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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8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6.06.08|조회수42 목록 댓글 1

202668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1독서 : 1열왕 17,1-6

복 음 : 마태 5,1-12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는 군중과 제자 모두를 향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시작하고 또한 끝맺습니다(마태 4,25; 7,28-29 참조).

산상 설교는 특정 민족이나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보편적 가르침입니다.

먹고사는 문제, 울고 웃는 문제,

그리하여 이 삶을 그토록 모질게도 살아 내야 하는 까닭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 선언은 현재 상태를 미화하거나 치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함, 슬픔, 무력함, 굶주림이라는 인간의 낮은 자리를 들추어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5,3)

하느님 나라를 억지로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부족함을 견디며

하느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가난은 유다의 쿰란 공동체가 말하던 영 안에서 낮아진 이들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들은 유배의 고통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 내며, 자신의 힘없음이

오히려 하느님을 향한 기회이자 초대가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행복 선언이 그리는 현실의 슬픔(5,4 참조)

역사 속 이스라엘이 겪은 상실과 폐허가 된 시온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이 선언은 현실이 팍팍하여

가난과 힘겨움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합니다.

힘이 없기에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약하고 부드럽기에 온유합니다(5,5 참조).

의로움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5,6 참조)

단순한 윤리적 욕망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정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삶을(5,7-9 참조)

꿋꿋이 살아 내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박해받는 이들에게(5,10 참조) 약속된 하늘 나라는,

세상이 짓밟은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뒤집어 주실 새로운 질서가 됩니다.

그 질서가 가리키는 행복은 현실의 찬란한 성공이 아니라,

상처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조용한 회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기어이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어이를 붙들고 살아 내는 신앙인입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아이가 콧물을 흘립니다.

이를 보고 드물게 나타나는 희귀한 선천적 결함을 의심할까요?

아니면 일반적인 감기의 증상으로 생각할까요?

이런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두통이 있습니다. 이때 뇌종양과 같은 심각한 질환의 신호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피로 등의 단순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까요?

만약 콧물이나 두통을 가지고 심각한 병으로 의심하고 있다면

아마 주변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몇 년 전에, 우리 교구에서 병원에도 암을 감별하는

펫시티(PET CT)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홍보했습니다.

미리 모든 암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교구 신부들이 정기 건강검진을 받으며, 이 펫시티 검사를 했습니다.

나에게 암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발견되신 분은 없었습니다.

 

불필요한 가정을 통해서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문제와 맞닥뜨리는데,

그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며 산다면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생각들로 할 수 있는 것도 못하는

어리석음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십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으로부터 옛 율법(십계명)을 받았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규칙과 금지 조항을 넘어선

사랑과 은총의 새로운 율법을 산 위에서 직접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옛 율법은 무엇을 하지 마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은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전혀 다른 행복이었습니다.

세상은 부유함, 웃음, 권력, 인정받는 것 등을 행복이라 부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난, 슬픔, 온유, 박해받음을 행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나의 외부적 조건이나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눈에는 결핍과 고통으로 보이는 상황조차도,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은 옛 율법으로 인해 힘든 상태였습니다.

지켜야 할 세부 조항으로 인해 늘 걱정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율법 조항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만 생각했습니다.

이 모두를 지킬 수 없기에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특히 사랑의 관계 안에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세상 것에 대한 걱정보다

하느님께 집중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은 '참 행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곧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먼저,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대체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행복하여라”(μακαριοι)는 용어는

성경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행복을 말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강조를 둡니다.

 

특히 이 용어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선언됩니다.

(1,1; 2,12; 119,1-2; 128,1-2; 루카 1,42-45; 11,27-28; 마태 16,17).

 

또한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

어떤 특정 상황이나 특정 태도가 지니는 가치 기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영적 가난, 슬픔,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의로움 등

인간적 특정한 상황에서의 특정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결국 참 행복복음적 인간’, ‘복된 인간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우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한 마디로,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4,10) 하셨으니,

회개한 이들이야말로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는 부유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는 부유하게 된 이들입니다.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가슴이 찔린 까닭입니다.

 

이들은 온유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들입니다.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들인 까닭입니다.

 

이들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이들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은 까닭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깨끗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입니다.

당신 손이 이끄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된 까닭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에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질 줄을 알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질 줄을 알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을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주님 면전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참 행복'을 따라 사는 이들이 참으로 복된 이들이요, 참 제자들일 것입니다.

아멘.

 

 

 

 

 

 

 

참 행복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우리는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교부들은 이 장면을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과 연결해 이해했다.

모세가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을 받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새 율법,

곧 사랑과 은총의 법을 선포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완성하러 오셨다.

산 위에서 선포된 참 행복은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주는 헌법이다.”

 

참 행복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자체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참 행복은 예수님의 얼굴을 묘사하며, 동시에 그분의 제자들의 삶을 드러낸다.”(1717)

다시 말해, 참 행복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닮아가는 길이자,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모습(창세 1,27)을 회복해 나가는 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산상설교에서 참 행복이 서로 단계를 이루며,

그리스도인을 성숙으로 인도한다고 설명한다.

