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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31일 월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3.07.31|조회수47 목록 댓글 1

2023731일 월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1독서 : 탈출 32,15-24.30-34

복 음 : 마태 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99년 가족 여행으로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어 해외에 나간 것이지요.

더군다나 부모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음식까지도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그때 정말로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쌀국수입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하는 저였기에 아주 맛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국물에서 심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 쌀국수를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로 고수라는 풀 때문이었습니다.

음식에 화장품 냄새 나는 풀을 넣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거의 25년 전의 일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신부들과 종종 베트남 식당에 가서 쌀국수를 먹습니다.

그런데 고수 빼고요~~~”라고 말하지 않고, “고수 많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고수와 쌀국수가 입에 함께 들어왔을 때의 맛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고수가 있기에 쌀국수의 맛이 배가 된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1999년의 저는 고수를 즐겨 먹는 지금의 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맛의 취향이 이렇게 바뀝니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단정 지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일 리 없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열린 마음이 있어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너머에 있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당시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볼 수 있는 것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설명해주시지요.

, 하늘나라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지금 삶에서 하늘나라를 매번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습니다.

너무 작아서 무슨 씨앗이 이렇게 작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자라면 그 작은 씨가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로 변합니다.

누룩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적은 양으로 무슨 변화가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밀가루 서 말 속에 아주 적은 양만을 넣어도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겨자씨만 가지고 큰 나무를 상상하기 힘듭니다.

누룩만을 가지고도 부풀어 오르는 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도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만으로 결론 내는 것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지혜만이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있었을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크루즈 여행 중에 직원 장기자랑을 보았습니다.

직원들 중에 장기와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공연하였습니다.

노래, 악기연주, , 봉체조, 코미디를 선보였습니다.

전문가들이 보여 주었던 화려한 조명과 의상은 아니었지만,

직원들의 끼와 재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팬데믹 때 저도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피아노연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20년 겨울 동북부 엠이 송년모임에서 모두가 사랑이예요.’를 녹화해서 들려드렸습니다.

부족한 연주와 노래였지만 제게도 그런 재능이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23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성탄 전야 미사 전에 본당 장기자랑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과 하얀 성탄을 준비했습니다.

하얀 성탄을 불러서인지 2000년 성탄 밤 미사가 끝나니 눈이 무릎까지 왔습니다.

성당 버스도 운행할 수 없었고 우리는 모두 성당에 남아 전에 막걸리를 마시며

예수님의 성탄을 밤을 새워 축하했습니다.

 

신부님들 중에는 전문가 수준의 끼와 재능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인명구조 요원자격증이 있는 신부님도 보았습니다.

신부님은 크로아티아 드브로닉으로 여행 갔을 때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들었고,

즉시 바다로 뛰어들어 한국 여성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인명구조 요원이 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벽돌을 손에 들고 바다 위에서 한 시간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근력과 힘이 있어야 사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경침과 수지침을 전문가 이상으로 배운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맥시코로 가서 원주민들을 도와주기도 했고,

매년 미국에 와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80이 훌쩍 넘으셨는데도 건강한 몸으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끼와 재능은 아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공존의 그늘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동창도 있습니다.

10년을 교정사목을 위해서 일하였고, 출소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출소자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펀드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고시촌에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그의 기도와 영성으로 교회에 큰 선물을 남겨 주었습니다.

영신수련이라는 기도방법 입니다.

영신수련의 내용은 잘 모를지라도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는 알 수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영신수련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절대반지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두개의 탑은 그리스도의 깃발과 사탄의 깃발의 대결입니다.

왕의 귀환은 종말이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영신수련은 성경 말씀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길잡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복음 선포,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여정을

영신수련의 안내에 따라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영신수련은 두개의 깃발, 세 가지 유형의 사람, 겸손의 3단계를 통해서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영신수련은 지난날의 잘못을 돌아보며 죄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잘못을 했음에도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2000년부터 영신수련을 통한 30일 피정을 함께 했으니 어느덧 23년이 되었습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왕복 200킬로를 달려서 기도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화려한 꽃이 피기 위해서는 땅속 어두운 곳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가 있어야 하듯이

영신수련은 제 삶의 뿌리와 같았습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영신수련 23항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취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무익하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장기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731일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여러분의 장기가 있다면 무엇이 있는지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날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 그리고 교우들의 영성 생활 쇄신에 큰 역할을 하고있는

영신 수련에 초석을 놓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1491-1556)의 기념일입니다.

