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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1일 화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3.08.01|조회수21 목록 댓글 1

202381일 화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1독서 : 탈출 33,7-11; 34,5-9.28

복 음 : 마태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10년 그룹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이

청소년을 위한 텔레비전 공익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여러분처럼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습니다.

버스 기사도 되고 싶었고, 매표소 직원도 되어 보고 싶었어요.

한때는 경찰관과 군인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절망하지 않았지요. 대신 꿈을 바꾸었죠.

심할 때는 일 년에 일곱, 여덟 번 꿈을 수정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꿈이 지닌 힘을 믿고 그것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도전하는 거예요.”

 

큰 공감을 가져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윈의 말처럼, 꿈을 간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중에 꿈이 변경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꿈을 아예 갖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해도 안 돼. 이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편하고 쉬운 일만 할래. 다 귀찮아.

왜 내게는 갑부 부모님이 안 계실까?’ 등은 꿈이 꺾여 있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에는 새로움으로 나갈 동력이 전혀 없지요.

심지어 새로운 것을 보고도 전혀 새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관심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매번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끼려면 우리 역시 새로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맞습니다. 나의 꿈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복음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죠.

그래서 우리 중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의 길에 들어서길 바라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원수인 악마가 뿌리는 가라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갔다고 주님께서

너는 유혹에 넘어갔으니 이제 가라지다. 지금 당장 뽑아 버리겠다.”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종말이라는 수확 때까지 기다려주신다고 하십니다.

 

세상 종말이 언제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빨리 회개해서 좋은 밀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변화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새로움을 자기의 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꿈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직업(職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을 보면 생계를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계속 종사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직()은 벼슬을 뜻합니다. 벼슬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직(天職)이라고 말합니다.

옛 어른들은 위에서 벼슬을 거두기 전에는 함부로 직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업()은 내가 선택하는 일을 뜻합니다.

급여가 좋거나, 처우가 좋으면 더 좋은 업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일하다가 귀농하여 농촌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골프장에서 일하다가 식당에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업은 필요에 따라서 바꿀 수 있고,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평생 같은 일을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지만,

요즘은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얼마든지 일을 바꿀 수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같은 업종의 일로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새로운 업종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업을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개발과 경험이 중요합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도 있습니다.

 

최근에 을 걸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삭탈관직(削奪官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우던 일이라는 뜻으로

대단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직을 걸겠다고 했지만 직을 거는 경우도 거의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직이란 본인이 도박하듯이 걸고 말고 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을 함부로 하면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보기에도 어색합니다.

예전에 집안의 어르신들이 사제직(司祭職)’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제의 직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에 함부로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의 기도와 정성이 함께 했기 때문에 함부로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제의 직분을 내려놓는다면 이생에서는 어렵게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을 그만둔 것에 대한 보속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사제의 직분이 거룩하고 소중하다는 의미였습니다.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듯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예수님께서 부르신 12명의 제자들은 배반은 했었을지라도,

두려움에 숨었을지언정 ()’을 버리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유다도 뉘우쳤지만,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전승은 다른 제자들은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였고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성모님을 모셨던 요한 사도를 제외하면 다른 사도들은 모두 순교로서 주어진 직분을 다하였습니다.

역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책 교회사에서

12사도의 순교 내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교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그리스에 가서 전교하다가 아카이아의 파트라이에서

X형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12사도 중에 가장 먼저 순교한 것으로(사도12, 1~2) 기록되어 있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칼로 목이 베여 순교했다고 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팔레스티나와 이집트, 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군중들로부터 곤봉과 방망이로 매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필립보는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의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참수를 당해 순교했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고대 이란에서 전교하였고, 인도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창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마태오는 유대아를 순회하다가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교 중에 참수당했다고 합니다.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유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활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 대신 12사도에 들어온 마티아는

카스피아 연안에서, 박해를 받고 콜키스에서 돌에 맞고, 참수당했다고 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복음을 전하다가 길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사도들에게, 사제들에게 그 직은 그만큼 거룩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세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심으신 이 될 것입니다.

행여 두려움 때문에, 욕심 때문에 주님을 배반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우리는 가라지가 아니라 밀로 거듭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곧 나 자신의 역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행진 중 하느님과 모세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참으로 은혜롭고도 흥미롭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절친에게 말씀하시듯 모세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모세 역시 주님을 아버지나 스승처럼 대하며 수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모세가 느꼈을 감정이 얼마나 황홀하고 감사했을까요?

