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제1독서 : 2티모 4,1-8
복 음 : 마르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나열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언어는
따뜻하고 정겨운 교훈이 아니라 진실을 찾는 논쟁의 칼날이 되고,
그 칼날은 율법 학자들을 겨눕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길이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향한 우월과 교만의 무대가 됩니다.
‘기도’조차도 제 위신을 위하여 길게 늘어뜨린 장식으로 삼으며,
그리스 말 표현에 따르면 과부들의 ‘집마저 삼키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당시 관행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회적으로 취약한 과부들을 위한답시고
재산을 맡아 주면서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성전 제의를 위하여 봉헌하라고 권하면서 재산을 빼앗은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긴 기도는 제 이익을 위한 구실이며,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더욱 무겁게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 뒤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곧바로 장면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헌금함 맞은쪽에서 사람들이 돈을 넣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부자들의 많은 돈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가난한 과부가 가장 작은 동전 두 닢을 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액수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가 그 가치를 결정한다고요.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남는 것을 바쳤으나,
과부는 부족함 속에서 ‘자기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거대한 금과 은을 삼키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동전 두 닢으로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는가’, 또는 무엇을 ‘내맡기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가진 돈과 시간과 노력, 봉사를 바라는가.
아니면 그들의 온전한 삶이 하느님께 봉헌되기를 바라는가.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특히 강조하셨습니다.
그의 책 ‘어둔 밤’은 감각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한 젊은 가르멜 수도자가 말합니다.
“저의 십자고상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성물입니다.
이 십자고상을 바라볼 때마다 저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 말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은 이렇게 조언하셨습니다.
“십자고상에 그렇게 집착하고 있다면, 그 십자고상을 버리십시오.”
어두운 밤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요한 성인의 요구였습니다.
사실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진짜 많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집착도 큽니다.
자기 뜻과 맞지 않다면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 역시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날 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끊어야 할 집착은 무엇인지 묵상하십시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끊어야 할지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낮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많은 부자가 큰돈을 넣는데, 가난한 과부는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당시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작은 동전으로
그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할 만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사람들은 헌금함에 들어간 동전의 액수를 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주머니에 남아 있는 비율을 보신 것입니다.
즉, 부자들은 자기의 풍족한 재산 중 일부를 바칩니다.
과부의 헌금은 가장 작았지만, 궁핍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봉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원어인 그리스어 ‘생활비’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과부는 내일 당장 살아갈 기약조차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 전체를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온전히 내어 맡긴 것입니다.
모든 집착을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이기심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비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마음으로 헌신해야 밝혀주십니다.
이처럼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사실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동시에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순수한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일일지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 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는 지향이 깨끗해지게 하소서.
당신을 향한 마음이 갈림이 없이 오롯하게 하소서.
오로지 사랑하는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과부의 헌금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두 장면을 보여 준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위선적 율법 학자들을 책망하신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과 잔치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길 원했다.
겉으로는 경건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40절)라고 말씀하신다.
둘째, 그와 대조적으로 성전의 헌금 궤 앞에서 가난한 과부의 작은 봉헌을 칭찬하신다.
많은 이들이 큰돈을 넣었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인 렙톤 두 닢을 봉헌했다.
예수님은 그 봉헌이 가장 크다고 선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넣은 돈의 양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린 마음을 보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치는 것의 크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깊이를 보신다.”
참된 봉헌은 의무감이나 체면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전부의 내어줌이다.
이 과부의 봉헌은 예수님의 자기 봉헌을 예표 한다.
과부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오리게네스는
“이 과부 안에서 우리는 가난하였지만,
우리를 부유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본다.”라고 해석했다.
그녀의 작은 동전 두 닢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두 손과 두 발의 상처와도 같이,
사랑의 절정에서 드려진 봉헌의 표지다.
이 과부의 태도는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신앙은 보여 주기 위한 겉꾸밈이 아니다.
겉으로 경건한 모습에 머물고 이웃을 착취하는 율법 학자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경고가 된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우리가 드리는 기도·시간·정성·재물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이 없는 봉헌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드려지는 작은 봉헌은 하늘을 움직인다.”라고 했다.
