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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6.06.10|조회수26 목록 댓글 1

20266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1독서 : 1열왕 18,20-39

복 음 : 마태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기존 율법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을 이루려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본디 의미를 끝까지 찾아, 목적지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은 참된 의미를 밝힌다는 뜻으로,

율법을 철저히 따르거나 빈틈없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가 뜻하고 의도하는 바를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율법의 규범과 실천은 늘 그대로 이어 오지만,

더 이상 형식적으로 되풀이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율법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참조).

그러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5,18)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율법들처럼 율법의 어떤 규정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져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처럼 어떤 규정들은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됨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유연성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든 지키든,

누구나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5,19 참조).

율법은 단죄의 도구가 아니라 하늘 나라로 초대하고자 하는

하느님 자비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삶의 질서이며,

그 질서는 예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논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어기는 이에게도

율법의 이름으로 사랑과 연민과 자비를 전하였으면 합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언젠가 아주 난처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

잠시 쪼그려 앉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았다가

일어나는 순간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터진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바지가 터졌다고 이제 쓸모가 없다며 벗어 던지고 팬티만 입고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터진 부분을 가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옷핀을 사다가 터진 부분을 메웠습니다.

이제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이 바지를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실과 바늘로 터진 부분을 꿰맸습니다.

 

우리는 자기 것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고쳐 쓰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고가의 만년필이 있습니다. 이 만년필이 어느 날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고장 났다고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어떻게든 고치려고 온 힘을 기울였고, 현재 잘 고쳐서 잘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어떻게든 고쳐서 잘 쓰기 위함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구원의 길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완성한다의 그리스어는 원래 빈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듯

가득 채우다’, ‘목표에 도달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그릇을 깨뜨리러(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그릇에 본래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던 진정한 의미를

가득 채우려 오셨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문자적이고 외면적인 규정 준수에 얽매여 있는 율법을,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율법을 원래의 목적대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큰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큰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이 노력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맨 먼저 하신 일은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고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시선에는 안식일 법을 어기는 일에 해당했습니다.

 

그리고 구마를 하시면서 정결례 법을 어기시고, 또 단식법을 어기셨고,

뿐만 아니라 율법을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셨고,

죄를 용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겉으로는 율법의 파괴자처럼 비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문자적이고 형식적으로 지켜지던 율법을

본래의 정신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율법을 먼저’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키는것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타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율법을 존중한다는 차원을 넘어,

그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당신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충만히 드러내셨음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율법은 은총의 도래를 예고하고, 은총은 율법을 완성한다.

율법은 마치 교사처럼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참된 의미를 얻게 된다.”(Contra Faustum, 19,7 요약)

, 율법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한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따라오신 이들을 은총 안에서 충만히 채워 주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작은 계명조차 소홀히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석하면서,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은 큰 것에서도 충실하다.

그러나 작은 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큰 계명도 가볍게 여길 위험이 있다.”(Hom. in Matth. 16 요약)라고 경고한다.

작은 계명 안에도 하늘 나라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 역시 이와 일치한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해방시키셨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은 계명을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사랑 안에서 계명을 지켜야 한다.”(40, 42항 참조)

 

율법은 억압을 위한 족쇄가 아니라,

사랑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외적 준수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내적 정신, 곧 사랑과 자비를 살아내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작은 계명 안에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작은 친절, 작은 희생, 작은 순종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성 베네딕토 규칙서의 첫머리에서 말하듯,

작은 시작이라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점차 완전함에 이른다.”(Prol. RB 요약)

우리는 작은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작은 계명도 하느님 나라를 담고 있기에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다.

교부들은 작은 것의 충실함이 큰 것의 충실로 이어진다고 가르쳤다.

교회의 가르침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경제 이론 중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다 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한 지혜입니다.

한곳에 모든 것을 투자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큰 손실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산 투자를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은행에서도 고객의 투자 성향을 묻습니다.

공격적인 투자도 있고, 안정적인 투자도 있습니다.

저는 비교적 안정적인 투자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분산할 수 없습니다.

내비게이션도 목적지를 하나 정해야 길을 안내합니다.

목적지를 여러 곳으로 설정하면 결국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조금, 세상도 조금 붙잡으려 하면

결국 어느 쪽으로도 제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한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오직 하느님께 두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 넘었고,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숫자로 보면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하늘에서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양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의 차이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오랜 시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힘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근의 미국과 이란 사이의 충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군사력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다시 협상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잠시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완전한 평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긴장과 불안 속에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힘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평화는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신뢰와 명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중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본당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 수가 많고 시설이 좋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공동체도 있습니다.

미국 본당에 세 들어 살아가며

많은 제약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작은 공동체일수록

서로를 더 잘 알고,

더 깊이 나누고,

더 따뜻하게 함께합니다.

장례가 나면 모두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나눕니다.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는 숫자와 시설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도 세상의 성공이나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갈라놓는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투자는 분산하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있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개인의 삶도, 공동체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모을 때 비로소 참된 평화가 시작됩니다.

 

엘리야처럼 혼자 남은 것 같아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참된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의 방향을 다시 정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랑입니다.