두 분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를 통해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분,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분,

천대에 이르도록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거듭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토록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충실성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의 호응은 영 시원찮았습니다.

틈만 나면 불평불만하고 투덜거렸습니다. 수시로 주님께 반기를 들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배은망덕, 배신과 반역을 거듭했습니다.

 

아무리 주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총애받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그런 모습 앞에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채찍을 손에 드셨습니다.

쓰라린 당신 가슴을 부여안고 이스라엘을 벌하십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노에 더디신 분! 통곡하며 울부짖는 이스라엘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벌하시는 마음을 거두시고, 다시 한번 그들을 회복시켜주시며,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간택과 총애-배신과 반역-진노와 징벌-용서와 회복의 반복이었으며,

이는 또한 오늘 우리 신앙인 각자 안에 반복되어온 역사입니다.

 

지난 제 신앙 여정을 돌아보면서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곧 나 자신의 역사로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자비의 주님, 분노에 더디시고, 빠른 용서의 전문가이신 주님께서는

결핍 투성이요 고통 덩어리인 가련한 나를 가련히 보시어, 징벌을 내리시다가도,

즉시 마음을 바꾸시어 자비를 베푸십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며 기다려주십니다.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세상이라는 밀밭에는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섞여 살아가지만,

밀밭도 추수 때는 밀과 가라지가 따로 추려지듯이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준비하라고 말씀을 하신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기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그것을 가리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밀과 가라지가 싹 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웃을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하고,

쉽게 뽑아버릴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 역시 가라지가 된다. 쉽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심판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다.

 

우리가 모두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보다도 지금, 이 순간 충실한 삶으로

언제나 좋은 밀알로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또한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나, 다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즉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항상 깨어있는 삶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으며 완전을 향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이다.

항상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좋은 밀알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인생의 끝에 서면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 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지나 봅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이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 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그 열매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 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 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지혜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지혜4,8-9).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먼 훗날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알곡을 만드는 것은 오늘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자애와 심판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탈출 33,11)

모세와 주님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습니다.

광야에서 아론과 미르암이 모세를 시기했을 때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민수 12,7-8) 하고 말씀하실 정도였지요.

 

모세는 충직함과 겸손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도 그에게 당신 마음과 계획을 열어보이십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하고

노래하듯, 경외심은 하느님의 자애를 부릅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이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큰 희망이 됩니다.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8)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비와 자애라는 당신 얼굴을 드러내시자

모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땅에 엎드려 간청합니다.

금송아지 사건 후 하느님께서 실망과 분노로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렇게 반복해서 빌고 또 빌며 함께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

사실 백성이 우상숭배에 떨어졌을 때 모세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요.

이런 경우에는 대개 죄지은 이들과 자신을 분리해

스스로는 결백하다고 주장하기 일쑤인데 모세는 달랐습니다.

"저들의 죄악과 저들의 잘못"이 아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이라는 표현에서는

죄를 지은 백성과 자신을 동일화하면서

그 죄를 자신이 함께 떠안고 가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립니다.

무죄하신 분께서 세상의 죄를 대신 지시고

스스로 가장 비천한 죄수의 신분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그분의 희생 제사는 죄인들과 하나로 취급당하기를 꺼리지 않으시고

성부 앞에서 "저희"의 범주 안에 모든 죄인들을 끌어안으신 겸손과 자애의 결과입니다.

 

복음은 '밀과 가라지 비유'의 해설 부분입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 13,40-42)

 

예수님 입에서 무시무시한 심판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끝까지 기다려주시고, 죄에 떨어지게 만드는 약함을 이해해 주시며,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언제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모세가 죄를 지은 백성을 위해 주님께 그토록 간절히 애원하였듯,

성부 하느님 앞에서 인류를 떠안고 당신을 죽음에 넘기신 예수님이시지만,

다가올 심판의 때를 유야무야 건너뛰지는 않으시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모호하고 미지근하게

선과 악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우리를 위협하고 겁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너무 늦지 말기를" 바라시는 염려의 뜻으로 들립니다.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이어지는 내일 미사의 제1독서를 미리 보면,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주님과 그토록 친밀한 시간을 보낸 뒤

빛나는 얼굴로 산을 내려옵니다.(탈출 34,29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의 빛나는 얼굴'이지요.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분을 마주하는 이들이 그 빛을 반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와 악의 유혹을 벗어버리고 고통과 시련의 도가니를 거친 영혼이

하느님 자애로 맑고 순수하게 변모되어 갑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영혼은 찬란한 빛 안을 거닐며 빛이신 분과 함께 빛이 되어 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뿌리신 좋은 씨앗들이지요.

