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7일 주일[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 신명 8,2-3.14ㄴ-16ㄱ
제2독서 : 1코린 10,16-17
복 음 : 요한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평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과 다투기까지 하였습니다(탈출 17,2; 민수 20,3 참조).
탈출기에 나타난 싸움의 말이 요한 복음서에서도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두고 서로 “말다툼”(요한 6,52)을 벌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닫힌 결과입니다.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스스로의 계산과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며, 하느님께 따지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저 상식과 관습을 깨뜨리는 사변적 언어 표현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에는
‘이 세상에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분의 찢긴 몸과 쏟아진 피를
내 생명의 뿌리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체성사를 암시하면서도 꼭 성체성사만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성체성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리이며,
삶이 그 믿음으로 다시 살아 꿈틀거리는 자리입니다.
내가, 우리가 그분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드러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 삶의 참된 음식이며 참된 음료입니다.
우리 삶과 생명을 이어 가게 하는 실제입니다.
그분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죽어 가는 우리의 자리,
우리의 공허와 상처와 좌절의 자리에 그분의 살과 피를 들여놓아,
그분의 생명이 우리 대신 살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분 없이 살아가지 못합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보통 ‘손님은 왕이다’라면서 고객 중심의 운영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매장의 점원들은 손님에게 도도하고 쌀쌀맞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히려 고객이 점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구하기 힘든 유명 가수 콘서트 티켓을 주고,
여기에 비행기표까지 얹어준다고 합니다. 말이 안 되죠?
실제로 있습니다. 에르메스 벌킨 백 판매장에서는 그렇다고 합니다.
이 가방의 가격은 수천만 원에 달하고, 돈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살 수 있는 가방도 아닙니다.
손에 넣으려면 보통 1년 이상 기다려야 하고,
그전에 에르메스의 다른 제품 여러 개를 사야하고, 점원에게도 잘 보여야 합니다.
이곳 점원의 불친절을 오히려 “역시 고급 매장은 달라.”라고 말합니다.
명품의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요?
제작비용은 그렇게 많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제품의 기능,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품위와 자존심이 아닐까요?
이런 명품보다 더 특별한 품위와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커다란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에 교회는 요한복음의 ‘생명의 빵’을 선포합니다.
이 부분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선포하시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면서 거센 반발을 보입니다.
율법에서는 동물의 피조차 마시는 것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하물며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단순히 비유이고 상징이라고 해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말씀하시지요.
반드시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보통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은 소화되어 나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양식인 성체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성체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안으로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체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특별합니다.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특별해졌습니다.
그 특별함을 담아 고귀함과 품위를 드러내는 명품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몸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곧 이어 우리는 곧 당신 몸과 피를 우리의 양식으로 내어준 그 크신 사랑을 먹을 것입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마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반복해 들려줍니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3)
이는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몸과 말씀으로
우리를 양육하고 계심을 알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도 형제들과도 한 몸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요!
이 얼마나 찬미하고 찬양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참으로 어마어마한 말마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단지 '내려온 빵'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줄 빵'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은 바로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 빵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 생명을 줄 빵은 그 빵이 되기에 앞서,
밀이 바수어져 물과 함께 반죽이 되듯,
그렇게 부서지고 쪼개지고 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빵'이 될 수 있고, '참된 양식, 참된 음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양식은 결코 우리가 획득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셔서 받은 것입니다.
은총입니다.
당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빵'과 '살'과 '생명'입니다.
이는 같은 지평에 자리 잡은 인간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주목할 수 있는 단어는
51절과 58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와 그 존재 양식이 가 닿을 수 없는 신적인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인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 존재와 존재 양식 모두를 신적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곧 ‘하늘의 몸’과 ‘땅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그 ‘몸’이 쪼개진 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당신의 신적 생명을 '먹고 마셔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세 가지로 알아들어 봅니다.
첫째는 당신께서 ‘생명의 밥이요, 양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둘째는 ‘예수님과의 사귐’을 말해줍니다.
이를 제2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고린 10,16)
셋째는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음’을 말해줍니다.
이를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이 모두는 ‘빵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고, 우리 안에 머물며,
한 몸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증여하십니다.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됩니다.
그리하여 갈라지고 패인 우리 가슴 골골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피, 구원과 생명의 피가 흐르게 된 것입니다.
이 놀랍고 크신 사랑에 우리의 가슴은 벅차오릅니다.
