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025년 12월 25일 목요일[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제1독서 : 이사 52,7-10
제2독서 : 히브 1,1-6
복 음 : 요한 1,1-18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오늘의 묵상
국 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 전체의 요약이라 하겠습니다.
‘로고스 찬가’로 알려진 이 서문은 창조 이전의 “한처음”(1,1.2)에서 시작하여
창조를 거쳐(1,3 참조) 여러 세기에 걸쳐 준비된 말씀의 육화 사건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라는 구절은 이 찬가의 핵심으로,
그리스 말을 그대로 옮기면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입니다.
‘살’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자
피조물로서의 특성을 가리키는 가장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는 교리에는 익숙하지만,
그분의 몸이 우리의 몸처럼 피로를 느끼고 병에 걸릴 수 있으며,
죽을 몸이요 냄새가 날 수도 있고 더러워지기도 하는 살이라는 사실에는 당혹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육화의 진실입니다.
육화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이요 사랑 고백이라고 신학자 칼 라너는 말합니다.
“‘영원이신 분’이 ‘시간’이 되셨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모든 현실에 대한 마지막 설명이신 분이 육신이 되셨다. ……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말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깊은 말씀을 세상에 보내셨다. ……
바로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 오시면서 하시는 말씀,
‘세상아, 너를 사랑한다, 사람아, 너를 사랑한다.
바오로야, 데레사야,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기에 너와 같이 되었다.
네가 되었다. 너의 그 비참함, ……
너의 죽을 운명까지도 나의 것으로 삼아 너와 일치되고 싶었다’”(『소 전례력, 기도의 길』, 15-16).
이는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좋은 일도 또 나쁜 일도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도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우리 마음은 살짝 쉬어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즐거운 성탄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제가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나왔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십니까?
1) 직원을 불러 항의해서 나온 음식을 되돌려 보내고, 자기가 주문한 음식을 받는다.
2) 그냥 먹는다.
3) 항의 후, 기분 나쁘다면서 나가 버린다.
뭐, 답은 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2번을 선택합니다.
착해서가 아닙니다(실제로 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음식도 괜찮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부모님께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편식하지 않고 어떤 음식이든 다 잘 먹으니까요).
솔직히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겨우 이런 부분에 제 감정을 쏟고 싶지도 않고,
부정적 생각으로 나를 더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까다롭고 완벽한 척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자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과 화합하지 못하니 당연히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불편함을 느끼기에 세상은 더 좋은 곳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아닌, 그냥 불편함만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자기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소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그리고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불편한 자리가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고, 이를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하느님이심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를 취해서 우리 역사 한복판으로 오신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불편한 길이었고, 또 고통과 시련으로 점철된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탄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 수도 또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조 욱현 토마 신부
어젯밤 미사의 전례가 하느님 아들의 탄생 신비를 맞이하는
흥분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오늘 낮 미사는 그 신비를 한층 더 깊이 묵상하게 한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신비의 심연을 바라보게 된다.
1.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복음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1,14)는 선언은
그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표면적인 사실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원문 eskēnōsen은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던
‘계약의 장막’(탈출 25,8; 민수 35,34)을 떠올리게 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머무르시는 분,
우리 가운데 거처를 이루신 분이 되셨다.
그분은 멀리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하느님,
인간의 기쁨과 고통, 시간과 공간 안으로 스스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시다.
2. 창조주이신 말씀이 피조물 안에 머무르신다.
요한복음은 “그분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분은 하느님이셨다”(1,1)라고 선포한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다(1,3).
그러므로 강생의 신비란 창조주께서 당신의 피조물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스스로 시간과 공간 안에 들어오시고,
무한하신 분이 유한함을 입으신 사건이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신성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De Incarnatione Verbi Dei, 54)
이것이 오늘 본기도가 말하는 놀라운 진리이다.
곧,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기에 인간은 하느님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영광의 역설: 낮아지심 속의 높아지심
요한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1,14)
그러나 이 ‘영광’은 세상의 눈에 보이는 화려한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심의 영광, 곧 십자가의 영광이다.
요한복음 전체는 이 역설을 중심으로 흐른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질 때,
나는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단순한 겸손의 모범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을 권위로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연약함을 통해 당신의 전능을 보여주신다.
4. 그분을 맞아들이는 자, 하느님의 자녀가 되다.
요한은 덧붙인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1,12)
이 자녀 됨은 혈통이나 인간의 욕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1,13).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외적인 사건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루카 복음이 마리아에게 전한 말씀처럼,
“성령께서 너에게 내리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감쌀 것이다.”(루카 1,35)
그 성령의 능력이 오늘 우리 안에도 역사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5. 하느님의 사랑, 인간의 단순함 속에
히브리서(1,1-3)는 이 말씀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아들이 “만물을 상속받으신 분이며,
만물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분은 이 영광을 버리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낮아지심을 통해 당신의 가장 참된 영광을 드러내셨다.