우리가 바치는 것은 단순히 헌금이나 물질만이 아니다.
내 시간, 내 재능, 내 노고, 내 고통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얼마나 내어드렸는가?’이다.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내어놓았듯이, 우리도 자기 삶 전체를 하느님께 드릴 때,
그분의 은총은 충만히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봉헌의 모범이다.
그녀는 가진 것이 적었지만, 하느님께 전부를 내어놓았다.
이는 예수님이 당신을 완전히 봉헌하신 모습과 같다.
겉치레 신앙을 버리고, 사랑 안에서 내어놓는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전 존재를 봉헌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얼마 전 ‘기술 공화국’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투자자인
Peter Thiel의 생각도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업가를 넘어, 기술이 앞으로 인간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저서 Zero to One에서 “0에서 1로 나아가는 창조”를 강조하며,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발전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기술 공화국’입니다.
앞으로의 사회는 기술이 중심이 되어 재편될 것이고,
그 핵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공지능입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담당해 온 사무직과 지식 노동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휴머노이드입니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로봇들은
생산 현장에서 반복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에너지입니다.
이 모든 기술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결국 지능과 몸, 그리고 힘을 균형 있게 갖춘 나라가
새로운 문명을 선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한 가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중심에는 결국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술은 세상을 빠르게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을 살리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랑과 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의 시대를 살면서도,
더 깊은 인간성과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오스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파견된 후배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1년 전, 교구의 요청으로 그 본당의 상황을 살펴보고 보고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조심스럽게 판단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이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목을 시작하는 신부님을 만난다는 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세 가지 다짐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의 뜻’,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뜻’을 먼저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목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내 뜻’이 앞설 수 있는데,
시작하는 자리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먼저 고백하는 그 모습이
참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 신부님의 길 위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또한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다짐 속에서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사목이 아니라, 이어지는 사목, 다음을 준비하는 사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마음에서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책임을 나누는
그 자리에서 교회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신부님께 환영의 인사를 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신부님을 통해 이 공동체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 마음 안에도 작은 다짐이 생겼습니다.
필요할 때 함께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사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제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남았습니다.
‘잘 되겠구나.’ 하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시작하셨으니,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겠구나.’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 바오로의 권고와도 이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앙은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이렇게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을 알려 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작은 정성을 보십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을 보십니다.
세상은 기술 공화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와 에너지가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전혀 다른 원리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위선과 허영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작지만, 정성 어린 헌금을 사랑하십니다.
구원은 능력과 업적이 아니라, 정성과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이 믿음을 간직하며,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작은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송 영진 모세 신부
1)
여기서 ‘율법학자들에 관한 말씀’은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말씀’은 참된 신앙인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위선자들이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의 큰 문제점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는,
“너희는 율법학자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입니다.
율법학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나타나엘’처럼
‘진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요한 1,47).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는,
거룩한 사람인 척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이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긴다는 말씀은,
자기를 존경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마주치면
존경한다는 뜻으로 공손하게 인사했고,
회당 예배 때나 잔치 때에는 그들을 위해서 윗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 존경은, 진심으로 하는 존경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는 비웃으면서 겉으로만 하는 존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존경받는 것을 즐기는 쪽만 위선자였던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는 쪽도 위선자였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는,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흉내 낸 것,
또는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일 뿐입니다.
2)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탈출기에,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라는 율법이 있습니다(탈출 22,21).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3)
‘가난한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하느님을 사랑한 신앙인으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그 과부처럼 그렇게 하고 싶은데도
형편이 안 되어서 못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괜히 주눅 들기도 하고,
자기가 뭔가 많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말씀이,
그 과부를 본받으라는 뜻이긴 하지만,
누구다 다 전 재산을 바치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헌금(성금)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형편이 안 되어서 그 과부처럼 가진 것을 다 봉헌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가진 것을 다 봉헌한다고 해도,
칭찬받고 싶은 명예욕으로,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율법학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힘없는 과부들에게서
빼앗은 돈 가운데 일부를 봉헌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강도짓 같은 일로 빼앗은 돈을 봉헌한다면,
아무리 큰돈을 봉헌한다고 해도,
그것을 봉헌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감히 하느님을 자기들 범죄의 공범으로 만드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돈이든지 무슨 제물이든지 간에,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정말로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어야 합니다.(레위 22,17-25)
그 전에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봉헌하는 사람 자신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복음 선포자에게 필요한 세 가지!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첫 번째인 독서 티모테오 2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스승 바오로 사도께서 제자이자 동료 사목자인 티모테오에게
착한 목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근조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사제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은
사제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번째 의무요 과제인 복음 선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 복음 선포는 일생에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입니다.