흩어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직 주님을 향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전쟁과 갈등 속에 있는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율법

 

송 영진 모세 신부

 

1)

여기서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

완성하려고(또는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이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서 완성되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망치고 있다고 오해했고,

유대교 중심의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오해했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는 말씀에는,

유대교를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철저하고 엄격하게 율법을 지킨 것은,

겉으로만 철저한 것, 위선이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위선이 유대교를 망친 주원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철저하셨던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이 성전 정화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사제들에게는,

파스카 축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대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를 잘 지내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또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제사용품들을 판매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위선이 파스카 축제를 망치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에게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거나 그저 몇 마디 말로 비판하는 것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충 적당히 넘어가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에서 보여주신 그 열정과 철저함과

단호함은 파스카 축제 실행과 하느님의 뜻 실천을 완성시키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위선자들은 눈에 보이는 십일조는 잘 냈습니다.

그러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위선자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큰 것과 작은 것을 나누고,

작은 것은 무시하면서 안 지킵니다.

 

19절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이고,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명들과 율법들 가운데 하나라도

자기 마음대로 작은 것이라고 분류해서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1.22)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7-28)

 

율법주의자들은(위선자들은) 외적인 율법 준수만 강조하다가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자들이고, 하느님 없이 율법만 지키다가

하느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해서 율법 실천의 완성에,

즉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구원의 완성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생명의 빛입니다.(요한 12,46)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의 하느님께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작은 사람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귀여겨들으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엄청나고 대단한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여기심을 잘 드러내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세상 사람들 시선에 작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사람들,

어린이들, 장애인들, 환자들, 노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사람들 눈에 별것 아닌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직무들, 일상의 작은 봉사, 설거지,

쓰레기 분리수거, 배수로 청소, 담당 구역 청소... 등등을

별것 아닌 일, 보잘것없는 일로 여기고 적당 적당히 넘겨버리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살아보니 확실히 느끼겠습니다.

이 세상에 큰 일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소중합니다.

작은 일이 모여서 큰일을 이룹니다.

큰일은 작은 일들이 모여야 가능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 큰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대통령이나 대도시 시장, 교구장이나 관구장이 해내는 일들을

홀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들은 큰 틀만 짜고, 방향한 제시합니다.

지지하고 격려하고 고무만 할 뿐입니다.

 

실제적인 일은 작은 사람들이 해냅니다.

그들의 협조와 헌신이 없다면 그 어떤 결과물도 창출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헌신하고 있는 작은 일,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일상 안에서 자주 만나는 작은 사람들,

결코 작은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조력자요,

하느님의 협력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미우면 미운 대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저는 독서와 복음을 연결하여 묵상하고 싶었습니다.

 

열왕기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대비되고,

복음에서 큰사람과 작은 자가 대비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시작을 작은 자에서부터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자일까?

 

바로 드는 생각은 자기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자기 안에 자기밖에 없는,

수용할 그릇이 작아 자기밖에 없는 자입니다.

 

남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하느님께서 들어갈 자리는 더더욱 없는 자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복음의 기쁨> 2항의 한 구절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고립의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헌이 얘기하는 내적 생활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누가 기도를 많이 하며 관상 기도라는 것도 하고,

요가나 마음 수련 또는 영신 수련을 열심히 하고,

좋은 강의를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듣지만

그것이 다 마음 안에서 불안을 몰아내고 평안을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런 것들을 아무리 해도 그에게는 이웃과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없고

고립 안에서 그리고 이기주의의 외로움 중에서 계속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바알의 예언자들도 이런 자들에 속합니다.

 

그들이 기도를 처절하게 하고 황홀경에 들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하느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황홀경은 어떤 황홀경입니까?

마약으로 인한 황홀경과 무엇이 다릅니까?

부두교도들의 황홀경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기도한다고 하는 우리에게도 심각한 경종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기도였는데

우리 기도는 하느님을 불러오는 데 실패한 바알 예언자들의 기도와 같지 않을까요?

 

나의 기도 안에 아예 하느님이 안 계시기에

마음의 평화는 있지만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닌가요?

 

나의 기도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이기는 하지만

나의 독방에 주님을 모셔 들여 밀애를 나누면서,

이웃은 밀애 방해꾼으로나 여기고 밀쳐냄으로써

이웃을 위한 사랑의 자리가 없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인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늘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밀쳐내고 하느님만 모셔 들이려고 하지만

사람을 밀쳐내면 내 안에서 하느님도 밀어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Deus Meus Omnia!’ 하며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모두시여! 라는 뜻도 되지만

나의 하느님, 모든 것이시여! 라는 뜻도 됩니다.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이시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모든 것이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아야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한 사람이라도 제외하면 나는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지 못해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누구를 미워할지라도 미우면 미운 대로 품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 승화 시몬 신부

 

아무리 좋은 조직과 체계라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좋은 도구도 쓰는 사람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면

어느 순간 원래 정신을 잊고

세상과 타협한 내용이 본질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다시 본질을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사실 교구와 본당의 구조는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이동을 하여 권력이 고이지 않게 하고

사목회와 사목자가 서로 협력하면서도 견제하여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또 기도와 성사와 봉사는 각자의 영혼을 성장시키고

더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함께 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런데 이런 일상이 반복되면 무언가 재미가 없어집니다.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결국 행사와 이벤트들이 하나씩 생기고

봉사자들은 지쳐버리는 가운데 사람들은 식상하여 하나 둘 떠나게 됩니다.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만 함께 하고

함께 하지 못한 사람은 소외되는 과정을 거치죠.

 

그럴 때에는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와 공부와 봉사를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고 함께 할 때

우리는 율법의 정신을 그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욕심에서 생긴 것들을 걷어내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완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 안에서 충만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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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10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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