서 벗어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며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강물이 어는 겨울에도 어느 한 곳에는 숨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공기가 통하고, 그래야 물고기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모이기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긴급조치가 있었고, 유신헌법이 있었고,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외롭고 지친 사람들이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공권력을 피해서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인권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시절에 숨구멍과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명동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학생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힘없던 노동자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찾아오던 곳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학생들을 잡아가려거든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그 뒤에는 사제들이 있고, 그 뒤에는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숨구멍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에게도 숨구멍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불면증 때문에 힘들어 하셨을 때 기도해 주시던 수녀님들이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수녀님과 신부님들이 있었기에

김수환 추기경님은 존경받는 이 시대의 어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께도

숨구멍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집에 머물면서 식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숨구멍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니코데모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도 예수님께는 숨구멍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 구원사업의 협력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이 있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도 예수님께 숨구멍같은 사람들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게도 숨구멍같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언제나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어머니가 있습니다.

늦은 밤에도 저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남들이 혹 저를 비난할지라도 어머니는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저보다 더 잘 아셨습니다.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그곳에서도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와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뭐든지 미리 해야 하는 업무 스타일이기에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저를 도와주었기에 맡겨진 일들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뒤에서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의를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고, 간식을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신문사의 창고 정리를 해 주시고, 음식을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 있는 한국 신부님들도 제게는 숨구멍같은 분들입니다.

제가 뉴욕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팬데믹의 터널을 함께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출세, 성공, 권력의 패러다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숨구멍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는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기념하며,

복음을 통해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에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마르타가 집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마치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할 것입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께 대한 확신에 대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하느님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지라도,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그렇게 하여 마르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믿음에 대한 확증을 일깨워줍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오늘 독서에서도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주님!

오늘 저는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고 믿습니다.”

하오니, 오늘 제가 당신의 생명(부활)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 제가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리이다.

아멘.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던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21-22)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다.”(25) 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사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

죽으려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탄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도

, 주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 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은 바로 구원의 체험이며

그럼으로써 부활 신앙을 올바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 사랑 고백을 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 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하며

오빠를 굳이 낫게 해 달라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또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성녀 마르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녀 마르타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 출신으로 성서상의 성인이다.

마르타의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16번 언급된다.

그것도 대단히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루카복음 10장에 3(38, 40, 41)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12, 12장에 1(12,2)이다.

복음서에 언급된 마르타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오빠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리아이다.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가족이었다.

이 가족은 성서상의 문맥을 살펴볼 때

그리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 당대에 명성을 떨친 위인도 아니고

재산이 많고 세력도 있는 富豪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가족, 이스라엘의 대다수 가족이 그랬듯이

평범하다 못해 가난하고 소외된 그런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족이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하느님의 눈물을 보이신 예수께서 마르타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蘇生시킴으로써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계시하셨다.(요한 11,1-44)

루카복음에서 보듯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청취하는 일을 즐겨하고,

마르타는 마리아의 행동을 다소 시기했지만,

예수님과 그 일행을 시중드는 일을 즐겨하였다.

 

물론 예수께서는 마르타가 많은 일에 신경을 쓰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으로써 그것을 마리아가 택했다고 하셨다.(루카 10,38-42)

그러나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예수께서도 굶주린 군중을

빵의 기적으로 먼저 배불리신 후에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지 않으셨는가.(요한 6)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觀想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德目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균형과 조화를 필요로 하는 덕목이다.

그래서 일찍이 베네딕도 성인(470-547)

일하며 기도하라!(ora et labora)”고 말했을 것이다.

2,000년 교회사는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 태도를

한 번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녀 마르타의 마음속에

예수님께 대한 굳센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며(요한 11,27)

그녀 또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였기 때문이다.

 

마르타 성녀의 축일에 듣게 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은

대화를 통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말씀(25-26)

마르타의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27)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로 알려진 라자로가 병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이틀씩이나 여유를 부리시다가(11,3-6),

결국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는 날(11,17)

베다니아에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다.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었다는 말은

라자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뜻하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 사흘이 지나면 무덤에 안장하였다.

 

많은 유다인들이 喪家를 찾아와 유족을 위로한다는 것은

당시 관례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잠시 후에 벌어질 놀라운 기적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고,

동생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설명은

마르타의 활동적 성격과 마리아의 관상적 성격을

잘 대변하는 대목이라 하겠다.(루카 10,38-42 참조)

요한 복음사가는 마르타의 굳센 신앙을 토대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계시한다.

이는 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마르타와

오빠가 소생하기도 전에 예수께 고백한 신앙은 다소 표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蘇生시킴으로써

마르타의 부족한 신앙을 넘치게 채워주셨다.

우리의 믿음도 마르타의 그것처럼 표면적인 경우가 많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약점은 인간의 理性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예수님의 믿음을 언급한다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여기는 것이며,

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언급한다는 것을 무능한 짓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믿음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는 거의 없다.

그들은 죽음을 죽음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죽음 다음에도 생명이 있음을 보여준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6)

 

김 마리 에프렘 수녀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30cm가 채 안 되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여행이라 했다.

우리가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으로 믿고 사랑하고 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마르타 역시 예수님의 권능을 알고 있었고 부활을 알고 있었다.

알고있었을 뿐 그것이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지는 않았었나 보다.

예수님은 그런 마르타의 지식,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온 마음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만드셨다.

알고 있다고 말하던 마르타는 결국

,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머리로는 참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많은 책을 보고 많은 강의를 듣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참으로 많이 알고 있지만

믿음은 그 많은 앎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신뢰,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참으로 대단하다.’

라고 예수님은 항상 믿음을 강조 하셨다.

 

알기로 치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었던가?

하지만 그들의 앎(지식)은 결코 믿음(사랑)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믿음을 가져오는 것은, 온전한 신뢰, 사랑만이 참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알았고 사랑했으므로 온전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그 믿음의 고백의 결과는 라자로의 생명부활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

내가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생전에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어.”라고 하셨는데

나 역시 이 사랑의 여정.

이 믿음의 여정을 평생토록 걸어가야 할 것 같다.

포기하지 않고...

 

 

[출처] 요한 11,19-27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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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7.29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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