사제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선포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하십시오.”
복음 선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건강이 허락해도,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 들어가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② 복음 선포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복은 선포 여정에 반대와 몰이해, 시련과 박해는 필수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덕이 끈기와 인내의 덕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면서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류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해야 합니다.
낙담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자극도 필요합니다.
③ 주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다시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높은 시련의 파도가 다가올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당당히 중심을 잡고,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단한 것이, 제자들이나 동료 사목자들에게
그럴듯한 훈시 말씀만 건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말하고 생각하고 선포한 것을 있는 그대로 당신이 사셨습니다.
말과 행동, 가르침과 구체적인 생활이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를 향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정신없이 달려온
복음 선포 여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이토록 당당하게.
이토록 자랑스럽게 자신의 지난 세월을 소개할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마치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밀도 높은 삶을 살았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는
단 하루, 단 한 순간도 주님 외에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생애가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생애였습니다.
오 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저마다 삶의 상황이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
율법 학자, 부자들,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고루 겪게 되는
삶의 기회들, 시기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 12,38).
문맥으로 보면 현재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사두가이들과 두루 마찰을 빚고 계시는 중인데,
오늘의 대목에서는 율법 학자들을 정면으로 비난하십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
예수님께서 단지 그들을 같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하자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는 지식과 권위를 소유한(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권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찾고 과부를 등쳐먹으며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태도는
오늘날 심심찮게 문제가 되고 있는 위선과 갑질의 전형이지요.
그들은 앎과 삶이 분리되어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빠진 우리의 단면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공동선을 위해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지식과 권위, 능력과 영향력을
제 명예와 영광을 위해 오용하고 남용하는,
어찌 보면 주님 눈에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지요.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마르 12,38).
그들은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꼭 재물만이 아니어도 탈렌트나 시간, 건강 등
우리 삶에 이런 풍요의 순간이나 기회가 없지 않지요.
그때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태도는
결코 작거나 하찮지 않습니다.
그런데 봉헌의 지향이 하느님의 더 큰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헌금함에 돈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찬사를 보내줄 사람들 때문인지,
사심 없는 감사의 표현인지에 대해서는 하느님만 아십니다.
중요한 건, 사람은 그 봉헌의 물리적 수량을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을, 지향의 순수성을 보신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톤 두 닢을 넣었다"(마르 12,42).
보호자 없는 과부는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아주 취약한 약자입니다.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하니
그녀는 생활 이전에 생계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살았을 겁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재산도 사람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이
철저한 고독으로 밀려났던 시기를 떠올려 줍니다.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고,
혹 지금 이 순간 그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인간은 실존적으로 이러한 가난의 체험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때 절망의 나락에서 추스르고 일어나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건 놀라운 결단입니다.
게다가 자기에게 남은 것을 있는 것 없는 것까지 박박 끌어 모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건 대단한 용기지요.
자신을 이런 바닥까지 몰아넣은(몰아넣었다고 여기는) 신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는 태도는 엄청난 신앙입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모습이지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실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가 바치는 건
그게 무엇이 얼마나 되었든 액수에 관계없이
렢톤 두 닢도 못 되는 가치니까요.
또 돈, 인맥, 제도 등으로 겹겹이 보호막을 치고 살아도
생로병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외에
인간에게 진정한 보호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단순한 의탁과 겸손한 봉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유언에 가까운 내용을 전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이미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린"(2티모 4,7) 선배로서 바오로가 충고합니다.
