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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025년 12월 28일 주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작성자vero|작성시간25.12.28|조회수45 목록 댓글 1

202520251228일 주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1독서 : 집회 3,2-6.12-14

2독서 : 콜로 3,12-21

복 음 : 마태 2,13-15.19-23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오늘의 묵상

 

국 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주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실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이 가정은 위협과 적대감에 쫓기며

두려움, 불확실성, 시련으로 이어지는 난민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헤로데는 아기 예수님을 놓치고 나서

바로 포기하지 않고 군사들을 보내 줄곧 이 가족을 추격하였다고 합니다.

이 가족은 헤로데의 군사들을 피하여

여기저기서 몇 시간, 하루, 며칠, 길게는 6개월을 머물렀고,

때로는 나무 밑에서 때로는 어느 집에서 머물렀으며,

때로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성가정은 이집트에서 311개월 정도 머물렀다고 전해집니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낯선 나라를 떠돌아다녀야 하였던 이 부부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마리아와 요셉이 하느님께 순종한 결과는 이렇게 시작하여 평생 이어집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결과를 감수하면서 늘 하느님께 충실하였고,

이 가족의 순종은 우리를 모두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성가정의 여정에 함께하면서

이주민과 난민들의 현실을 떠올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되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발걸음에는 수많은 발걸음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가족의 발자취를 봅니다. ……

많은 경우, 이 떠남에는 생존이라는 한 가지 이름만 있습니다. ……

이 시대의 헤로데들로부터 살아남으려는 것입니다”(2017년 성탄 전야 미사 강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주민이 되심으로써 인간이 위험에 놓인 곳,

거부와 적대적 위협을 경험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육아 전문가가 나오는 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의 일상을 관찰하고,

육아 전문가가 아이의 기질과 부모의 양육 태도를 분석하여 처방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또 이 프로그램이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는 말에

더 아이를 낳기 힘들겠구나싶었습니다.

부모의 부족함으로 자기 아이가 비뚤어져서 실패자, 낙오자, 소시오패스, 우울증 환자

심지어 범죄자가 되어버릴까 두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임지지 못할 거면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나오는가 봅니다.

 

물론 그냥 대충대충 키우세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 탓만이 아니라, 빠르게 변화되는 이 세상 탓이 더 크지 않을까요?

특히 육아는 어떤 대가나 특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 세상의 기브 앤 테이크라는 확실한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는 사랑의 관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또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도 아닙니다.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 다른 감정들이 들어가게 되면,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곤 합니다.

물론 사랑의 실천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그 사랑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주님께 맡기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16명이 한방에서 잤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불을 끄면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문제는 성호경을 긋고 사도신경을 하기 전에 잠들어 버립니다.

아침이 되면 항상 이 친구의 묵주는 아침에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이 친구에게 그냥 잠들어 버리는데, 왜 묵주기도를 하려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묵주기도 하다 잠들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해 주신대.

내가 하는 것보다는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더 효과가 있잖아.”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룬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합니다.

그냥 고상하고 평온한 이상적인 가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살해 위협을 피해 밤중에 국경을 넘어야 했던 난민이었습니다.

, 아무런 문제없음으로 성가정이 아니라,

서로를 믿고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성가정이 된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부모 공경과 자녀 존중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소유물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로 대하고,

자녀는 부모를 통해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곧바로 따랐던 요셉 성인의 모습이 모범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이란 대체 어떤 가정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를 통해 이렇게 들려줍니다.

그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며,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용서해주고,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는 것이다(콜로 3,12-14 참조).

 

또한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콜로 3,15 참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르게 하며,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고(콜로 3,16-17 참조),

서로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이다(콜로 3,18-20 참조).

 

한편, 이를 구체적으로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성가정이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요,

말씀이 성취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주인 되게 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말씀의 성취를 전해줍니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15),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2,23)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성취 안에는 모진 고통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이 가정은 이집트에서 불려나오기까지, 또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겨다녀야했고, 변방의 거류민으로 살아야 했고,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고통이 없는 가정이 성가정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니 어쩌면, ‘성가정에는 고통이 필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성취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란 고통이 없고 편안하고 안정된 단란한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앞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활동하고 성취되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것은 말씀이신 분께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아기모습으로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면서도 우리를 이끄십니다.

참으로 묘한 신비입니다.

말씀이시면서 말을 못하는이 아기는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때로는 보이지도 않는 빈자리가 되어 우리네 가정, 우리네 공동체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주인이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빈자리로 계십니다.

 

마치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빈자리로 있는 신부처럼,

우리 가정 안에서도 빈자리로 계시면서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끌어안으십니다.

