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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1일 목요일[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6.06.11|조회수37 목록 댓글 1

2026611일 목요일[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1독서 : 사도 11,21-26; 13,1-3

복 음 : 마태 10,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마태 10,7)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와 자비의 손길이 이제 제자들의 손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은 이성적 설명이나 설득보다

구체적 치유와 자비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제자들이 행하는 기적은 하늘 나라의 선물이므로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 빠른 인간 세상의 논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지요.

복음의 논리는 값이 없기에 값진 것이고,

그 기쁨은 대가가 없기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자들은 가난하게 파견됩니다.

, , , 자루, 두 벌 옷, 신발,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파견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기꺼이 약한 모습으로 길 위에 서며,

그 자체가 하느님만을 신뢰한다는 예언자적 표지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10)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고 대가를 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의 일꾼에게 필요한 것을

책임지신다는 충실함을 드러냅니다(6,25-26 참조).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마땅한(10,11) 사람을 찾아내

한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기준은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응답하는

능동적이고 열린 마음입니다.

마땅한 사람의 열린 태도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가난한 제자가

먹거리와 머물 곳을 찾을 수 있는 하나뿐인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 열려 있고 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신 나라의 부유함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파견되어야 합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가 모은 참모는 대부분 대통령 자리를 놓고 싸우던 라이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내각을 사람들이 적수들이 모인 팀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뛰어난 정치가들이지만, 링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모아 링컨은 하나의 팀이 되게 했습니다.

그 방법을 역사학자들은 그의 유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겸손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상원의원 선거를 위한 공개 토론에서

상대 후보가 링컨을 향해 이중인격자라며 비난했습니다.

이 말에 링컨은 웃으면서

솔직히 제가 두 얼굴의 이중인격자라면

이따위 얼굴을 내놓고 다니겠습니까?”라면서

스스로 자기 비하를 합니다.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유머로 풀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적대자들과도 함께 최고의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화내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화합의 방법을 찾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겸손이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모두를 포용하시고 이로써 하나의 팀을 만드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모습을 우리 역시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성인께서는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따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메시지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이나 철학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을 그대로 이어받아 수행하는 대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돈, 여행 보따리, 여벌의 옷,

심지어 신발과 지팡이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시지요.

이는 물질적 준비에 의존하지 말고,

선교 여정을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와 돌보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5,12)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갖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이를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요?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잘 전하고 있을까요?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파견'입니다.

독서에서는 바르나바 사도가 교회로부터 파견 받았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24)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그러니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하고,

먼저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거나 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저 받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할 직무가 주어졌지만,

제자들에게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 나라이미 와 있는 나라’,

곧 거저 주어진 나라임을 말합니다.

곧 하늘 나라는 우리가 가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거저 주신 '하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도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 나라가 주어졌고, 하늘 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조 욱현 토마 신부

 

1. 바르나바의 소명과 정체성

 

사도행전은 바르나바를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이라고 증언한다.

그의 별명 바르나바”(위로의 아들)는 단순한 애칭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한 영적 정체성이다.

그는 재산을 나누어 공동체에 봉헌했고(사도 4,36-37),

바오로 사도를 공동체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위해 다리를 놓았다.

이 점에서 바르나바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초대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사도들의 덕행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만을 위해 살았다.”(In Acta Apostolorum Hom. 25 의역)

바르나바는 바로 이런 사도의 전형을 보여 준다.

 

2. 거저 받은 은총과 거저 주는 삶

 

오늘 복음의 핵심 말씀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이다.

은총(Gratia)은 결코 거래적 보상이 아니라, 무상의 선물이다.

따라서 제자는 그 받은 은총을 다시 무상으로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받았으니, 그 선물을 다시 아무 대가 없이 주어야 한다.

은총은 나눌수록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충만해진다.”(Sermones de Gratia 의역)

바르나바의 삶은 바로 이 말씀의 살아 있는 증언이었다.

 

3. 사도의 단순함과 자유로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팡이도, 여벌 옷도, 돈주머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단순히 가난을 이상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자유로움을 가르친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들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떠난 것은, 인간적인 무기로 무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싸우게 하기 위함이었다.”(Hom. in Matth. 의역)

또한 초대 교회의 문헌인 디다케는

참된 사도와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탐욕과 이익 추구를 언급하며,

복음 선포자는 청빈과 무상이 본질이라고 가르친다(디다케 11,3-6 의역).