가난함은 출발이고, 마음의 깨끗함은 정점이며, 하느님을 뵙는 지복은 완성이다.”

 

세상은 부유함, 권력, 성공을 복이라 하지만,

주님은 그 반대의 사람들이 복되다 하신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드러내는 선언이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부자는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불행하고,

가난한 이는 하느님만을 희망으로 삼을 때 복되다.”

이처럼 참 행복은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다.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자유롭고,

온유한 이는 폭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에 자신을 맡기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

 

참 행복은 결국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가난한 이: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비우신 주님,

슬퍼하는 이: 인류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신 주님,

온유한 이: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에게조차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 주님,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

: 아버지 뜻에 충실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말한다.

 

참 행복은 결국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초대이다.

닛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참 행복을 사는 이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새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참된 행복이다.”

참 행복예수님의 얼굴이자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교부들의 해석처럼,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하나 계단처럼 오르며

하느님과의 친교에 나아가야 하겠다.

오늘 우리 각자가 세상의 행복이 아닌,

주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행복을 선택하는 은총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모처럼 교구 사제들이 함께했습니다.

80년대에 신학교를 다녔던 선후배 사제들입니다.

오스틴으로 새로 온 신부님을 환영하는 자리였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주 볼 수 없었지만, 미국에 와서는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만큼 미국 생활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하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의지가 됩니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그 자리에는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신부님,

7개월이 지난 신부님, 그리고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이 함께했습니다.

저는 어느덧 8년이 넘었습니다.

한 달이 갓 지난 신부님은 아직 모든 것이 낯설고 바쁜 시간입니다.

그래도 먼저 그 길을 걸어간 동료 사제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7개월이 지난 신부님은 이제 막 하늘을 나는 새처럼 의욕이 넘칩니다.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은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처럼 여유가 있고,

말과 표정에서 감사가 느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제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에게 생긴 작은 원칙은 오늘 하루입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드리면 그것이 쌓여 과거가 되고,

늘 하루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모여 미래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행복 선언’, 또는 진복팔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은 성공하고, 많이 가지고, 인정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행복은 소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의 행복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욕심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행복은 눈에 보이는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진복팔단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길입니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성적이 올라 부모님께 칭찬받았을 때,

뜻밖의 도움으로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서류가 순조롭게 준비되어 영주권이 나왔을 때,

기도의 응답으로 아픈 교우가 치유되었을 때,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의 순간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마치 도파민이 매 순간 계속 생성된다면 오히려 몸에 해가 되는 것처럼,

기쁨도 늘 같은 강도로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순간의 행복이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에 감사했다면, 아픔의 시간에도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릴 때뿐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참된 행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상황을 바꾸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의 평화를 심어 줍니다.

 

저는 행복은 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길이 생깁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이웃과 함께 걸어갈 때

그 자리에 행복의 길이 생깁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로 살 수 있다면,

기쁨의 순간에도, 고난의 순간에도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이 말씀은 결과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초대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감사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복의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 말씀이 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이 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기를 바란다면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기쁨, 평화, 안식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약속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실현되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중에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행복하게 될 테니,

가난해도 참고 살아라.”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가난에 굴복하지도 말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가난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여라.”입니다.

 

가난에 굴복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등지고 돈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가난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가난을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한상태로 오해한다는 뜻입니다.

 

가난은 우리가 힘을 합쳐서 극복해야 할 고통입니다.

누구에게나 가난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난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다가

결국 중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황에 공동체가 무관심하다면,

그 무관심은 큰 죄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일은,

대부분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사도 4,34).

 

이 말은,

남들보다 더궁핍한 사람도 없었고,

남들보다 더부유한 사람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도 없었다.’ 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먹을 때 함께 먹고 굶을 때 함께 굶는다면,

모두가 똑같이 그렇게 한다면, 가난함이 고통이 되지 않고,

그런 공동체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금방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행복하여라.”행복하기를(구원받기를) 바란다면으로 읽으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하늘나라만 추구하여라.”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이 가르침은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이 말씀에서 부자,

하느님은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마태 6,24).

부자가 되기만을 바라는 사람도 포함됩니다(1티모 6,9).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3)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이들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분이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나라는 아무나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참 행복 선언말씀은

그 자격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 됩니다.

 

지금 현세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해서,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은 생각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잊은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자격을 얻을 수 없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이 가르침은,

지금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만 원짜리의 행복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나이를 조금 먹어가면서 행복에 대한 기준이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벌고, 더 인기를 얻고, 더 대박을 내고...

그러면 더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바도 참 많습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재산과 부동산을 보유하게 된 거부들,

행복할 줄 알았는데, 반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산 상속 때문에 벌어지는 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광경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 병고에 시달리게 되니,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쓰고 싶어도 걸어 다니지를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하늘 높이 금자탑을 쌓았지만,

결국 열심히 죽 쒀서 개 주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재산이 행복 불행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참 행복은 소소한 일상 안에 담겨있음을 자주 체험합니다.