성탄은 바로 이 역설의 축제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기가 되시고, 무한하신 분이 우리 품에 안기신다.
6. 성탄의 신비,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성탄의 신비는 2천 년 전 베들레헴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 속에 장막을 치고 머무르신다.
가난하고, 연약하며, 사랑을 기다리는 이웃 안에서,
또 우리의 단순한 기도와 선의의 행위 속에서, 그분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머무르신다.
그러므로 성탄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이며,
또한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축제이다.
“여러분의 가정과 삶 속에,
오늘도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충만하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 성탄 대축일(낮 미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먼저 자막으로 나오고, 조연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보조 출연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다음에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와 함께 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조명, 미술, 의상, 카메라, 대본, 투자 기업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감독의 이름이 나옵니다.
한 송이 국화가 피기까지 소쩍새가 여름 내내 울었다는 시가 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나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신축에도 많은 분이 함께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성당 마당의 보도블록에 함께 했던 분들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많은 분의 땀과 눈물이 모여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2025년에도 본당에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드러나 보이지만,
사목회와 많은 봉사자가 함께했기에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서는 성탄이 우연히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 준비된 구원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그 준비의 중심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탄생 500년 전에 이미 임마누엘의 오심을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그 사자는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했습니다.
겸손과 순명의 길을 걸어 성탄의 길을 닦은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거닐 것이다.”
이는 자연 현상의 예언이 아니라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
참된 평등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상징적 메시지였습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언덕은 낮아지고, 굽은 길은 곧게 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세상에는 차별이 사라지고,
약한 이들이 높아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탄의 길을 이어 준비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즈카리야에게 나타나 늙은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그 아이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이 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도 나타나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하며 완전한 순명의 삶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다가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예언이 있었고, 천사의 메시지가 있었으며,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그 순명의 구유 위에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절망,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을 것입니다.
“형제에게 한 일이 곧 하느님께 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고 길어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 있는 성탄입니다.
그분께서 내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머물러 계신다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다면 매일 매일이 바로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면, 내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1년 내내 12월 25일이라 해도 성탄은 그냥 지나가는 하루 일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주는 사람,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현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이 땅에 다시금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이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목동들입니다.
주님의 성탄입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쁨 중에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일도 많을 겁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 모아 축하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s”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으면 성탄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한 형제가 산타복을 입고 나와 아이들을 위해 캐롤송도 불러주고,
작은 성탄 선물도 나눠주고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아이들 가운데에는 한 살도 채 안 된 갓난아기도 있었는데,
따뜻하신 어머니 원장님께서 집중 마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포대기 위에 누워있었는데, 우리 형제의 재롱 잔치를 보고서는,
누워서 깔깔 웃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크신 자기 낮춤,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백마를 탄 왕의 모습이라든지, 전지전능한 해결사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머리도 돌릴 힘도 없는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힘이나 권력, 총이나 칼이 아니라
작음과 겸손,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될 것임을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명명백백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성탄 미사를 드리러 온 아이들을 보면서 제 어린 시절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대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서울 근교 산 중턱 판자촌에 살았었는데,
함박눈을 맞으며, 어머니 손을 잡고 십리 길을 조심조심 걸어 성탄 밤미사를 드리러 가곤 했습니다.
성당은 제대로 된 건물이 아니라 군용 천막이었습니다.
미사 시간 내내 너무나도 추워 코끝까지 다 시렸지만,
선교사 신부님의 미소와 넓은 품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엄청 재미있었습니다.
끝나고 나면 선진국에서 보내준 구호품 나눔이 이어졌습니다.
꼬마입장에서는 꽤 벅찬 성탄 미사를 다녀오는 조건으로,
직장 일이 끝난 아버지는 양손 가득 성탄 선물로,
당시로서는 어린이들에게 최상의 선물이었던, 큼지막한 ‘오리온 종합선물세트’를 들고 오셨습니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밤새 이 과자 저 과자 맛보면서 그렇게 성탄절을 만끽했습니다.
은총과 축복의 성탄 전야에 성탄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성탄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에게 건네시는 종합선물세트!’
완성을 추구하지만 언제나 미완성인 우리들,
완벽을 추구하지만 늘 결핍된 존재인 우리들,
충족함과 충만함을 갈구하지만 늘 뭔가 허전하고 허탈한
우리들의 그 부족함과 한계를 가득 채워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값지고 정성스런 선물이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세상 가장 작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육화강생에 담긴 그 큰 은혜와 감동, 우리를 향한 큰 사랑과 깊은 의미를
침묵 속에 천천히 되새기는 이번 성탄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탄절은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으면 성탄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 내면에 자비와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주님 사랑의 기운이 있다면,
우리 안에 주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정화될 때 성탄의 참모습이 우리 앞에 드러납니다.
