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제1독서 : 1열왕 17,7-16
복 음 : 마태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으로 인간의 부족함을 드러내신 뒤,
곧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을 한 번에 규정하십니다.
신앙인은 가난해도, 부족해도 이미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고 “세상의 빛”(5,14)입니다.
이 말씀은 격려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선언입니다.
소금과 빛은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이를 향합니다.
소금은 녹아 사라지며 맛을 내고, 빛은 어둠을 밝혀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소금은 고대 세계에서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정화하고, 보존하며, 제물과 함께 바쳐졌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소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움’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제자들이 행복 선언에서 드러난 삶의 방식,
곧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소금이지만 소금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쓸모없음은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자기 본성과 정체성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는 행위는 제 맛을 잃은 소금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5,16)를 찬양하게 하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서 6장이 말하는
위선적인 드러냄(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등경 위의 빛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끝내 숨겨지지 않아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으니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무엇을 위한 마음’을 지녀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자연스러운 오늘의 ‘나로서’ 살아갑시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표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영주에게 얽매여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고,
둘째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 지금까지 진 빚을 탕감해 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슬람교도의 땅과 재물을 약탈해서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터운 신앙심 때문에 전쟁에 참전한 것 같지만,
위의 세 가지 불순한 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 4차에 걸쳐 전쟁했지만, 제1차 십자군 전쟁만 성공이라고 부를 만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라는 슬로건을 걸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내용의 전쟁에 절대 함께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 중입니다.
전쟁할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폭력보다 평화를 원하십니다.
힘으로 누르는 폭력보다 사랑으로 함께하는 모범적인 우리가 되길 원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마태 5,13)
순수한 소금 자체는 짠맛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사해 주변에서 구하던 소금은 불순물이 많이 섞인 암염입니다.
습지에 노출되어 소금기가 다 빠져나가면 짠맛 없는
하얀 가루만 남게 되어 길가에 버려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동화되어 복음의 가치(짠맛)를 상실하면,
존재 이유를 잃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마태 5,14)
신앙인은 세상 위로 높이 드러나 길을 잃은 이들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거룩한 모범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판을 치는 세상, 그래서 폭력까지도 합리화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는 분명해집니다.
신앙인의 삶은 세상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처럼 세상에 유익을 주고,
최종적으로 그 모든 선함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사명을 밝히십니다.
곧 우리의 신원과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 말씀은 쌍날칼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찌릅니다.
곧 내가 하는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할까?
혹 욕하지는 않을까?
내 행동이 진정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가?
아니면, 내 자신을 향하여 있는가?
내 행실은 사람들 앞을 비추고 있는 빛인가?
아니면, 뒤에서 궁시렁 대며 불평하는 어둠인가?
그런데 대체 왜 우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인 까닭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하신 그 사랑 때문이요,
이미 우리가 그 사랑을 먹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행하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그리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소금처럼 녹아들고’ ‘불처럼 태우되’
그것을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신원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마태 5,13-14)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원이 ‘세상을 향하여’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세상’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비추는 빛이요,
‘세상 안에서’ 녹는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 안에서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와 불의를 막고 하늘의 맛을 내는 ‘소금’이요,
자신을 ‘태워’
‘세상’을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는 다른 삶’, 세상에 살되 세속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彼岸)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비추는 이들이요,
단지 어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막아내고,
빛을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의 사명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이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빛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로서,
빛이신 분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사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Lumen Gentium)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야 할 일입니다.
아멘.
세상의 소금과 빛
조 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존재 의미를 밝히신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사명과 정체성을 발견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소금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다.
이는 부패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지켜내고,
진리의 맛을 더하는 역할을 가르치신 것이다.”
소금은 썩음을 방지하고, 맛을 더하며, 정결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교회 전통은 이 점에서 소금을 지혜와 순수의 상징으로 이해해 왔다.
세례 때 소금은 신앙의 지혜를 상징한다.
만약 신앙인이 그 ‘맛’을 잃는다면, 단순히 쓸모없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세상에 전해질 생명의 맛도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빛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양이시고, 우리는 달이다.
달이 스스로 빛나지 않고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것이다.”
즉, 신앙인의 빛은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라.”(16절)라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 앞에서 스스로 드러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선행을 통해 드러나도록 하라는 초대이다.
교부들은 “등불을 등경 위에 놓는다.”(15절)라는 비유를 교회와 연결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등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등경은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말씀은 모든 이에게 빛을 주며,
세상 속에서도 어둠을 몰아낸다.”(Commentarium in Matthaeum 10,11 요약)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 한가운데서 말씀의 빛을 가리는 함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이 드러남으로써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착한 행실을 통해 사람들이 너희를 칭찬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참된 선행이다.”(Sermo 54,2 요약)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충실히 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하느님께 향하게 된다.
우리는 소금처럼 세상에서 부패를 막고, 맛을 더하며, 순수하게 살아야 한다.