이 본성 안에서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영글어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날이 맑은 빛을 더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추수의 기본 원칙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상세한 해설을 담은 대목이다.

무대는 군중을 떠나 야외에서 집안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해설은 오직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해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비유 자체만큼 쉽게 이해된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며, 가라지는 악의 자녀이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 당신이시고,

독을 품은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다.

이렇게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진 밀과 가라지를 주인이신 하느님은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그것은 가라지를 뽑으려다 자칫 밀을 뽑아낼 수도 있다는

주인의 염려와 배려 때문이다.(29-30)

 

추수 때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가을에 잘 익은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뽑아 처분하는 것이 추수의 기본 원칙인즉,

세상의 종말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된다.

세상을 심판하실 人子는 천사들을 보내어 善人을 뽑아 아버지의 나라에 살게 하고,

惡人은 뽑아 모조리 불구덩이에 처넣는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읽다보면 제자들이 바로 앞에 있었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31-33)는 놔두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두고 가라지를 특히 강조하여

예수께 설명을 부탁한 점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왜 그랬을까?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이 마태오 복음의 고유한 전승인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는 마태오 복음 공동체 안에 있었던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미 주지하고 있다시피 상당히 빠른시일 안에 벌어질 세상 종말과 최후 심판의 도래,

그리고 인자의 再臨에 관한 기대는

초기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갖고 있었던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지체현상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기대를 수정하게 된 것이다.

기대의 수정은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공동체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학습하게 되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와 세상 안에

선인과 악인이 세상 끝까지 공존한다는 것을,

악인을 섣불리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악인과 선인의 구분은 공동체의 소관이 아니라

재림하실 인자의 소관이라는 점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구성원의 관점은 자연히 세상 종말에 가서

선인과 악인이 각각 받게 될 보상과 대우에 치우치게 된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세상 종말에 비유된 추수 때의 일들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듯하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경에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신앙인을 돌아보면,

우리 각자는 언제든지 좋은 밀알이 될 수도 있고,

가라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가라지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신앙생활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온갖 악의 요소들이다.

이런 악의 요소들은 이미 씨 부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음산책 참조)

 

사람은 자기 마음에 뿌려진 씨앗을 이렇게 가꿀 수도 있고 저렇게 가꿀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예수께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를

악마로 규정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상 안에 분명히 악의 세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미 경험한 적이 많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악의 세력에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결코 악이 선을 이길 수는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J. W.괴테(1749-1832)가 쓴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를 감상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비유 설교 안에서 좋은 밀알은 영원히 좋은 밀알로 남고,

가라지 또한 영원히 가라지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신앙의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聖殿을 마련하신 성령께서 그 변화를 도와주실 것이라 믿는다.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진 좋은 복음의 씨앗이 좋고 많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씨앗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인내와 끈기로 기다리신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누구에게나

철저한 추수의 기본 원칙이 적용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43)

 

이 예레미아 수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는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부분(36-39)24-30절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주고,

두 번째 부분(40-43)은 최후 심판에 대한 설명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이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라고 하시는데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예수님은 이어서 종말 심판에 대해 설명하신다.

복음사가는 세상 종말이 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고,

종말 심판 때에는 악한 자들은 패배를 당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심판자는 사람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보내어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교회에 반대하는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의인들은 영광을 얻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절에 나오는 종말에 대한 말씀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라는 말은 하나의 경고이다. 왜냐하면,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두 귀를 가지고 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두 귀를 모두 사용해야 한다.

한쪽은 세상적인 것에

또 다른 한쪽은 하느님의 말씀만 듣는다면

경고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

나 중심적 사고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두 귀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올바르게 그분께로 마음을 향할 수가 있다.

 

오늘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좋은 씨가 되도록 하자.

[출처] 마태 13,36-43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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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8.01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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