 

4. 교회의 가르침과 오늘의 적용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은 이렇게 강조한다.

평신도들은 받은 은혜를 거저 나누며, 말과 행실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세상을 복음의 정신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3항 요약)

바르나바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거저 받은 자로서,

공동체를 세우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일치를 위해 힘쓴 참된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 우리 역시 같은 부르심을 받고 있다.

 

5.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성 바르나바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받은 은총을 내 것으로 움켜쥐고 있지는 않은가?

신앙을 계산하거나 보상과 교환의 차원에서 이해하지는 않는가?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 재물을 거저 나누며

이웃에게 위로의 아들·로 살고 있는가?

바르나바처럼 우리의 존재가 공동체 안에서 위로와 평화의 통로가 될 때,

우리는 복음의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다.

 

6. 맺음말

 

성 바르나바는 자신의 소유와 삶 전체를 거저 내어주며,

복음을 위하여 마침내 피까지 흘린 증인이었다.

오늘 우리도 그의 전구를 청하자.

우리가 받은 은총을 거저 나누고, 세상에서 하늘 나라를 드러내며,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작은 사도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며칠 동안 후배 신부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작년 8월에 미국으로 와서 교포 사목을 시작하였으니

어느덧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3월에 신부님 본당으로 사순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있는 본당을

방문하고 싶다고 해서 좋다고 해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지내며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이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상 깊었던 것은 기억력이었습니다.

신부님은 12년 전에 만났던 달라스 본당 교우들의 모습과

그때 나누었던 대화까지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신부님의 기억력은 감탄할 만했습니다.

그 비결은 단순했습니다. 기록하고 저장하는 삶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교우들과 함께했던 영상까지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억은 사람과의 관계를 더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친화력이었습니다. 예전에 주교님께서 저를 미국으로 보내시면서

조 신부는 사막에서도 잘 지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 적응력과 친화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신부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운동과 음악이라는 자신의 재능을 통해

처음 만난 사람과도 오래된 친구처럼 어울렸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공동체를 살리는 힘은

결국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바르나바 사도를 기억합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품으로 공동체를 세운 사도였습니다.

성령과 은총으로 가득했던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희망의 길을 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서 처음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도 바르나바의 헌신과 열매였습니다.

저는 문득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가 떠올랐습니다.

두 선수는 경쟁자였지만, 그 경쟁은 서로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성장시키는 경쟁이었습니다.

그들의 선의의 경쟁 덕분에

피겨 스케이팅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바르나바가 먼저 길을 열었고,

바오로 사도가 그 길 위에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바르나바가 감성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면,

바오로는 이성적으로 복음을 정리하고 확장했습니다.

바르나바가 공동체를 품었다면,

바오로는 서간을 통해 공동체를 가르치고 격려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누가 더 위대한가를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다릅니다.

바르나바도 바오로도 모두 하느님 정원의 아름다운 꽃들입니다.

서로 다른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루듯,

각자의 은총과 사명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니라 겸손이며,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순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씀은 2,000년 전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미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의미를 향해, 가치를 향해,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신부님 본당은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본당도

2027년에 설립 5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두 공동체 모두에게 이 시간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끌어 오신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새롭게 여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처럼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따르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된다면,

두 본당의 50주년은 분명 은총의 50, 희망의 50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바르나바처럼 위로하고,

바오로처럼 증언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또한 누군가에게는

믿음의 길이 되고, 희망의 길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송 영진 모세 신부

 

1)

여기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이 말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믿고 회개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종말이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마지막 날이 오면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사랑 실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복음은 로도 선포되고 사랑 실천으로도 선포됩니다.

둘 중에 사랑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받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 선포는(선교활동은)

돈벌이를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 선포의 대가로 돈을 받으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겪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사도 8,18-20)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돈으로 사거나,

돈을 받고 파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2)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줄이면, “빈손으로 떠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돌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와라.”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돈벌이를 하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빈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지고 갈 것은 믿음과 사랑과 자비 등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시는 분이니,

너희는 먹는 일을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라는 말씀은,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주는 대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있는

부자들에 관한 지침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

 

신앙생활은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도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과 먹을 것이 있는데도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고민하는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정말로 굶주리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남겨 주신 숙제 같은 것입니다.