또한, 빛처럼 어둠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광채를 비추며,
우리의 선행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이제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우리가 다시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실을 통하여
오직 하느님만이 찬양받으시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명칭(名稱)’과 호칭(互稱)‘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명칭은 주체가 ‘나’입니다.
나의 노력과 나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초등학생 때 ‘반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내가 반장이 되려는 이유를 발표하고, 친구들이 투표해서 반장으로 선출되면
그때부터 선생님도 친구들도 ‘반장’이라고 부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저는 신용 협동조합 ‘업무 이사’를 했습니다.
명칭은 업무 이사이지만 하는 일은 신학교 매점의 ‘사장’이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서품 받은 후에 저의 명칭은 ‘보좌 신부’였습니다.
교우들은 저를 보좌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작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8년의 보좌 신부 기간을 지낸 후에 교구는 저를 본당 신부로 임명했습니다.
그 뒤로 저의 명칭은 주임 신부,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있을 때는 ‘교육 담당 신부’라고 불렸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가 교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을 때는 ‘성소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미주가톨릭 평화 신문에서 일할 때는 ‘사장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호칭은 나의 행실과 행동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때로는 나의 외모와 말투를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신학생 때 친구들은 저를 ‘조자룡’이라고 불렀습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은 싸움에 능했고,
관우와 장비처럼 도원결의했던 동지는 아니었지만,
제갈공명과 더불어 유비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는 판매부 사장도 하였고, 타종 반에서 삼종기도를 치기도 했고,
연극반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이런 외적인 활동을 보면서 친구들이 그런 호칭으로 저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직책이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동과 행실이 국민의 뜻을 저버린다면,
그 행동과 삶이 독선과 독재의 길을 걷는다면
국민은 그런 대통령에 대한 호칭을 부정적으로 만들어서 부르곤 합니다.
그런 대통령을 ‘광인(狂人)’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도 부하직원들은 상급자의 행동과 행실에 따라서
그에 걸맞은 호칭으로 부르곤 합니다.
‘천사, 멋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악마, 욕심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호칭’에 대해서 궁금해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하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왔다.’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는 옳게 대답하였다. 내가 너를 반석이라고 부르겠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호칭을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음식의 맛을 살립니다.
빛은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힙니다.
소금과 빛은 겉으로 드러나는 명칭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우리의 희생과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송 영진 모세 신부
1)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
(2)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따로 떼어서 구분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면,
그 삶이 곧 신앙의 증언이 되고 복음 선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신앙인 자신이 먼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 선포와 신앙의 증언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나 혼자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 잘해서
구원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자기 혼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관심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등불로 모든 사람을 비추라는 예수님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신앙인은 동방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별처럼(마태 2,9)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이 말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다.’는 신앙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3)
13절의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는
‘탈렌트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8-30)
여기서 ‘쓸모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도,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밖에 버려진다.’ 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 멸망한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은
그냥 쓸모없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다시 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인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그래서 이 말씀은,
“계속 그렇게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씀일 뿐이고,
구원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제 맛을 잃은 소금’에서 ‘본래의 맛을 찾은 소금’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4)
‘쓸모없다.’ 라는 말을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신앙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신앙인답게 살면서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즉 신앙인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쓸모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만히 저를 돌아보니
제가 좀 싱거운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에 진실성이 없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실없는 말,
애매한 말을 남발해서 주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주 다짐을 합니다.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좀 진중해지자고. 비록 우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음식 속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 음식을 맛깔지게 만드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자고.
맛에는 참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매운맛, 신맛, 단맛, 쓴맛... 다양한 맛이 우리 미각을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맛의 배경이 되며,
다양한 맛을 조화시키고 어우르는 재료는 아무래도 소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때로 보관이 잘못되거나, 지나치게 오래 방치해 놓으면,
소금 고유의 짠맛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짠맛이 사라진 소금, 그거 어디에 쓰겠습니까?
눈이 내린 후 얼어붙은 빙판길에 뿌리면 도움이 되려나요?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쓸모없는 존재,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공공단체,
도무지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는 모임,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며,
자기들끼리만 희희낙락하는 공동체...
바로 예수님께서 강력히 경고하시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모습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몇 가지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새삼 소금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물 조절을 실패한 나머지 물에 퉁퉁 불어터진 밋밋하고 심심한 라면 먹는 것은 고문입니다.
간 조절이 안된 매운탕, 소금 없이 먹는 삶은 계란...
참 고역입니다. 어떻게든 소금 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대단한 것 같고 요란스럽지만 실속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뭐든 다 합니다만, 결실이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주는 것이라곤 씁쓸함이요 쓴 맛입니다.
요란한 괭가리에 불과한 삶입니다.
그러나 소금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야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이란 것이 영광스러운가? 부담스러운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내게 영광스러운가? 부담스러운가? 생각하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2-30대 때는 마땅히 그런 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후에도 ‘염광교회’니 ‘염광고등학교’니
개신교 신자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그들도 그렇게 하는데
우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고 갈수록 나 같은 죄인이 어찌 감히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겠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어둠이 되지 않고 악 표양이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이고 태도인데 그러나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라 얼치기 겸손이거나 거짓 겸손입니다.