잠시 후면, 우리는 “아멘”이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몸’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몸’에서 친교와 사귐으로 사랑의 관계 맺음을 배워야 하고,
‘예수님의 피’에서 사랑의 유대와 일치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건네주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로
우리는 예수님이 지니셨던 그 사랑과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이웃과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살게 하소서.
아멘.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조 욱현 토마 신부
1. 성체의 신비: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는 백성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성체의 신앙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인 성체성사의 신비를
새롭게 깨닫고 그 생명 안에 살도록 부름을 받는 날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그들을 살린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라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의 배고픔을 채운 것은 만나였지만, 그 만나는 말씀의 표징이었다.
그 말씀은 하느님의 약속이었고, 그 약속은 하느님의 충실함 안에서 성취되었다.
이제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요한 1,14)
그리고 그분은 더 이상 하늘에서 떨어지는 음식이 아니라,
직접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셨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다.
2.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생명의 실재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1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계시의 핵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을 ‘아멘’이라 응답하며 받는다.
그러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은,
너희 자신이 그분이 되기 위함이다.”(Sermo 272 요약)
즉, 성체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이며, 그분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실제적 친교를 뜻한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는 교리 교육서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빵과 포도주가 단순한 상징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간구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너는 단순히 감각으로 보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여라.”(Catecheses Mystagogicae IV, 3–6)
3. 그리스도의 몸과 피: 완전한 자기 증여
유다인들은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라며 놀란다.
이는 인간의 이해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절)
이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신 사랑의 절정을 뜻한다.
유다 율법에서는 피가 생명이라고 하여(레위 17,11), 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피,
곧 생명 자체를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키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체성사는 십자가의 희생을 현재화(現在化)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전달하는 표징이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가장 완전한 길이다.”(Summa Theologiae III, q.73, a.3)
이 피는 용서의 피이며, 생명의 피다.
우리는 그분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 안에 머무르게 된다.
4. 성체의 생명: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1,54,58절)라고 강조하신다.
이는 단순한 내세적 약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부활 생명의 참여를 뜻한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실제로 참여하고,
그분의 사랑과 일치를 살아간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그분의 피와 살을 받아먹음으로써, 우리 육체도 부활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썩지 않는 생명을 우리 안에 심는 씨앗이다.”(Adversus Haereses, IV,18,5)
이처럼 성체는 우리 몸의 부활과
하느님의 생명에의 참여를 약속하는 구원의 성사다.
5. 성체와 교회의 일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성체성사는 단지 하느님과의 일치만이 아니라,
서로 간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의 원천이다.
성체는 교회를 하나로 만들고, 교회는 성체 안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교회는 성체로 산다: Ecclesia de Eucharistia”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성체성사는 교회를 세우며, 교회는 성체성사를 세운다.
교회가 성체를 거행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운 인류가 태어난다.”(21항)
그러므로 성체 안에서의 일치는 단순한 감정적 유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를 묶는 신적 일치의 실재다.
6. 성체의 목적: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도록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체의 신비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아멘’이라 대답한다. 그대의 ‘아멘’은
‘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응답이다.”(Sermo 272 의역)
성체성사는 우리를 단순히 은총 상태로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 안에서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는 성사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존재론적 목적이며, 신화(神化, theosis)의 길이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7. 결론: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이자, 교회의 생명 중심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형제들과 일치하며,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단순한 전례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하느님 현존의 신비다.
성체이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미사 때마다 이렇게 고백하자.
“주님, 제 안에 오시기를 원하시는 당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제 삶이 당신의 몸이 되어 세상에 당신을 전하게 하소서.”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지순례 중에 파티마에서 조금은 특별한 조각을 보았습니다.
광장의 한 모퉁이에 벤치가 있었고,
그 벤치에는 한 노숙자가 누워 있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낡은 담요를 덮고 있는 노숙자의 모습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발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어떤 교구에 설치하려 했을 때,
‘품위에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바티칸에 노숙자들을 위한 샤워실과 쉼터를 마련하고,
성탄과 부활에는 그들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에 따라 교회는 이 작품을 받아들였습니다.
교황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장식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외면했던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교회는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벤치 앞에 서서, 우리가 미사 안에서 모시는 성체가
바로 저 자리에 계시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도 이와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그 예수님을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 그것이 성체성사의 핵심입니다.
성체는 단순히 받아 모시는 신심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열어 주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성체성사의 정신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꽃동네입니다.
꽃동네는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세상에서 버려진 이들, 의지할 곳 없는 이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함께 살아가며, 그들의 존엄을 지켜 줍니다.
