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4일 토요일[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2사무 1,1-4.11-12.19.23-27
복 음 : 마르 3,20-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묵상
이 철구 요셉 신부
소문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듯,
소문이 퍼지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무슨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을까요?
예수님께 치유를 받고 위로받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냈을 리는 없습니다.
마귀 우두머리에게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킨다며 선동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병자를 치유한다며 평소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소문을 내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당시 지도자라는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바리사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소문은 예수님의 친척들이 듣기에 거북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나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이천 년 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쩌면 우리도 소문만을 믿어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편견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고집과 지나친 신념이 우리를 편견에 빠뜨립니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고 하고,
그 안에 있는 진실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편견에 갇혀 단죄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을 향할 때,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어떤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들은 제가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또 아무런 문제없이 신부가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많은 갈등으로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음이 미친 듯이 요동칠 때,
바다에 가서 하염없이 바다의 파도를 바라보곤 했었지요.
잠시도 쉬지 않고 몸부림치는 파도의 모습에,
저도 저렇게 몸부림쳐야 함을 깨닫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태풍이 온다고 하면, 피해를 줄이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합니다.
‘태풍은 왜 와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할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태풍은 필연적인 자연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풍으로 바다를 뒤집어 휘젓기에 생태계가 원만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청소도 하고, 순환도 되고, 이를 위해 커다란 바람이
바닷속 저 아래까지 힘을 미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태풍이 없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들 때, 몸부림쳐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움직임이 아닌, 실제 도움이 되는 움직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움직여야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편하고 쉬운 일상 안에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 주님을 만나고 진하게 체험했다는 분을 많이 보게 됩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상황인데도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음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몸부림치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을 따르려는 마음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편하고 쉬운 길이 행복의 길인 것처럼 보이고, 주님과 함께하고 그 뜻을 따르려는 것보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삶이 지혜로운 삶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길이 진짜 행복의 길이 아님을,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십니다.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마르 3,20)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정도로 커다란 열정으로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열정입니까? 예수님 자기를 위한 열정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열정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정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심지어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주어야 할 가족조차
방해하고 있음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라는 표현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미쳤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합니다.
가족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의 좁은 생각과 선입견으로, 하느님의 일을 미친 짓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그런 좁은 식견으로 하느님의 일을 잘못 판단하고,
세상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몸부림치며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만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 짧은 본문입니다.
첫 번째 절(20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들어가고 섞여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배추벌레가 배추를 먹으면서 배추 색깔로 변해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절(21절)에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여기에서 '붙잡다'(krateo)라는 말은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친척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러 나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들의 손에 쥐고 조정하고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가 당신을 꼭 붙들고 반박을 하자(마르 8,32 참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려고 붙잡는 이는,
그가 비록 제자라 하더라도, 혹은 친척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뿐,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께 붙들린 사람’,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앙드레 루프),
곧 우리가 하느님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제지하시도록 승복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제지는 우리의 굴복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붙드셨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매달려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 ‘붙들려서’ 사로잡혀 따라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사실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이
얼마나 다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뒤 구절에서 율법학자들과 사람들은
그분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마르 3,22),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마르 3,30)고 말합니다.
또 나중에, 사도 바오로도에게 총독 페스투스는
“바오로, 당신은 미쳤구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치고 말았군.”(사도 26,24)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런 맥락에서, 그분의 제자들도 ‘미친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치신 분’ 이십니다.
아버지께 사로잡힌, ‘아버지께 미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내가 배신하고 무관심할 때마저도,
언제나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진정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늘도 저를 미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아멘.
예수님 친척들의 몰이해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셨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우리는 흔히 가족이나 친지들이 나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오히려 가까운 이들로부터 오해와 거절을 경험할 때가 많다.
예수님께서도 “그분이 미쳤다.”(21절)는 말을 들으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조차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마르 6,1-6; 요한 7,5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사건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셨으나,
가까운 이들에게는 거절당하셨다. 이는 빛이 어둠에 비추었으나,
어둠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9)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하시지만, 오히려 친밀한 관계 속에서 더 깊은 오해와 거절을 당하신다.