그러면서도 성취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빈자리’, 그곳이 바로 중심임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님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우리 안에 작고 낮고 무력하게 말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살아계심을 볼 일입니다.

 

말씀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항상 작고 낮은 이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결코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보다 작고 나약한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작고 무력한 예수님을 만났는가?

 

나를 사랑하기에 언제나 나보다 작은 모습으로 내 앞에 무력하게 낮아져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심지어는 없는 자’, ‘빈자리가 되어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아멘.

 

 

 

 

 

 

 

이집트 피난

 

조 욱현 토마 신부

 

1. 가정, 강생의 신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도구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공동체인 가정을 통하여

구원이 역사 안에 뿌리내리도록 하신 사랑의 신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품, 곧 가정의 품을 원하셨다.”(Sermo 184,1)

, 하느님은 구원의 계획을 가정의 형태로 실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사는

나자렛의 삶을 통하여 인류의 삶을 완전히 체험하셨다.

따라서 강생의 신비는 단순히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이 가족의 일원이 되셨다.”는 사건이기도 하다.

 

2. 가정의 시련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

 

오늘 복음은 이집트 피난사건을 다룬다.

아기 예수, 마리아, 요셉은 예언자들의 말처럼(호세 11,1)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피난길에 오른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13)

말하며, 가족을 한 몸으로 묶는다. 이 표현은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연대를 상징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묵상한다.

요셉은 단지 순종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보호자였다.

그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아기와 어머니를 보호하였고,

그들의 피난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의 행위였다.”(In Matthaeum homiliae, 8,2)

이 나자렛 가정은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사랑으로 서로를 지탱하는 가족의 모범을 보여준다.

가정의 신앙은 평화로운 순간에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주는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3. 나자렛의 사랑: 일치와 협력의 모범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으로서 부모의 보호가 필요했다.

마리아와 요셉은 단순히 아이를 양육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함께 이룬 협력자들이었다.

교부들은 이 점을 강조한다. 성 암브로시오는 말한다.

요셉의 침묵은 믿음의 언어였고, 마리아의 순종은 은총의 통로였다.”(Expositio in Lucam, II,45)

이렇듯 가정의 신앙은 말보다 순종과 행동으로 증거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일치는 인간적인 사랑의 조화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뜻에 대한 응답의 일치였다.

 

4. 가정의 본질: 사랑 안의 개방성

 

나자렛 성가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첫 번째 교훈은,

가정의 참된 의미는 사랑 안에서만 존재한다.”

사랑은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하고, 서로를 결합해 주며, 심지어 가정의 상처마저 치유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했다.

성가정 축일은 가정이 지녀야 할

모든 가치, 사랑, 헌신, 희생, 정덕, 생명 존중, 노동, 평화, 환희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Homilia in Festum Sanctae Familiae, 1980)

사랑이 없는 가정은 구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사랑만이 가정을 회복시키며,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나게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그분이 현존하시는 곳에 참된 가정의 생명이 있다.

 

5. 가정의 신앙적 사명: 하느님께 열려 있는 공동체

 

두 번째로, 가정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다.

가정은 사랑의 학교이며, 생명의 성소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가정은 교회의 가장 작은 세포이며,

가정 교회로서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이다.”(2204)

따라서 진정한 가정은 하느님께 열려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기도와 말씀, 미사와 성사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꾸는 곳이 되어야 한다.

가정이 종교적 감각을 잃을 때, 인간적 사랑조차 쉽게 흔들린다.

나자렛 가정처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6. 개방된 가정: 세상을 위한 사랑

 

세 번째로, 나자렛 성가정은 세상에 닫히지 않은 가정이었다.

그들은 세상과 타인을 위한 가정이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마태 2,23)으로 불리심으로써,

가난하고 평범한 모든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가난을 통해 하느님의 부요를 드러내셨다.

나자렛의 겸손 속에서, 하늘나라의 문이 열렸다.”(Homiliae in Evangelia, 8,3)

가정은 사랑 안에서 개방되어야 한다. 사랑이 닫히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이웃에게 따뜻함을 전하고, 사회 속에서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

 

7. 가정의 영성: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일치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서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버지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콜로 3,18-21)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질서를 의미한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드러내며,

부부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징이다.”(1617)

그리스도와 일치된 가정은, 사회의 작은 교회로서 서로를 거룩하게 이끌어준다.

그 안에서 세대 간의 이해, 신뢰, 생명 존중이 자라난다.

 

결론: 하느님의 축복 안에 세워진 가정

 

진정한 가정의 기적은 하느님 사랑의 축복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사랑은 약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새로워질 때 완전해진다.