꽃동네의 봉사자들은 단순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신앙이 성당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꽃동네의 사랑은
한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꽃동네는 멕시코와 필리핀, 아이티와 페루와 같은 지역에도 공동체를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음식이 부족한 곳에서는 함께 밥을 나누고,
병든 이들이 많은 곳에서는 그들을 돌보며,
외로운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가족이 되어 줍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그들이 나누는 사랑은 하나입니다.
성체성사에서 비롯된 사랑이 국경을 넘어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빵을 나누듯이, 그들도 한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만나의 의미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다시 먹이심으로써 참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은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자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며 기도했고, 그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고,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빵을 나누며 우리는 하나의 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양식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그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모신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파티마의 벤치에 누워 계신 예수님,
꽃동네의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가장 작은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체를 제대로 모신 신앙인이 됩니다.
성체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모신 생명의 빵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여,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먹는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중요한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먹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성체성사에도 적용됩니다.
성체를 받아먹는 일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그 일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을 수 없습니다.
물론 성체를 받아먹는 행위는 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는
성체가 아닙니다.
좋은 예가 배반자 유다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다음에(루카 22,14-20),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22,21).
루카복음을 기준으로 하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뒤에(루카 22,3-6),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고, 성체를 받아먹고 나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겟세마니로 가기 전에
먼저 떠나간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이미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그에게 성체를 주셨을까?
<요한복음에는 성체성사 제정 이야기가 없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이미 배반한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그의 발을 씻어 주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답은, “유다도 사랑했기 때문에”,
또 “유다가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입니다.
어떻든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유다는 회개하기를 거부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성체를 주신 일도,
그의 발을 씻어 주신 일도
모두 다 그 자신이 스스로 헛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는
더 이상 성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성체 쪽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먹는 사람 쪽의 문제,
즉 자신에게 주어지는 생명력을 스스로 차단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는 성체 모독의 위험성 때문에
비신자들의 영성체가 금지되어 있는데,
신자라고 해도 마음과 믿음이 이미 예수님을 떠났으면서도
안 그런 척 하면서 영성체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2)
“나를 먹는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먹는다.’라는 말은,
‘믿는다.’를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는
“나를 먹는다.”를 더욱 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단순히 상징적인 말로만 그치지 않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실제 일’로 이루어지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또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요한 6,60),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듣기 거북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누가 들어도
듣기가 거북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나타내는 말이고,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당신과 완전한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거북한 말은 아닙니다.
엄마의 태중에 있는 태아는 엄마의 생명력을 받아먹는데,
사실상 엄마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의 젖을 받아먹는 갓난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엄마는 아기에게 자기 자신을 먹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엄마들처럼
당신 자신을 먹이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먹는’ 성사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생산되는 온갖 곡식과 채소와 과일 등을 먹는 것은,
땅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이고, 땅을 먹는 일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먹는 일은 다 그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먹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는 생명력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살아가고,
그 힘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을 제대로 받아먹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능동적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을 힘도 없고,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체가 신앙의 본질이 되게 하려면
전 삼용 요셉 신부
찬미 예수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무서운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가톨릭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뼈아픈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성체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생명이 없다"라고
목숨을 걸고 말씀하셨는데, 수많은 신앙인에게 성체성사는
그저 미사 중간에 치르는 하나의 거룩한 예식,
혹은 내 신앙생활을 치장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성체를 안 모신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이 죽을 것처럼 애통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도대체 왜 성체성사의 의미가 이토록 축소되고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왜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영적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치명적인 영적 질병의 원인을 파헤치고,
성체가 어떻게 우리를 완벽한 행복으로 이끄는지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1940년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 르네 스피츠(Rene Spitz) 박사는
당시 고아원과 보육원에 수용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생존과 발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시설의 환경은 위생적으로 완벽했습니다.
아기들에게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칼로리와 영양소가 완벽하게 계산된
최고급 우유와 이유식이 공급되었습니다.
병균이 옮을까 봐 간호사들은 아기들을 안아주지 않고,
요람 옆에 우유병을 고정해두어 아기들이 스스로 빨아먹게 했습니다.
육체적인 생존에 필요한 '양식'은 100퍼센트 완벽하게 제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완벽한 양식을 먹고 자란 아기들의 무려 37퍼센트가
2년 안에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살아남은 아기들조차 신체 발달과 지능이 심각하게 지연되었고,
허공을 보며 무의미한 몸짓만 반복하는 정서적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학계는 이 병을 '호스피탈리즘(Hospitalism, 시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원인을 찾기 위해 또 다른 집단을 관찰했습니다.