이는 우리도 감수해야 할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교회는 다툼이 아니라 친교와 화해의 집”임을 강조한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을 탓하기보다는,
약한 이에게 힘이 되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
성 바오로 사도도
“너희는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어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라.”(갈라 6,2)고 말한다.
우리의 신앙은 나 혼자의 완전함에 있지 않고,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 주는 상호보완적 사랑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마태 5,44).
이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내 감정을 넘어 성령의 은총 안에서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존중하는 삶을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큰 승리는 원수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18,4)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장점을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심하거나 상처를 주기보다,
참을성과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친척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삶에서 오해와 거절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참된 제자의 길을 배운다.
하느님의 가족인 교회 안에서 서로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사랑과 이해로 가득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빛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제가 미국에 와서 자동차를 타면서 인상 깊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운전 보조 장치입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해 주는 기능,
차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기능은 장거리 운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운전 습관과 달라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고,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완전 자율 주행 자동차가 등장했습니다.
목적지를 입력하면 자동차는 운전자의 개입 없이 스스로 길을 찾고, 주차까지 마칩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이동에 관한 생각 자체를 바꾸는 변화입니다.
과거의 자동차가 엔진과 속도의 산업이었다면,
이제 자동차는 반도체와 인공지능, 데이터가 결합한 하나의 삶의 플랫폼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운전대를 놓는 순간,
이동 시간은 더 이상 소모의 시간이 아니라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출퇴근 시간은 사무실이 되고, 장거리 이동은 휴식과 성찰의 시간이 됩니다.
자동차는 제2의 거실이 되고, 제3의 사무실이 됩니다.
도시의 구조도 달라지고, 운전이 어려웠던 노약자와 장애인에게는
이동의 자유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기술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완전 자율 주행 자동차가 있어도 목적지를 입력하지 않으면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술은 길을 안내할 수 있지만,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그는 격렬한 논쟁과 갈등의 시대 속에서도
부드러움과 인내, 일상의 성화를 강조했던 목자였습니다.
그는 신앙이 특별한 사람들만의 영웅적인 선택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길을 선택하는 삶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교회 역시 언제나 새로운 길 위에 서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의 도로망을 이용해 복음을 전했고,
중세 교회는 인쇄술을 통해 말씀을 확산시켰으며,
오늘날 교회는 인터넷과 새로운 기술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기술을 피해 온 공동체가 아니라, 기술과 함께 복음을 전해 온 공동체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언제나 길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출애굽의 광야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길에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리고 오늘날 자율 주행 자동차 안에서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다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다시 ‘몸’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손을 내밀고, 눈을 마주치고, 함께 걷는 자리에서 신앙은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니라, 가장 사랑이 필요한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라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으셨고,
그 길 끝에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참된 자유, 참된 길이었습니다.
기술은 점점 더 완벽한 길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 길을 어떻게 걸을지는 여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기념일을 지내며, 부드럽고 단단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기술의 길 위에서도 주님의 뜻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사랑의 방향을 선택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길이 주님께로 향하게 하소서.”
저는 남아 있는 생애동안 화를 내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공개석상에서 저를 소개할 때가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소속 아무개입니다, 라고 소개하면, 즉시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살레시오회냐? 살레시오는 무슨 의미냐?
살레시오는 교회 역사 안에서 친절과 온유의 박사, 꿀처럼 달콤한 성인으로 유명한,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1567~1623)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또 질문을 던집니다.
아니 살레시오 창립자는 성 요한 보스코(돈보스코, 1815~1888)인데,
왜 수도회 이름이 살레시오회인가?
저희 사부이신 돈보스코는 위대한 청소년 구원 사업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타고난 성향으로는 도저히 자신의 계획을 달성할 수 없을 것임을 자각했습니다.