 

만년에 도달한 이냐시오가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참으로 놀랍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세운 결심을 단 한 번도 뒤로 미룬 적이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냐시오는 개신교 출현으로 흔들리던 중세 가톨릭교회를 수호하는데

가장 앞장 섰던 돌격대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입만 열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외쳤고,

그 표현은 오늘날 예수회 회원들의 모토처럼 되었습니다.

 

이냐시오의 전기를 모두 읽고 난 후 제 머릿속에 딱 남은 성경 구절이 있었는데,

루카 복음 1249절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냐시오의 생애는 그야말로 불꽃 같은 하루하루였습니다.

그의 이름 이냐시오가 지닌 의미 역시 타는 불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분열의 위기 앞에 목숨조차 내건 투쟁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너져가는 교회의 수호와 재건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그에 걸맞은 수도단체인 예수회의 설립과 제자 양성에

온몸과 마음을 다 바친 열정적인 생애를 살았습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급격히 약화 되어 가는

당시 사제들과 수도자들,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

불꽃을 일으키기 위한 헌신의 날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갔습니다.

 

이냐시오의 성소 여정의 동기가 된 사건들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는 원래 사제나 수도자가 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나가 큰 공을 세우고,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은 야심으로 가득 찼던 청년이었습니다.

 

묘하신 주님께서는 이런 이냐시오를 눈여겨보시고,

총애하시고, 그를 당신의 애제자로 발탁하십니다.

이냐시오 개인에게 있어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속적 야심으로 가득 찬 그에게 깊은 바닥 체험을 시키시고,

그 바닥에서, 그를 당신의 병사로 재탄생시키셨습니다.

 

이냐시오가 서른 살 되던 해,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에 참가하여 팜플로나라는 요새를 수비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이냐시오는

폭탄에 맞아 다리에 중상을 입게 됩니다.

 

워낙 큰 부상이었기에 치료도 어려웠고, 후유증이 상당했습니다.

꽤 긴 투병 기간이 필요했었는데, 그 시기 이냐시오는 워낙 심심한 나머지

이런저런 책을 뒤적거리게 되었는데, 그때 만난 책들이 여러 성인들의 성인전,

그리고 카르투시오 수도자 루돌프가 저술한 그리스도의 생애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심심풀이로 읽었는데, 조금씩 흥미를 느끼고, 마침내 온전히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인생관에 대한 회의감이 일기 시작했고, 현세의 허무함을 느끼는 동시에

드디어 영적인 눈을 서서히 뜨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냐시오의 삶은 180도 뒤 바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국왕의 용맹한 병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용맹한 병사로 탈바꿈하게 된 것입니다.

뒤늦은 나이에 시작한 사제 양성 과정을 이수하느라 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홀로 꿈을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 이냐시오는

선한 의지를 지닌 동료들을 규합하여 교회 쇄신 운동을 전개해나가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1529년 두 제자가 생겼는데, 성 베드로 파브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냐시오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오해를 사게 되고 이단자 취급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런 순간에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지만 매우 매운 맛을 가진 겨자씨에 비유하신다.

이 씨앗은 밭에 뿌려지면, 즉 비옥한 땅에 떨어지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고 한다.

복음이라고 하는 씨앗은 다른 씨들에 비해 무척 작다.

그러나 이 씨앗이 뿌려지면, 평범한 식물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나무로 자라나 믿는 이들을 상징하는 하늘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인다고 한다.

겨자씨는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완전한 생명력이 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32)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보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안에 있던 위대한 능력, 즉 그리스도의 권능,

성령에 힘입어 복음의 씨앗이 자라났고, 세상의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사도들은 세상에 그늘을 드리우는 가지이다.