성가정의 모범은 우리가 가정 안에서 사랑과 용서, 기도와 봉사를 배우도록 초대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가정 축일 강론에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성가정은 교회의 첫 학교이며, 인간이 사랑을 배우는 첫 자리다.

나자렛의 조용한 집에서 세상이 구원의 길을 배웠다.”(Homilia, 1981.12.27)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며,

가정 성화 주간을 맞아 우리가 잃어버린 것,

그리고 다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떠오릅니다.

한 대기업 간부가 멕시코의 작은 어촌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는 바다에 잠깐 나갔다가 시간을 가족과 웃으며 보내는 어부를 보며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면 돈을 더 벌고, 배를 더 사고, 결국 나처럼 좋은 휴가를 올 수 있습니다.”

그러자 어부는 잔잔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미 매일 가족과 휴가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왜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해야 합니까?”

간부는 어부의 말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아이들의 생일도, 졸업식도, 결혼기념일도 지나가 버렸고,

가족들과의 대화도 사라졌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미래에 누릴 행복이 아니라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이라는 것을.

 

문명의 역습이라는 책의 지적도 이와 닮았습니다.

현대 아이들은 더 안전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자연을 잃고, 자유시간을 잃고, 경험이라는 산소를 잃고 있습니다.

햇빛 부족으로 근시는 늘고, 스트레스로 약을 먹고, ADHD 약 판매량은 폭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명의 편리함을 얻는 대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본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크고 웅장한 집은 살 수 있어도 그 집 안에서 오가는 가족의 대화는 살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식탁은 살 수 있어도 함께 웃으며 밥을 먹는 시간은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쌓고 있는 바벨탑은 결국 사막의 신기루처럼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보는 것은 가 주체입니다. 내가 보고, 내가 즐기고, 내가 판단합니다.

그러나 듣는 것은 이 주체입니다. 남이 말을 해야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도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었고,

예언자들은 모두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요한복음은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나자렛의 성가정은 바로 이 듣는 신앙위에 세워졌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요셉은 파혼하려 했지만,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들으셨고,

겟세마니에서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순명하셨습니다.

성가정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듣는 마음, 순명하는 마음,

서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비가 오는데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로 비를 피해야 한다고 합시다.

키 큰 사람에게 맞추면 작은 사람은 젖고, 작은 사람에게 맞추면 큰 사람이 젖습니다.

서로 탓하기 시작하면 둘 다 불행해지고 목적지에도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업고, 작은 사람이 우산을 든다면

둘 다 비를 피하며 갈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 나눔, 배려의 경험이 생기게 됩니다.”

가정은 바로 이런 곳입니다.

누구는 업어야 하고, 누구는 우산을 들어야 하고, 누구는 기다리고, 누구는 양보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통해 성숙해 가는 곳이 바로 성가정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나자렛의 성가정처럼,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귀,

마음을 열어 주는 대화, 조용히 서로를 믿어 주는 신뢰,

그리고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순명의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본받아 우리의 가정도 기도와 사랑과 대화의 집이 되게 하소서.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살아가는 작은 나자렛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가정 안에서 피어나는 신뢰와 평화를 통하여 당신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하소서.”

 

 

 

 

 

 

 

하루 0.01 밀리미터씩 성장하는 그대!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세상 안에서 결혼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모든 분들,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안에서의 교회, 성가정(聖家庭)을 꿈꿉니다.

그러나 희망 사항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엄청나다는 것을 매일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가고 계실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이 초단기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절규합니다.

한때 목숨 바쳐 사랑했던 그였는데,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하는 모습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외치며 울부짖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존재들, 내 분신이요 전부라고 여겼던 자녀들이

이제 머리가 커졌다고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심장을 찌릅니다.

 

성가정 건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한한 인내와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여유가 요구됩니다.

인간적인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멤버들도 순탄한 길만 걷지 않았습니다.

워낙 특별한 가정, 워낙 베일에 싸여있는 신비스러운 가정, 영적인 가정이었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봉헌하였습니다.

그때 성전에 있던 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감사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해 특별한 말 한마디를 건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 34-35)

 

성가정의 주요 구성원이셨던 마리아 역시 성가정을 꾸려가는 동안 수시로 영혼이 칼에 꿰찔렸습니다.

물론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성가정 안에서 천국 체험도 앞당겨 맛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상처와 희생, 각고의 노력과 헌신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성가정 축일에 한 가지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상대방은 우리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성장합니다.

하루 0.01 밀리미터씩이나 성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이 하루에 1미터씩 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기대치가 크다 보니 당연히 실망도 상처도 커져만 갑니다.