바로 여성 교도소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는 아기들이었습니다.
환경은 고아원보다 훨씬 비위생적이었고, 영양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아기들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튼튼하고 명랑하게 자라났습니다.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고아원의 아기들은 차가운 유리병에서 '음식(칼로리)'만 먹었지만,
교도소의 아기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며 양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실험은 인류에게 아주 명확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주는 양식은 단순한 영양분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진짜 이유는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닙니다.
그 젖을 통해 엄마의 따뜻한 품을 느끼고,
'엄마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관계'를 확인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입으로 들어오는 칼로리가 아니라,
나를 품어주는 거대한 사랑과의 '연결(머무름)'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중학생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해서 매일 저녁 정성껏 따뜻한 밥상을 차립니다.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은 아들이 밥을 먹으며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엄마와 눈을 맞추며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가 내일 사주기로 약속한
'최신형 스마트폰' 생각뿐입니다.
아들은 식탁에 앉자마자 스마트폰 모델을 검색하며 밥을 마시듯 욱여넣습니다.
엄마가 "밥 맛있니?" 하고 물어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마음은 온통 대리점에 가 있습니다. 밥투정까지 부립니다.
이 아들에게 엄마가 차려준 정성스러운 밥상이 무슨 생명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밥은 그저 스마트폰을 얻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통과 의례요,
엄마의 식탁은 지루한 대기실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양식은 의미를 상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민낯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시면서도,
정작 예수님이라는 분 자체를 사랑하고 그분과 머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주님이 주실 수 있는 '스마트폰',
즉 내 사업의 성공, 내 자녀의 명문대 합격, 아프지 않고 오래 사는 건강,
벼락부자가 되는 로또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세상에서 얻어낼 세속적인 축복이
더 우선순위가 되었을 때, 성체성사는 자연스럽게 귀찮은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빵을 주시는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내 탐욕의 배를 채워줄 기적만을 구걸하니
우리 영혼이 시설에 수용된 고아들처럼 영적 아사(餓死)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주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에만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영혼의 본질적인 정체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출발합니다.
거리를 떠도는 고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아는 늘 불안합니다.
오늘 밤에 잘 곳이 있을지, 내일 먹을 빵이 있을지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아의 본능은 항상 주변의 것을 '긁어모으고 소유하는 것'을 향합니다.
내가 많이 가져야만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상속자,
곧 '하느님의 친자녀'라는 정체성을 완벽하게 깨달은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 아버지가 우주의 주인이신데, 내가 내일 먹을 빵 걱정을 하겠습니까?
하느님이 내 아버지임을 진짜로 믿는다면,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얄팍한 돈이나 성공, 타인의 평가에 목매달지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스마트폰(세상의 욕망)에만 집착하며
성체성사를 무시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요
'또 다른 그리스도'라는 이 압도적인 정체성을 아직 믿지 못하고,
여전히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의 고아'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하는
모든 은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시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그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돌봄을 받는
'선택된 자녀'임을 증명하는 거룩한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엄마의 젖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민수기 1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끔찍한 불평을 쏟아냅니다.
"아, 고기 좀 먹어 보았으면!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지금 우리 눈에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기운이 다 빠져버렸구나."(민수 11,4-6 참조).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만나)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영혼은 여전히 '이집트의 노예'라는 비참한 정체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거부하니,
하느님이 주신 거룩한 양식이 입에 맞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의 양식인 만나를 버리고, 노예 시절에 채찍을 맞으며 주워 먹던
파와 마늘(세상의 자극적인 욕망)을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결국 그 영적 이식증에 걸린 자들은 약속의 땅에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모래 무덤 속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민수기 11장)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욕망을 끊어내고,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완벽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해답이 바로 '올바른 성체성사'입니다.
올바른 성체성사를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인가?’를 해결하기 위해 다가가야 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머물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체가 좋다면, 성체조배는 더 좋습니다.
하느님 자녀 됨의 마음을 더 오래, 깊이 간직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복음 강해』에서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빵을 먹는 자는,
빵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먹는 것입니다.