그는 기회가 늘 좋거나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압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2티모 4,5)라는 권고에는
사랑하는 제자이며 후배에게 갖는 짠하고 안쓰러운 심경까지 비칩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박해와 모욕과 죽음의 위협 속을 걸어가는 복음 선포자의 삶이
세상눈에는 그저 렙톤 두 닢 어치도 못 되는 가치일 수 있지만,
하느님 눈에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마르 12,43) 봉헌한 것이지요.
그 가치는 하느님과,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간 이들만이 압니다.
"이제 다 늙어 버린 이 몸을 버리지 마소서.
제 기운 다한 지금 저를 떠나지 마소서"(화답송).
시편 저자는 복음 속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담아,
아니, 저마다 가난하고 초라한 실존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담아 노래합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나약하고 가련한 실존을 지고 꿋꿋이 살아가는 길은
우리의 가난을 그 약함과 부족함, 죄악까지 주님 발 앞에 바치는 의탁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가난과 겸손으로, 온 세상,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부요하고 완전하신 성삼위 하느님을 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자가 아니어서, 가난해서 행복한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6월 성모 신심 미사>
유혹과 맞서는 자는 하느님을 품지 못한다.
전 삼용 요셉 신부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마태 2,14-15)
찬미 예수님!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6월의 성모 신심 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은 한 편의 숨 막히는 추격 영화 같습니다.
잔혹한 권력자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칼을 빼 들었고,
요셉과 마리아는 한밤중에 급히 짐을 싸서 낯선 땅 이집트로 도망을 칩니다.
겉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의 가족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피해 비겁하게 쫓겨 다니는 피난기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뼈아프고도 중대한 영적 질문을 던집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왜 천사 군대를 동원해 헤로데를 쳐부수지 않으시고,
굳이 성가정을 한밤중에 '도망치게' 만드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신비를 통해,
우리가 인생의 위기와 유혹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그 진짜 영적 생존법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품에 갓난아기를 소중히 안고 길을 가는 한 어머니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골목길에서 사나운 들개가 침을 흘리며 덤벼듭니다.
이때 어머니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어머니가 무술을 연마한 유단자이고 손에 몽둥이가 들려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가 저깟 개 한 마리 못 이길 줄 알아?" 하며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들개와 맞서 싸우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행여나 흙먼지가 튀어 아기의 눈에 들어가거나
짐승의 발톱에 아기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두려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기를 꽉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도망을 칩니다.
어머니가 도망치는 이유는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내 자존심이나 내 힘을 증명하는 것보다,
내 품에 안긴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품은 자는 결코 들개와 기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체면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 이것이 생명을 품은 자의 가장 위대한 본능입니다.
이 원리는 전 세계 국가 원수들을 보호하는
최정예 요원들의 '경호 프로토콜'과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VIP가 연단에서 연설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군중 속에서 암살자가 총을 꺼내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경호원들은 절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따지거나,
맞서 싸우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느라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경호원들의 제1수칙은 단 하나입니다.
위험이 감지되는 그 즉시, VIP의 머리를 강제로 누르고 몸을 둥글게 감싼 뒤,
어떤 질문이나 망설임도 없이 가장 가까운
안전 가옥(Bunker)을 향해 냅다 뛰어 도망치는 것입니다.
경호의 핵심은 적을 물리치는 멋진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생명'을 살려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체면을 차리거나 상황을 따지고 맞서 싸우려 들면 VIP는 목숨을 잃습니다.
(출처: 댄 에머리, 『시크릿 서비스: 대통령 경호의 세계』)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 보여준 행동이
바로 이 '어머니의 본능'이자 완벽한 '영적 경호 프로토콜'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하니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라고 경고했습니다.
보통의 자존심 강한 남자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니, 이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요?
하느님이 벼락을 내려 헤로데를 죽이시면 되지,
왜 비겁하게 한밤중에 도망을 가야 합니까?"라며 따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불평 한마디 없이 남편 요셉의 이끌림에 완벽하게 순종하며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존심이나 내 편안함이 아니라,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고귀한 '예수님의 생명'을 지켜내는 것임을 말입니다.