매일의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환하고 해맑게 웃으면,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겸손하신 하느님을 따라 심연의 바닥으로 내려갈 때,
우리는 거기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신 아기 예수님을 따라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겸손의 향기가 풍겨날 때, 우리의 얼굴은 성탄의 은총으로 빛날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한 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은
일상이
곧 거룩함의 자리임을
일깨워 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생활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일상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삶으로
말씀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신뢰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존엄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사람 안에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사람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낮아지기를 선택하신
사랑입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신 날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으로
조용히 들어오신
사랑이 시작된 은총의 날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 축하드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 승화 시몬 신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던 대림 시기,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초에도 불이 하나씩 밝혀지며
주님을 모실 준비를 천천히 해나갔습니다.
제단에 트리가 세워지고 구유가 설치되듯
생명의 나무를 기억하고
주님이 자리하실 공간을 단장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곳은 어둠이 가득 차 버린 세상이고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작은 빛은
세상으로부터의 박해와 반대를 이겨내고
생명의 나무는 그분이 못 박히는 십자가가 되어 버립니다.
그분의 구유에 있던 짚들은
그분의 머리를 씌우는 가시관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눈 앞에 오심을 기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길이 열렸고
가시관을 통해 흐른 그분의 피는
우리를 위한 속죄의 피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분의 길을 알고 믿고 있는 우리는
그저 조용히 기뻐합니다.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을 받아들이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맞이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사시는 말씀을 맞이하며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 여정이
그분의 영광을 증언하며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여정 안에서
모두 함께 환성을 올리며 주님을 맞이하는
기쁜 성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6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서 공석 요한 신부
성탄 축일은 예수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마태복음서는 에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분이고 그분이 출생하자
동방에서 세 박사가 베틀레헴까지 와서 참배하였다고 말합니다.
루카복음서는 동방에서 왔다는 세 박사의 이야기는 모르고,
우리가 밤 미사에서 들은 대로 아우구스토 황제의 호구조사령이 있었고,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인 베틀레헴으로 갔다가
외양간에서 예수를 출산하여 구유에 눕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들은 요한복음서는 이런 출생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의 기원이 하느님 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계속 말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라는 생명으로 나타났고,
그분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빛과 같은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도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된
은총과 진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는 은총과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은총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준 율법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는 하느님이 쉽게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풀고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지적하듯이 어두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옳다고 믿으며 어둠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어둠이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기득권자들이 쉽게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요한 20,22 참조)
그러나 교회는 13세기에 발생한 개별 고해성사를 고집하면서
그것을 통하지 않으면 죄의 용서가 없는 듯이 처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쳤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합니다.’
인류역사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한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권력을 하느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종교집단의 기득권자들은 그들의 권한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횡포에 시달리고 짓밟혔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타이르셨습니다.
당신도 섬기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그분에 대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성탄은 하느님이 기득권자들의 횡포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작고 연약한 하나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어느 성가가 노래하듯이 예수님은 ‘승리하고 다스리고 명령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들도 행복하라고 선언하면서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분 생명이 보여주신 삶을 배웁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고치고 살리면서 축복하였습니다.
그 생명은 절망에 우는 이들을 살렸습니다.
그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을 충실히 살다가
이 세상 권력자들의 거부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빛이 어둠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이웃을 돌보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잘못한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용서는 우리의 빛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풀고 용서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은 우리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빛을 추방해 버렸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말씀이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말씀을 성당 건물 안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베풀고 용서하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빛을 외면하고 어둠을 더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오늘 성탄은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강생하여 새롭게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은혜로움의 진리로 충만하시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심오한 이론 안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일상생활 안에, 용서하고 살리는 은혜로운 우리의 실천 안에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구유에 누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안에서 자라야하는 생명으로 구유에 계십니다.
진리는 우리의 실천 안에 자라야 하는 생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 진리를 실천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고치며 살리는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고 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 생각하는 어둠 안에 살고 있지만,
그 어둠을 밝히는 빛이 오늘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어두운 관행을 벗어나 진리의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영접하여 우리 안에 진리를 발생시켜야 합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기쁨의 축일인 것은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은 없고,’ 예수님이 ‘하느님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욥서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집착하고 욕심내는 것은
모두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14,1-2)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베틀레헴 외양간의 구유에 누운 어린 예수 안에 당신 스스로를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할 것을 호소하면서
예수님은 구유에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