저 같은 경우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그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든 뭔가에 열심히 몰입할 때입니다.

몰입의 대상이 좀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보다 복음적이고 생산적일 때, 느끼는 기쁨은 더욱 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

참된 행복, 진복팔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한 대목 한 대목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 같이 작고, 보잘것없고, 상처투성이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는 말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

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사는 게 너무 바빠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파 눈이 핑핑 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 원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

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참 행복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들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나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문제의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 반석위에 인생 집을 지어야합니다.

바로 오늘 산상설교의 첫 부분 참 행복이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성인이,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삶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길 잃은 AI 문명 시대에 궁극의 답은 산상설교의 참 행복뿐입니다.

레오14세 교황은 6/6-6/12일까지 스페인 사목 방문 여정중입니다.

스페인 젊은이들을 향한 첫날 강론 일부를 나눕니다.

 

참으로 사람이 되라(Be truly human). 외형보다는 살과 피의 사람이 되라.

그분은 이 현대 세계에 복음의 선교사들이 되도록 모든 젊은이들을 부르신다.

가톨릭의 믿음은 애덕에 의해 완성되는 삶임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다른 무엇보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이 덕이다.

여러분은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사랑을 통해서 그것을 하라(Do it through love).”

 

문제의 답은 하느님이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 없이, 사랑 없이 인간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어제 신심 깊은 자매와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수도원 뜨락에 철지난 제비꽃이 혼자 외롭게 있어 제가 사진 찍었습니다.

신부님 예쁜 시 하나 지어 주세요.”

문득 예전 <제비꽃>이란 시가 있어 지체 없이 나눴습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제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산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 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진리는 시공을 초월합니다.

25년 전 여기서의 자작시가 여전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요 사랑입니다.

생명의 하느님이자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참사람 성인을 상징하는 제비꽃입니다.

오늘 산상설교의 참행복은

그리스도교를 넘어 온 인류에게 주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인도의 성자 간디, 불가의 성철 대선사 등

모든 영성가들이 열광하며 사랑했던 진복팔단의 참 행복입니다.

 

탈출기의 모세의 십계명을 능가하는 새 모세 예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 진복팔단의 참 행복입니다.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평생 과제는 이 참 행복뿐입니다.

십계명의 준수로는 착한 신자. 좋은 신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성인은 되기 힘듭니다.

하느님을, 하느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참 행복의 문이자 길입니다.

잘 깊이 들여다보면 참 행복의 중심에 예수님이 자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참 행복의 실천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하느님을 닮게 되고,

참으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살 때

저절로 참 행복한 사람이겠습니다.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이 참 놀랍고 고맙습니다.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는

참사람 참행복의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거울처럼 내 성덕을 비춰주는 진복팔단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인류가 생존하는 한 영원한 빛을 발하는,

결코 AI가 줄 수 없는 진복팔단의 참 행복입니다.

평생과제로 평생 묵상하고 공부하며 수행할 덕목입니다.

참으로 자발적 기쁨으로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보람과 가치가 있는 참 행복의 수행입니다.

바로 이들의 배경이, 버팀목이 되어 주시는 분,

이들의 결핍을 채워 주시는 분,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으로 충족되며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때

저절로 자발적 기쁨과 감사 중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수행자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끊임없는 도전 의식을 일깨우며

분투의 노력을 다 하게하는 진복팔단의 참 행복이요,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한 참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하늘에서는 물론 이에 앞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어지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요 평화요 행복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행복의 사람들은 지금부터 이렇게 하늘 나라를 삽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열왕기 상권의 주인공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이미 그 옛날에 하느님 중심의 참행복을 살았던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였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바알을 섬긴 아합과 이스라엘에 기근의 심판을 예고한 엘리야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이들 무지한 백성이 하느님을 떠나

바알 이방 우상을 섬김으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약속의 땅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이 가뭄으로 목마르고 굶주리는 동안

참 행복의 사람 엘리야는 별세계에서 하느님의 보호와 섬김을 받으며 독야청청합니다.

마지막 대목의 묘사가 지극히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사막의 오아시스의 구원을, 지상 천국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참 행복의 가난과 정의를 살았던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구원하시어 행복하게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멀리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주님 계신 꽃자리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함으로,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때 실현되는 하늘나라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행복을 실천함으로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화, 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보라, 너를 지키시는 주님,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시편121,4). 아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 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 안에서의 행복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우리를 불쌍히 여겨도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돈이나 지위가 생활에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내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런 모습은 독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왕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덕분에 그는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 머물며

까마귀가 날라주는 빵과 고기로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왕실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음식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하였기에

그는 기꺼이 이를 수용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참행복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말하는 것은

자칫 우리를 교만하게 하거나 허영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절제를 통해 내가 필요한 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나눔의 기쁨으로 이웃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위로를 받으며 하느님과 함께 충만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행복의 묘미입니다.

박해를 받는 아픔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기에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 안에서 참행복을 맛보았기에

그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절제하며 자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안에서 참행복을 누리며

하느님과 함께 행복을 전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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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08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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