그래서 돈보스코 자신이 추구해야 할 사목자로서의 롤모델을 찾았는데,
그 이정표가 바로 당신보다 2세기를 앞서 사셨던 착한 목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였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사목을 위주로 하는 수도회를 창립하면서
수도회 명칭조차 살레시오회로 명명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돈보스코는 수많은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어쩔 수 없이 직면해야 하는 힘겨웠던 상황 앞에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도움과 전구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영웅적인 사랑과 온유와 인내의 덕행을
본받기 위해 불굴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돈보스코 역시 마흔이 넘고 회갑을 넘기면서,
더 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사람,
제2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개신교도들이 활개를 치던 샤블레 지방으로 선교를 떠납니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자 크게 분노를 합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싹 쓸어버릴까 고민도 했습니다.
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고, 연세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젊은 시절의 혈기로 저질렀던 과오를 크게 참회합니다.
동시에 열렬한 기도 생활과 더불어 비약적인 영적 성장을 이뤄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더 이상 사사로운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외풍에도 깊은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십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주교님께서 누가 봐도 불벼락을 내리고 분노해야 할 상황에 처했는데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주교님,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저는 지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럼 나보고 20년 동안 공들여 쌓은 탑을 허물라는 것입니까?
저는 남아 있는 생애 동안 화를 내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연세가 드신 분들, 앞으로 살아가실 결심을 세우시면서
주교님 선택을 고려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들이 제네바의 주교 시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샹딸 수녀를 음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틈만 나면 있지도 않은 추문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퍼트렸습니다.
그러나 주교님 그 어떤 법적 대처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기도만 하셨습니다.
엄청난 모욕 앞에서도 분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정심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장본인인 벨레라는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변호사님은 저를 음해해서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신다지요?
제가 그 일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으니 제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변호사님이 제 눈 하나를 멍들게 한다든지 뽑아 버린다 할지라도,
저는 나머지 한쪽 눈을 가지고 여전히 변호사님을 기쁘게 바라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시는데, 나는?
송 영진 모세 신부
1)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는 미쳤다.’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그분을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나섰다.”입니다.
‘미쳤다.’ 라는 말을, 20절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뒤의 22절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0절에 연결하면, “음식을 들 수조차 없는 생활”을 하시는,
즉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예수는 미쳤다.” 라고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으면서 일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쉬지 않고 일하셨다는 말에서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 없다. 안식일이라 해도...”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작업을 마치신 다음에는, 그 일에 대해서는 쉬셨지만,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일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하신다는 것이
구약시대 때부터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쉬지 않고 일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마르 6,31)
2) ‘예수님의 일’은, 사람들을(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나를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쓸데없는 일들과 허무한 일들 때문에 시간을(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바빠서 신앙생활을 할 여유가 없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일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가?
물론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이들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신앙생활보다 취미생활을 더 중시하면서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26-30.32)
3) ‘미쳤다.’를, 바로 뒤의 22절에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마르 3,22)
<‘미쳤다.’는, ‘마귀 들렸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이 “예수는 마귀 들렸다.” 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을, 또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오직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라고 믿는 것이 당연한데,
율법학자들은 그게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낸 논리가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는 ‘억지 논리’였고,
그 ‘억지 논리’를 바탕으로 해서 “예수는 마귀 들렸다.” 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4)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마귀들 편에 서 있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비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들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탄의 전술일지도 모릅니다.
사탄은 아마도, “내 편에 서지 않아도 된다. 예수 편에만 서지 마라.” 라고
인간들을 유혹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향해서 사탄의 종교라고 비방하는 자들도 그런 유혹에 넘어가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 편에 서게 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예수님의 교회가 하는 일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큰 죄입니다(마르 3,29).
‘몰랐다.’ 라는 변명은, 심판 때에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92,3)
오늘 복음은 매일미사 중 가장 짧습니다. 단 두절로 단숨에 읽혀집니다.
순서로 하면 예수님이 어제 열두 사도를 뽑으신 다음입니다.
얼마나 분주하게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주님이신지요!
전적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셨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고향과 친척, 직업을 저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신 덕분에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누가 정상인지 생각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교회공동체의 중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주위로 끊임없이 모여드는 사람들은 흡사 빛을 찾아 온 사람들 같습니다.