빵을 주신 분을 영혼의 안방에 모시지 않고 빵의 단맛만 빨아먹고 도망치는 자는,
결코 생명의 식탁에 영원히 앉을 수 없습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오 상선 바오로 신부
사람은 모름지기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신 이유를 군더더기 없이 밝혀 줍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대개 입을 통해 섭취된 음식은 몸에 흡수되어 그 사람의 피와 살이 됩니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사람 몸의 구성 성분과 건강 상태, 에너지가 달라지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매일 조금씩 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도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방식, 기꺼이 먹히는 방식을 택하신 것은,
그분이 우리와 길이길이, 영원히 함께하고 싶으셔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언가를 섭취해 영양분을 취해야만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 육체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니까요.
"그 축복의 잔은(빵은) 그리스도의 피(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분 몸과 피에 동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참은 그저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넘어서는 일치를 의미합니다.
서로 섞이고 융화되어 하나가 되지요.
이 관계성에 이르면 이제는 다시 둘로 각각을 갈라낼 수 없습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1코린 10,17).
동참은 주님과 우리의 일치뿐 아니라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모든 이의 일치를 지향합니다.
각자 저마다 모신 예수님의 몸이 하나이니
우리 모두는 공통분모를 품게 되고 서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세대를 이어, 역사를 관통해 하나 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성체와 성혈로 이루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성체성사의 본질이 "기억"임을 모세의 목소리를 빌어 강조합니다.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신명 8,2).
기억은 당시의 놀라움과 감사와 경외심이 영혼과 마음에 각인된 상태입니다.
그에게 구원은 과거 어느 때 발생했던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매순간 자신에게 재현되는 사랑의 흔적입니다.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신명 8,14).
사랑의 기억은 그것을 망각하지 않는 동안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사랑이 미약해서가 아니라, 망각과 동시에 우리 자신이 무심해져 버리기 때문이지요.
놀라움과 감사와 경외심이 사라진 영혼에게 사랑의 기억은 각자의 역사 안에서,
그 흔한 광고 전단지만도 못한 책갈피처럼 바래어 갈 뿐입니다.
인류를 위해 당신 몸을 죄인들처럼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도
우리 각자가 사무치게 체험하고 전율한 만큼,
기억하고 간직하며 그리워한 만큼 삶의 기적이 되고 영향력이 되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이 거룩한 축제를 지내며 주님께서 나에게 이루신
구체적 사랑의 자취를 기억하고 놀라고 감사하고 경외하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지극한 사랑의 선물인 성체와 성혈을 통해
주님과 서로에게 머물러 그분과 하나 되고 일치를 이루는 기쁨도 누리시길 빕니다.
아울러 주님과의 일치가 모든 형제자매들과의 일치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반 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옆에 계신 분에게도 '사랑합니다'. 하고 인사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7).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알기를 원하십니까?
예, 원하신다면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사랑에 눈뜰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나머지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셨고 그 외아들을
우리 모두의 죄의 사함과 구원을 위하여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외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본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시면서 이를 버리시고,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당신 스스로 죄인의 벗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당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 주셨습니다.
오늘복음을 보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 51).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57).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먹을 음식으로까지 남김없이 주시는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 안에서 사랑을 일깨우고 성체를 영함으로써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공산정권에 의해 1975년 투옥되어 1988년 석방되신
베트남의 구엔반 투안 주교님(2002년74세운명)께서는
13년간의 감옥살이 그중에서도 9년이라는 긴 세월을 독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아무것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면회를 온 신자에게 "위장약으로 쓸 포도주"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신자는 금방 알아채고 "위장약"이라고 쓴 꼬리표와 함께 포도주를 작은 병에 담아줬고,
습기를 피하도록 손전등에 "제병"을 숨겨 보내줬습니다.
그 후 주교님은
"남몰래 손바닥에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하셨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이것이 저의 제대였고 주교좌성당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말했듯이
“이것이 불사불멸의 약이었고 죽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해독제였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 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 잔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축성말씀을 암송하며 제 피에 섞인 그분의 피를 통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과 저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미사는 삶의 모두였고 주님과의 하나 됨을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영세한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반모임 미사참례를 하셨는데 영성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혹 잘못한 것이 있으시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잔칫집에 오셨으면 기쁘게 음식을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성체를 단순히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설사 큰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손길로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부속가를 보면 선인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 달라 삶과 죽음 갈라진다.(17)
악인 죽고 선인 사니, 함께 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18)
천상의 빵 길손음식, 자녀들의 참된 음식, 개에게는 주지 마라.(21) 하며
합당한 준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불사불멸의 약이요, 해독제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밀가루입니다.
그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잖아요? "
부디 성체성사를 통하여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영혼을 풍요롭게 하시고 위로와 힘을 얻고 마침내 구원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성인들은 말합니다.