이 가지에 다른 민족들이 생명을 희망하며 그 가지에 깃들인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33).

누룩은 반죽 속으로 없어지는 것 같지만 죽지 않고, 반죽 전체를 변화시킨다.

밀가루 서 말에 골고루 섞인 누룩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든다.

누룩이 많은 양의 반죽을 발효시켜 부풀게 하듯이

우리들의 삶도 누룩의 역할을 하여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사도들은 군중과 섞였을 때,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누룩은 반죽 속에 넣어지면 자기는 반죽 속에 녹아 들어가 반죽 전체를 변화시킨다.

누룩은 많은 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적은 양이라도 반죽을 부풀게 한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 그들과 하나가 될 때,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킬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겨낼 것이다.

밀가루 서 말이란 서로 갈라진 인간들을 의미하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는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다.”(갈라 3,28)라는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기능이란 비록 지금은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욱더 작용하여 결국 커다란 힘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고 아주 작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우리가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으면, 우리 주위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변화될 수 있음을 알고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순리가 지배하는 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 대가리와 뱀 꼬리라는 말로, 시작은 요란하고 그럴듯하지만,

끝에 가서는 일이 흐지부지 흐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과감한 사람은 시작은 잘하지만, 끝을 맺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한 사람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거창하게 시작하여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눈에 보이지 않게, 시작하여 점점 거창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이 밀가루 속에서 부풀어 오릅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법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면에서 시작하여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 안에서 자라나 기쁨으로 말씀을 행하게 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작고 큰 것이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큰일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 인간의 일일 뿐이고,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의 일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인위적인 법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잘난 척하면 헐뜯는 사람이 생기고, 아는 척하면 무시하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리고 힘센척하면 해치려는 사람이 생기고, 있는 척하면 뺏으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물이 흐르면 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모두를 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은 힘이 들지만 머지않아 큰 나무가 되고,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큰일을 위한 준비가 되느니만큼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안에는 큰 나무를 감추고 있고, 조그마한 누룩 덩어리는 위대한 능력을 이미 지녔습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누룩은 안에서 밖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나 분명 그 열매를 얻기까지는 햇빛과 비, 그리고 거름도 필요합니다.

주변의 잡풀을 뽑아주어야 하고 땀과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수고와 땀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열매를 주고 싶어 하지만

관리하지 않는 사람은 튼실한 열매를 수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누룩처럼 부풀어 오를 수 있는 하느님의 에너지가 있고

겨자나무가 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열매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주간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의 탈란트를 찾고 가꾸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혹 나에게 주어진 몫이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때가 되면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연일 폭염경보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건강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 돼지가 열받으면? 바베큐가 된답니다.

가장 뜨거운 과일은? 천도복숭아랍니다.

여름을 가장 시원하게 보내는 사람은?

바람난 사람이래요.

 

 

 

 

 

 

강론에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저는 강론에 항상 비유를 하나 이상 찾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진리를 깨달은 이는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치실 수밖에 없으실까요?

모든 비유를 다 깨달았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비유를 깨달은 율법 학자가 꺼내는 옛것과 새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비유입니다. 옛 비유를 새 비유를 통해 가르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왜 강론에 비유가 들어가야만

진정 비유를 이해한 제자가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오늘 비유 말씀을 이해해봅시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비유 중 겨자 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다른 비유들에 비하면 조금 해석이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해 놓은 해석은 조금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어떤 열매가 맺히느냐면 이웃 사랑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드는 것처럼 힘들고 쉴 곳이 없는 이웃들이

나에게 와서 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은 내 안에 들어와 어떤 변화를 일으킵니다.

왜 서 말일까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가 뿌린 씨가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드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길처럼 교만한 사람과 돌밭처럼 육체적인 사람과 가시밭처럼 돈 걱정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속, 육신, 마귀의 성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을수록 그 성향들이 줄어들고 부드러운 밭이 됩니다.