그 부담스러운 걸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겸손이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는
우리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주님 말씀하셨는데
죄인인 우리가 감히 주님처럼 세상의 빛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아담처럼 감히 주님과 같아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자 당신 신성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만 때문이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빛과 소금의 사명에 참여해야 하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맘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의 선을 나누는 선행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며
나의 선을 나누거나 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실천이 그리 어렵지도 않고 실천도 가능합니다.
요즘 저는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최정숙 선생님의 전기도 읽고 답사도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자기를 위해서 착하게 살고 옳게 살고 사랑으로 일생을 사신 분인데
그렇게 사시니 그것이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었던 것이었고,
또 독립지사가 되고 의사도 되고 교육자도 되고 교육감도 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분이 나를 위해 하느님 자녀와 프란치스칸으로 산다고 생각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면
위선자가 되거나 너무 부담스럽고 힘이 들어 결국 포기해 버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되고 묻게 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길 포기하고 편하게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어렵고 힘들어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저는 당연히 답을 알고 있고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알기에 오히려 묻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안다면 그렇게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묻지도 생각지도 않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입니다.
자신이 이미 빛과 소금인 줄 모른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
전쟁이 끝난 1945년 독일,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직 건축가였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마을을 보며 그는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보수도 없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혼자였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웃 열 명이 함께했습니다.
반년이 지나자 마을 전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남자의 행동은
역사가들이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된 정신의 뿌리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에, 모두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 음식에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이 아닌 선언으로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례로 이미 그 본성을 받은 우리에게, 이제 그것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내가 빛이고 소금인 줄 모르면 내가 빛나야 하고 맛을 내야 하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호주 근처 태평양 한가운데, 서울 용산구만 한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이 있습니다.
1970년대, 섬 전체를 뒤덮은 인광석 덕분에
나우루는 갑자기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소득이 만 달러일 때, 나우루는 3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병원비·교육비 무료, 세금 없음, 신혼부부에게 집 무상 제공,
매년 생활비 지급.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기름이 떨어지면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샀고,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어 종업원이 짐을 실어주길 기다렸습니다.
공무원도, 노동자도 전부 외국인이었습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인광석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항구를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농사짓는 법을 아는 사람도, 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땅은 채굴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나우루는 호주의 원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에서 치유하신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군대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를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님은 허락하셨고, 돼지 떼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마귀를 받아들인 돼지는 스스로 빛이 될 수도, 소금이 될 수도 없습니다.
무언가 그 안에 들어가 그 존재를 만듭니다.
우리 안엔 무엇이 들어오셨을까요?
빛과 소금 자체이신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만 믿으면 그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우루의 이야기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빛과 소금인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요?
2022년 5월 10일, 미국 플로리다주 롤린스 칼리지 졸업식장이었습니다.
한 졸업생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5분 30초 동안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 전원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봉커.
자폐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15개월까지 재잘재잘 말을 하던 아이였지만,
불과 일주일 사이에 모든 언어 능력을 잃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혼자 분노를 삼켰습니다.
여섯 살 때 타이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표현한 단어는 'AGONY', 괴롭다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지 묻자 그녀는 적었습니다.
"NOT TALKING."
그 침묵 속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0 만점에 4.0, 완벽한 학점으로 졸업했고, 타이핑으로 음성변환을 해 연설했습니다.
그 연설의 끝은 이렇습니다.
"전 세계 언어 장애 자폐인이 3,1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소리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빛이 됩시다. '빛이 있으라!'"
하느님은 이미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내가 빛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엔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자기 삶 전체를 내어 3,100만 명에게 소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누군가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용기를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누가 있습니까?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자녀를 이미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할 자격이 있는 존재로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믿게 되면 이러한 사람이 탄생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과 소금이기를 거부하면 바로 버려져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삶은 나우루가 증명했습니다.
반면 생명을 주는 삶은 엘리자베스가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살겠습니까?
빛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 빛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맛을 더하는 소금의 역할이 무엇일까만 찾으면 됩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 하지 말고 ‘내가 빛인데 어떻게 빛나야 하나?’,
‘내가 소금인데, 어디서 녹아야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되었으니 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증명할까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물론 하느님께도 쓸모 있는 존재로 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 승화 시몬 신부
선함은 또 다른 선함으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의 작은 자선은
상대의 마음에 사랑의 동심원을 만들고
그 사랑은 퍼져나가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의 온기를 전해줍니다.
물론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뿐인 사람이 아니라
실로 절실한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은
그 사람이 희망을 붙잡도록 도와주는 끈이 되어 줍니다.
또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났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경험을 통해
타인을 도와줄 수 있는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행을 베풀 때 생기는 놀라운 일이죠.
바로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늘의 태양이 아닌 작은 등불이 되어
사람들에게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밝혀준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계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줍니다.
그러니 포기하거나 의미 없다고 치부하기보다
작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작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변을 밝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