“성체를 단순한 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그분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으로 확신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맛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사랑의 신비’를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성 치릴로). 그리고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잠시 동안 당신이 받아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따라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깊은 믿음을 가지고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27-29).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접목할 때 두 나무가 비슷할수록 접목이 더 잘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유사성을 회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아시죠? 고해성사입니다.
하느님은 용서에 더디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게으를 뿐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범하더라도 그분은 여전이 나는 그분의 사랑받는 최고의 존재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감곡성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12월 초에 50여명의 봉성체자들에게 봉성체를 해드리고
성탄 직전에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다시 환자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준비한 쿠키와 양말을 전해드리고 일어서려 하는데
할아버지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대축일에 가장 중요하고 귀한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축일에 성체를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영성체를 원합니다."
저는 정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는
보좌신부님을 통해 성체를 모셔드렸습니다.
성체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크고, 귀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남상국 방지거 할아버지셨는데
위암으로 고통을 받고 침대에 누워 거동도 쉽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성경필사를 한 번 마치시고
틈틈이 성경을 부여잡고 필사를 계속하셨습니다.
고통 중에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셨습니다.
신약성경야고보서까지 다시 쓰고 계셨는데
작은 아들이 가슴에 상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당을 향해서는 오줌도 안 놓겠다고 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뒤 방지거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그날 강론에 할아버지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얘길 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펑펑 눈물을 흘리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리 눈물이 많은지 몰랐다고.
얼마 전에 보니까 구역장을 하더라고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성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방지거할아버지의 믿음이 아들에게도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9개월의 감옥살이 동안
“가장 큰 고통은 미사를 드릴 수 없고,
성체를 모실 수 없는 것이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동료들에게
“‘내가 더 이상 미사를 거행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거든,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시오.”하고 미사의 중요성을 말하였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난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생명의 빵을 먹는 영성체의 기쁨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을 부러워하겠지요?
그리고 눈물로써 그분의 발을 씻겨드렸던 죄 많은 여인과,
그분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시중을 들었던 갈릴래아 여인들,
그분과 친밀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사도들과 제자들,
그분의 입술로부터 솟아나오는 은총과 구원의 말씀들을
들을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사람들을 부러워하겠지요?
제대 가까이 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영성체로써 그분을 느낄 수 있으며,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분을 여러분 안에 모시고 다닐 수 있습니다.
퀴즈.
최초의 감실은? 성모님!
최초의 성체거동은?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길!
예, 오늘 성체를 모신 우리는 이동감실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이 성체거동이길 희망합니다. 매일은 미사의 연장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2독서에서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라고 했듯이
사랑으로 서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사랑의 도구로 나를 뽑아 세웠다는 것을 일깨우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이 승화 시몬 신부
그리스도교는 초기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황제를 신으로 보지 않는 문제뿐만 아니라
미사 거행에 있어서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표현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금지한 인육을 먹는 문화로 오해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신분 제도에 대한 공격처럼 느껴지는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지만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체와 성혈을 모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체를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혈은 당연히 예수님의 피이죠.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한 빵과 포도주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탈출을 기억하며
파스카 예식을 거행할 때의 모습을 재현하는 듯합니다.
급하게 탈출하였기에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고
맏배를 죽이는 천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로 바른 행위가 떠오르게 됩니다.
상징적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급하게 챙겨간 먹거리이지만
동시에 다른 미신과 우상을 멀리하는 순수한 하느님 신앙을 말하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하느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즉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게 하면서
동시에 생명의 빵으로 오시여 우리와 하나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눈 앞에 빵은 빵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이는 예수님의 몸이고 그 몸을 먹는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됩니다.
주님과 하나 되는 놀라운 신비는
주님을 모시는 다른 이들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연결되며
천상에서의 친교가 지상에서도 이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피는 단순히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을 할 때 피를 뿌릅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하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깨닫게 합니다.
또한 계약을 어길 때 우리는 죽게 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주님의 희생을 말해주고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돌보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 미사를 통해 성체을 모실 때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친교를 느끼게 됩니다.
성혈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느님의 돌보심과 구원의 계획을 기억합니다.
눈 안에 있는 빵과 포도주를 넘어
참된 예수님의 몸이며 피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를 깨달은 이들은 미사를 통해 성인들의 통공을 체험하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머물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놀라운 신비를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합니다.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성체를 모신 후에는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과 대화를 하길 바랍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함을 기억하며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맞이하고
그 사랑을 자주 접하고 살아가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