 

나자렛 성가정 공동체 안에서 예수, 마리아, 요셉 성인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가장 크게 노력한 덕은 인내의 덕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늘 인내하면서, 늘 기도하면서, 늘 격려하면서,

절대로 들볶지 않고, 모질게 대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나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공동체 안에 부성애가 가득 담긴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기억되고 꾸준히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콜로 3, 12-13)

 

 

 

 

 

 

 

주님께서 맺어 주셨으니, 주님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우리는 성가정이 정말로 많은 고난을 겪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고난들은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자들,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메시아를 배척한 자들의 박해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가정이 겪은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그 고난들을 성가정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만일에 성가정이 겪은 고난들만 생각하고,

그 고난들을 인내하고 극복한 과정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만 보면서 치료법은 보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가서 힘내라.” 라는 말만 하고 그친다면,

힘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힘이 더 빠지는 일이 됩니다.

힘내라.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 나도 도와주겠다.” 라고 진심으로말해야 합니다.

내 안에더 이상 남아 있는 힘이 없다면 밖에서그 힘이 와야 하는데,

신앙인들은 그 힘을 하느님에게서 얻고, 그리고 이웃에게서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은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2) 모든 부부와 모든 가정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부부이고 가정입니다(마태 19,6).

성가정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가정이니,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가정의 이야기들을 보면,

천사가 나타나서 알려 주거나 도와주었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천사가 도와준 것은 곧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쪽의 믿음기도인내도 중요합니다.

그들은 천사가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하느님의 보호를 믿었고, 믿었으니까 기도했고 인내했습니다.

믿음기도에서 인내가 생기고, ‘지혜가 생깁니다.

 

3)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도와주실 때,

직접 도와주시기도 하고, 천사를 보내셔서 도와주시기도 하고,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

천사처럼 착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했을 때,

누군가가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서 그것을 동방박사들에게 알리고,

동방박사들이 다시 그것을 요셉에게 전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헤로데의 측근이나 군대에 나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선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할 때, 또 이집트에서 지낼 때,

미움과 박해만 받은 것은 아니고,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친 황금, 유향, 몰약은

피난살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4) 각 개인의 가정을 보면, 어느 가정이든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고난과 위기들을 만납니다.

그런 때에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식구들 사이의 믿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

요셉은 하느님을 믿었고, 마리아를 믿었습니다.

마리아도 하느님을 믿었고 요셉을 믿었습니다.

 

부부가, 또 식구들이 서로 신뢰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은,

고난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도움을 잘 받는 방법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은(마태 18,20),

식구들이 마음을 모아서 함께 기도할 때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기도와 도움도 꼭 필요합니다.

어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교회 공동체에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공동체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2,26-27).

 

 

 

 

 

 

 

성가정 교회 공동체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6,1)

 

위 화답송 시편을 요약한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겨워 오늘 종일 노래 기도로 바치려 합니다.

주님 성탄 8일 축제내 네 번째 날인 오늘 1228일은

주일이자 참 아름다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2025년 말부터 2026년 새해까지 계속 이어지는

주님 성탄 축제가 우리를 기쁨과 평화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또 오늘 20251228일부터 202613일 까지는 제25회 가정성화주간이기도 합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담당 문창우 주교도 담화문에서 가정교회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가정은 단순한 외적생활의 공간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이 흘러넘치는 가장 작은 교회 곧 가정교회입니다.

이러한 가정교회는 생명을 환대하고,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사랑으로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하느님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교회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공동체의 빛나는 원형이

바로 주님 성탄과 더불어 성전 제대 앞에 상징적으로 꾸며진 아름답고 소박한,

신비로운 사랑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양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관상적 침묵 중에 중심에 자리 잡은

구유안의 아기 예수님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은혜로운 아침 찬미가 1절만 소개합니다.

 

나자렛 오막살이 순박한 예배 얼마나 감미로운 추억일런가

나자렛 예수님의 고요한 생활 그 생활 기억하며 노래들 하세.”

 

누구나의 성장 과정에서 따뜻한 보금자리 가정 공동체의 영향은 절대적입니다.

아니 아이들뿐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평생 가정 공동체의 따뜻한 보금자리 품은 절대적입니다.

이런 공동체 없이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1인가구 36%800만 명이 이에 속한다 하니

이제 <고독사><고립사>가 빈번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야흐로 성가정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품>이 되어

이런 모든 이를 받아들여할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넓고 깊이 보면 인류 모두가 <하느님의 한가족, 한식구>이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입니다.”

말씀하시며 이를 암시합니다.