그래서 30배의 열매를 맺는 밭이 60배를 맺게 되고 나중에는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국 하늘나라는 생존 욕구가 줄어들게 만들어 이웃을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멍에를 주시며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은 모기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모기는 이웃을 찔러 달아나게 만듭니다. 쉼을 가진 사람만이 쉬게 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체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꿀을 먹어본 이가 그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꿀맛에 관해 설명할 때는 어때야 할까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소재들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꿀맛은 마치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고, 설탕물처럼 달며, 꽃의 향기가 납니다.”

 

그렇다고 꿀이 연인들의 사랑의 맛은 아니고 설탕물도 아니며 꽃향기와는 또 다릅니다.

만약 이것들을 각자 해석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해석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꿀맛은 연인들의 사랑이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설탕물이라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꽃으로부터 왔으니 꽃향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을 잊습니다.

먼저 그 사람이 말하려는 추상적인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꿀은 맛있습니다.”

 

꿀맛을 보지 못한 이들은 꿀이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그냥 자신들을 무시하고 놀리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맛을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해버립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 꿀은 연인들의 사랑처럼 달콤하게 맛있구나!

설탕물처럼 달구나! 꽃향기가 나는 맛있는 무엇이구나!’

 

하늘나라의 비유도 상당히 여러 개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도 하나의 개념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늘나라는 결국 성령으로 누리는 하느님 자녀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늘나라 비유의 개념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는 은총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모의 희생으로 오는 선물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모든 비유는 그 말하려는 개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개념은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 말하려는 사람을 믿고 사랑할 때 비유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꿀을 먹어본 사람이 그 꿀이 맛있다는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유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쫓아가서 꿀을 먹어본다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비유를 이해함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그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비유, 곧 다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모기와 예수라는 비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가 더 쉽게 이해되고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하늘 나라를

순종으로 체험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비유를 모두 이해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진리를 알려주는 율법교사가 됩니다.

율법교사가 되면 먼저

1.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2. 그 개념을 비유 말씀을 통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분께 다다르기 위해 비유의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3. 비유를 이해했다면 용기를 내서 그분께 순종하고 자신도 그분이 이끄시려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4. 자신을 이끌어준 비유를 설명하되 새로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5.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신뢰를 주기 위해 희생합니다.

그들이 그 비유를 말하는 이를 신뢰하게 된다면

그들도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율법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유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비유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소명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비유설교 집성문에 실려 있는 7개 비유 중에서

<겨자씨의 비유><누룩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제자들과 군중이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되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비유이다.

 

예수께서 계시하시려는 하느님 나라는 神祕 그 자체이다.

신비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고자 비유를 학습도구로 삼으신다.

오늘 비유의 소재는 겨자씨와 누룩이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하찮아 보일 수도 있다.

겨자씨는 씨들 중에 가장 작은 씨이지만, 밭에 뿌려져 성장하면

그 어떤 푸성귀(나물 종류)보다 크게 자란다.(최고 3m)

마태오는 여기서 나무가 된다고 했으나 이는 좀 과장된 표현이다.

그러나 하늘의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려면 푸성귀가 나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終局에 세상의 모든 백성이 하느님 나라에 쇄도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일 수 있다.

누룩도 마찬가지이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가진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누룩이지만,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리게 만든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은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하찮은 것들 같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능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능력은 필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낸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를

작디작은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신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면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장엄하게 하늘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느님 臨齋의 표징으로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과 행적들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고 또 놀라운 일들이었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사도로 삼아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초석을 마련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지만, 사도들의 복음 선포가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제자단의 배반은 물론 선인과 죄인이 함께 살아야 하는 것(밀과 가라지의 비유)이 교회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스스로 성장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누룩과도 같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뿌려진 씨 가운데는 열매를 가져오기도 하고, 때가 되면 추수의 기쁨도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들 안에는 하느님의 숨은 힘이 현존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새긴 것을 행동으로 증언한다면

그는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다.

그는 곧 큰 푸성귀(나무)가 되기 위해 밭에 뿌려진 겨자씨요,

빵이 되기 위해 반죽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누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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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7.31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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