내가 우주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황의 비참함이나 도망치는 수치심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 안에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할 '아기 예수님',
즉 세례를 통해 잉태된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헤로데와 들개들,
즉 내 안의 교만과 분노, 돈을 향한 탐욕, 음란한 쾌락이라는 마귀는
틈만 나면 내 영혼의 아기를 물어뜯어 죽이려고 이빨을 드러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치명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바로 유혹의 들개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 이기겠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술자리나 쾌락의 유혹이 넘치는 장소에
굳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앙이 깊으니까 이 정도 유혹은 내 의지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나는 절대 취하지 않을 거야. 나는 흔들리지 않아."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영혼 안에 '하느님이 살아 숨 쉬고 계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자의 지독한 오만입니다.
만약 내 품에 갓난아기 예수님이 안겨 있다는 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어떻게 감히 그 위험한 유혹의 자리에 머물며 마귀와 주먹다짐을 하려 들겠습니까?
싸우는 동안 유혹의 흙먼지가 내 영혼의 아기에게 덮이고,
마귀의 발톱에 내 안의 은총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텐데 말입니다.
유혹과 맞서 싸우려 드는 자는,
아직 하느님을 온전히 품지 못한 가짜 신앙인일 뿐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하필 스스로는 걷지도 못하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어머니 품에 안겨 세상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완벽하게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스스로 고집을 꺾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해질 때까지,
우리 영혼 안에서 스스로 무력한 아기처럼 머물며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생명이 잉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의지로 이 유혹을 이길 수 있어!'라며
뻗대는 얄팍한 '교만의 화분'에 갇혀 있는 한,
주님은 내 안에서 영원히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무력한 아기로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혹의 들개 앞에서
나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고, 체면을 버리고 화장실로 숨거나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는 '겸손'을 선택할 때 어떻게 될까요?
내가 교만의 화분을 스스로 깨부수는 그 순간,
내 안의 아기 예수님은 비로소 우주를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본모습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유혹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작아졌을 때,
내 안의 주님은 가장 커지시어 세상의 그 어떤 마귀와 유혹도
단숨에 짓밟을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내 삶에 마음껏 펼쳐 보이십니다.
이렇게 이집트에서 생명을 지킨 성가정은, 헤로데가 죽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또 장애물이 생깁니다.
잔혹한 아르켈라오스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두려워합니다.
그때 천사가 다시 꿈에 나타나 방향을 틀어
갈릴래아 '나자렛'이라는 깡촌으로 우회하도록 내비게이션의 경로를 수정해 줍니다.
왜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멸시받던 나자렛 깡촌에 숨겨두셨을까요?
세상의 사나운 들개들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완벽한 '위장술(Camouflage)'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보물은 가장 허름한 상자에 숨겨야 도둑이 훔쳐 가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메시아를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보잘것없는 마을의 청년으로
30년 동안 완벽하게 숨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해도 유혹을 보면 도망쳐야 할까요?
당연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할머니가 장성한 아들과 길을 가다가 들개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들을 믿고 개와 싸워야 할까요?
무서워 도망을 치면 아들도 함께 올 것입니다.
만약 유혹이 나를 따라잡을 양이면 그때 아들이 돌아서서 개와 맞설 것입니다.
그러니 어쨌거나 죄에서 도망치십시오. 이것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밤 당장 짐을 싸서 도망치라 하시면 도망치고,
시골 구석에 숨어 있으라 하시면 기꺼이 머무르십시오.
그 철저한 도망과 침묵의 발걸음만이
내 품에 안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온전히 지켜내는 유일한 경호 수칙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처럼,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도망을 통해
내 안의 주님을 위대한 하느님으로 키워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이 승화 시몬 신부
우리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면서
일상을 거룩하게 만들어 갑니다.
이런 행위는 마치 집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늘 먹는 밥이기에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식사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파는 음식이 아무리 입을 즐겁게 해 주어도
사람들이 자주 찾게 만들기 위해서는 각종 조미료나 특정 맛을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건강은 조금씩 나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밥은 일상에서 접하는 집밥이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가르침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참행복으로 이끌어주는 진리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진리를 선포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모습보다
내가 실천하는 작은 행동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크고 의미 있음을 기억한다면
오늘 과부의 헌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과부처럼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사람이 아닌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