무지의 어둠속에 사는 사람들이 빛의 주님을 찾음은 본능적입니다.
친척들이 볼 때에 예수님의 활동은
분명 이해 불가능한 제정신이 아닌 미친 짓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문득 떠오른 제가 좋아하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마디입니다.
이 복음이 나올 때 마다 언급하는 말마디입니다.
한자의 뜻인즉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미쳐야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 같습니다.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는 꽤 많은 말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광기, 발광, 광분, 광신, 광인 등 모두 미칠 광(狂)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인간 현실이 미치는 것입니다.
이를 요약하여 제가 자주 쓰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다.”
저는 광야 인생을 세 종류로 분류하곤 합니다.
제대로 미친 성인과 잘못 세상 것들에 미쳐
중독된 폐인이나 괴물, 셋을 꼽습니다.
사실 세상을 살다보면 제대로 미친 성인보다는
잘못 미친 괴물이나 폐인이 많은 듯 합니다.
참으로 제대로 제정신의 온전한 사람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평생과정인지 깨닫게 됩니다.
문제는 제대로 미칠 때 온전한 사람이요 성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지극히 충실했던
하느님의 나라에 제대로 미쳤던 성인중의 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래서 참사람이자 참 하느님이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느님께 미쳐 무지의 불쌍한 이들을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먹이시며>
온전한 참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한 예수님의 평생 삶이셨습니다.
친척들과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 중에도 참사람들이 되게 하는
복음 선포에 항구할 수 있었음은 예수님의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었음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평생 기도처 <외딴곳>은 필수였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들이요 잘못 미쳐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이나 괴물이 되지 않고 제대로 미쳐 성인이 되는 것이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함이 유일한 길이겠습니다.
바로 이런 이의 모범이 예수님은 물론이요 그에 앞선 다윗입니다.
사울과의 그 치열한 싸움 중에도 다윗이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음도
그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지극히 충실한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사울과 요나단 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바치는
참사람 다윗의 애가이자 조사가 정말 감동적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사울과 요나탄을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요나탄이 살해되다니!
나의 형,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이런 지극한 슬픔을 통하여 다윗의 배움도 인생 공부도 더욱 깊어졌을 것이며
다윗이 참사람의 성군이 되는데 참 좋은 도움의 추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이 다윗과 요나탄의 우정이요,
다윗의 친구로서 또 사울의 아들이자 충신으로 장렬히 전사한 요나탄의 인품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제대로 미친 참사람 다윗 성인을 만나는 듯 합니다.
지금까지 생사가 오가는 사울과의 투쟁과 부자의 죽음 앞에
큰 슬픔을 겪으면서도 그가 참으로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에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불광불급,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합니다.
미쳐야 살 수 있는 사람이요,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나 괴물입니다.
광야 인생, 하느님 중심의 삶에 제대로 미쳐야 온전한 인생입니다.
그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사무엘 하권의 다윗이고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입니다.
성인은 1567년 8월21일 프랑스 사보이 공국에 태어나
후에 칼벵주의 개신교가 득세했던 제네바 주교로서
힘든 과업을 훌륭히 수행한 참 멋진 분이었습니다.
깊은 신앙심과 더불어 인문학 및 신학에 정통했으며,
온화하고 선량하며 인내심이 많고 점잖은 성품을 지녀
성별과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예의를 갖춤과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
그리고 곤경에 처한 여성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훗날 <신사 성인>이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성인은 1607년 성녀 잔 프랑수아즈 드 샹탈 수녀와 함께,
기존 수도회의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젊은 수녀들,
병약한 신체나 나이로 인해 수도회에서 거절당한 여성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과부들을 도와주는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도 설립합니다.
두 분의 영적우정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1622년 프랑스로 가는 도중 잠시 리옹에 있는
방문회 수녀원 정원사의 작고 허름한 방을 고집하여 머물렀고,
12월27일 뇌졸중 증세를 보였으며, 마지막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다! 예수님, 나의 하느님, 나의 모든 것!”