 

바로 이런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모범이 여기 <요셉 수도원 성가정 교회 공동체>,

참 넓고 깊은 하느님의 품이 되어 참 많은 이들의 성가정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가정공동체는 물론 다양하고 많은 공동체가 무너지고 파괴되는

개인주의, 생존경쟁, 적자생존, 물질만능, AI 만능의 작금의 위기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의 성가정 공동체의 건설이겠습니다.

 

혈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혈연의 가정 공동체 역시 끊임없이 주님의 거룩한 성가정 교회 공동체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 이상적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무엇일까요?

 

첫째,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함께 산다고 성가정 공동체가 아닙니다.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자유롭고 행복한 다양성의 일치의 공동체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성가정을 인도하는 성 요셉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니

말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의 모범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과 끝없이 사랑과 생명을 나누는 소통의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배웁니다.

마음이 맞아서, 성격이나 취향이, 고향이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의 방향이 같기에, 모두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기에

말 그대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동체의 중심이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삶이 온전한 성가정 공동체를 만들어 줍니다.

영원한 현재진행형 중에 성장, 성숙되어 하느님을 닮아가는 성가정 공동체요

이에 함께 바치는 공동기도는 절대적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성가정 공동체를 지향한다면 시

편성무일도와 미사라는 두 공동기도의 실천을 간곡히 권합니다.

 

둘째,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온실 같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유토피아 공동체는 없습니다.

고통이나 병이 어려움이 없어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 중에도 사랑이, 기쁨과 평화가 있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성가정 공동체나 우리 각자 공동체를 보십시오. 정말 답이 없어 보입니다.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은 얼마나 많은지요.

보십시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인도하는 성 요셉!

얼마나 위태하고 아슬아슬한지요.

이집트로 피신하는 과정이나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또 계속되는 삶의 여정에서 고통과 시련은 끝이 없음을 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시련과 고난의 여정 중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내적기쁨과 평화, 그리고 주님 안에서 단단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봄과 겨울이 모두 계절이듯, 살아가며 겪었던 고통과 고난 또한 나를 이루는 것이다.”<다산>

근심과 고난이 나를 살게 하고, 편안함과 즐거움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맹자>

 

시련과 고난을 겪어가며 내적 성장과 성숙이요, 깊이 익어가는 성화의 여정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셋째,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집착 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바로 무사하고 순수한 아가페 사랑이 답입니다.

2독서 콜로새서에서 바오로가 주님 사랑을 참 대변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늘 입고 살아야 할 <사랑의 옷>이요, 내 삶을 추슬러 묶어주어야 할 <사랑의 끈>입니다.

사랑의 의무와 책임은 전방위적으로 펼쳐집니다. 사랑은 구체적 실행의 동사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들볶아 기를 꺾지 마십시오.

자녀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집회서 저자는 노부모를 비롯한 노인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실천할 것을 명하십니다.

이 모든 부모의 사랑은 어린 자녀들은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노령화의 시대, 무수한 이웃 노인들을 대할 때 늘 염두에 둬야 할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고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을 때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지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평생과제가 사랑의 실천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필요로 하는 사랑의 눈길, 사랑의 손길, 사랑의 발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온갖 시련과 고난 중에도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로 성장, 성숙시켜 주십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즈카르야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 성가정의 모범으로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이 승화 시몬 신부

 

고해성사를 하면 가족에 대한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가족에 대한 미움이 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부모는 자녀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해 미안해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더 많은 사랑으로 따르지 못해서 미안해합니다.

특히 대림 시기에 이루어지는 판공성사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곤 합니다.

 

성가족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두 세례를 받았다고 거룩한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듯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가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이 것처럼

가족은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선물로 대할 때 이루어집니다.

내가 하느님과 함께 기도하며 거룩한 사람이 된 것처럼

가정의 중심이 하느님이 계실 때

거룩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깨닫고 응답하듯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사랑을 나누려 할 때

우리는 사랑으로 묶인 성가정이 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로서 아내와 아들을 위해 희생합니다.

자리를 잘 잡아 살던 터전을 내려놓고

이집트로 넘어가 험난한 생활을 버티어 내야 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가족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선택입니다.

 

마리아 역시 가족을 위해 자신을 내어줍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아들을 위해

머나먼 여정을 아무 말 없이 순종하며 따랐고

남편 요셉이 말을 따라 밤중에도 짐을 싸서 이집트로 떠납니다.

남편을 존중하고 아들을 보호하는 모습은

하느님의 향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모습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다시 돌아온 나자렛에서 자라나

하느님 구원 섭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렇게 성가정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작은 등불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오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대하며

대가 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내어주고

자녀는 부모에게 감사하며 효성을 배우고

하느님께 대한 참된 애정으로 부모를 공경할 수 있길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보다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6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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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5.12.28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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