임종어를 남긴 후 12월28일 56세 나이로 선종합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더 7세에 의해 1661년 시복되고, 1665년 시성되며,
187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192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작가와 기자, 청각장애인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그의 수많은 저서중 평신도들과 일반 여성들을 위한 <신심 생활 입문>과
신비주의 작품인 <신애론>이 제일 유명합니다.
성인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성인의 어록도 성인의 이해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기장 보기 드문 영성”<앙리4세>
“사부아의 보석”<교황 바오로 6세>
“하느님의 사랑을 잘 아는 박사”<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위대한 스승”<교황 베네딕도 16세>
“그의 융통성과 선견지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교황 프란치스코>
성인의 어록입니다.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인내해야 합니다.”
“사랑의 척도는 자로 잴 수 없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애가 강하면 더욱 상처를 받습니다.”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지 말고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법을 배우십시오.”
“오락에 너무 빠지지 마십시오.”
“세상은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판단하므로, 우리가 그 비위를 맞추기는 불가능하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에 제대로 미친 분들이 참사람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도 바로 그러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를,
제대로 미친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으로, <성인다운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5). 아멘.
다윗과 사울을 통해서 배우는 것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살다 보면 그를 화나게 할 의도 없이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한 얘기인데
그 얘기를 듣고 다른 사람은 아무 반응이 없는데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화를 내고 상처받는 사람이 있고 말한 나는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를 때가 있지요.
그것은 그가 내가 한 말과 어떤 연관이 있기 때문이고,
뒤집어 얘기하면 어떤 식으로든 걸리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면 왜 반응하겠습니까?
내가 말한 것이 바로 그를 두고 한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거나
전에 받은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고 있는데
나의 말이나 행위가 그 덧나 있는 상처를 건드리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이 한 것으로 인해 원수지간이 될 수 있는데도,
사울은 다윗을 시기 질투하고 원수로 여기며 복수하려고 드는데도,
전혀 상처받지도 않고 원수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다윗은 어찌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오늘 어찌 오히려 슬퍼할 수 있는 겁니까?
근본적인 이유는 어제 말씀드렸듯이 사울은 다윗을 보고 있지만
다윗은 하느님께 치고 올라가 하느님으로부터 사울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서 서로 아웅다웅하는 세상을 보면 부질없어 보이듯
하늘에서 보면 아웅다웅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법이지요.
높이 나는 새가 산과 강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또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괜히 싸우지 않습니다.
이미 행복한데 괜히 싸울 이유가 없고
싸워서 자기 행복을 자기가 깰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누가 나에게 원수가 되는 것은 그가 한 일 때문에 내가 불행해지거나
사울에게 다윗처럼 그의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무슨 짓을 해도 하느님 때문에 자기는
너무 행복하기에 싸울 이유도 원수로 여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죽자 사자 덤비는 사울이 가련할 뿐이고,
그래서 오늘 허망하게 사울이 죽자 슬퍼합니다.
한 나라의 임금인 그가 채신머리도 없이 싸우자는 것이 가련했고,
하느님께 기름부음 받은 이가 그러다 죽은 것이 그렇게 슬펐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영적인 권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원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럴 수 있는 사람 곧
하느님으로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오늘 사울과 다윗을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이 승화 시몬 신부
좋은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좋지 않는 일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마음이
집착이나 통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습만을 바라다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멀어지게 느껴지며 아쉬워하고
다른 사람을 보고 시기 질투하게 됩니다.
결국 나라는 사람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상대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그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지지도 못합니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지만
그분을 보고 친척들은 미쳤다고 생각하여 잡으러 옵니다.
혹여나 자신들에게 피해가 올까봐 걱정을 하며
예수님이 하신 일이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 안에서만 갇혀 있었을 뿐입니다.
또 군중들은 모여들어 자신이 먼저 도움을 받으려 하니
예수님은 먹지도 마시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자신을 위해서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지만
덕분에 예수님은 활동 반경에 한계를 얻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일에 인간적 유혹이 찾아오면
좋은 의도는 사라지고 아픔만 남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 나아가기
바로 그러한 마음을 품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일을 먼저 하는
그리하여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함께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6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