 

<굶주리는 처지가 아니고

더 좋은 것을 먹으려고 고민하고 집착하는 경우라면,

믿음의 힘은 안 믿고 돈의 힘만 믿는 경우라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오른 팔 바르나바!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루살렘에 본산을 두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모공동체이자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최초로 정착되기 시작한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큰 관심,

즉 기도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교회는 신생 안티오키아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감독 한 명을 임명했는데,

그가 곧 바르나바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며, 바르나바는 별명입니다.

바르나바위로의 아들’,

용기를 고취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는 키프로스 출신이고, 직업은 레위계 성직자였습니다.

 

금수저 가문 출신으로 예루살렘에 금싸라기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수려한 용모에 탄탄한 학문, 깊은 신앙 등,

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당시의 대세남이었습니다.

 

원래 바르나바는 열두 사도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두 번 씩이나 사도라는 호칭으로 기록될 만큼,

교우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모두 팔아 사도들에게 갖다 바쳤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 그는 초대교회의 한 멤버로서

날개를 달고 열심히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큰 업적 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로부터 홀대받고 의기소침해 있었으며,

곤경 중에 처해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르소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습니다.

바르나바는 긴장 관계에 놓여있던 예루살렘 모교회 공동체와

바오로 사도 사이를 부드럽게 중재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만 1년 동안 의기투합했습니다.

두 분의 합심 결과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신자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교회 공동체 조직도 안정되고 강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노력으로

첫 번 째 해외 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정착되었고,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바오로라는 큰 인재를 알아봤고 지지한 것이 아닐까요?

바르나바 사도는 지금은 비록 곤경 중에 처해 있지만,

바오로야말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로서 적임자임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고,

용기를 불어넣고 격려했으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또한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유다 세계를 넘어

이방인 세계로 문호가 활짝 개방될 수 있도록

바오로 사도와 함께 완고했던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를 설득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이 모든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힘이 있고 힘이 되는 위로와 격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축일을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의 원명은 요셉이었는데

사람들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불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별명을 붙여 준 것입니다.

저 스스로는 당쇠란 별명을 제게 붙여 주었지만

여러분은 제게 어떤 별명을 붙여 주실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그에 대해 이렇게 전하기도 합니다.

 

바르나바는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이것을 볼 때 바르나바에 관해서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이라는 관점에서도 얘기할 수 있지만

오늘 저는 위로와 격려의 바르나바라는 관점에서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기로 한 이유는 그저께 한 자매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가정에 관해서 얘기 듣고

어떻게 위로와 격려를 할지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그 가정은 몇 년 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할 때

배고픈 저희를 먹여 주시고 잠자리도 제공해 주신 분들인데

며칠 전에 불이 나 벌통과 창고가 소실되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도 사는 집에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씀인데

아무튼 이분들에게 어떤 위로와 격려를 드릴지 생각게 되었고,

오늘 그것을 마침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먼저 이런 경우 늘 제게는 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라는 말이 있지만 이럴 때 저는

제가 위로받을 처지에 있어야 하는데 위로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미안하고

더 나아가 같이 있어 드리거나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위로를 드리면서도 쭈뼛쭈뼛 위로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먼저 위로는 그의 슬픔과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 곧 공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로가 진실하기 위해서는

말로만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공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와 함께할게, 기도로 함께할게 하며 어떻게든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괜찮아질 거야, 나아질 거야 하며 희망적인 얘기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겐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위로는 하느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위로여야겠지요.

주님도 같이 아파하시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주님께서 낫게 해주실 거라고.

 

그런 다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격려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 격려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위로만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도 된다면 힘들지만 일어서라고, 용기를 한번 내보라고 격려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은 물론 주님께서 힘주실 것이라는 말과 함께 격려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르나바가 위로와 격려를 잘할 수 있게 된 것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제가 위로와 격려에 쭈뼛쭈뼛하는 것이 바로 이것,

곧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할 때 우리의 위로와 격려가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성령에게서 나오기에

그 위로는 힘이 있고 받는 이에게는 힘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승화 시몬 신부

 

무슨 일을 진행할 때

그 일이 잘 진행되는지 확인하는 감독은 필요합니다.

감독이 없으면 겉으로만 잘 되어 보일 뿐

자칫 속으로 곪아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감독은 과정을 살피면서 결과를 제대로 확인하게 됩니다.

 

감독이 되는 사람은

여러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자칫 감독이 진행하는 이들과 함께 편을 먹는다면

온갖 부정부패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현실을 모르고 결과만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사명감이 투철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이 있을 때

여러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맡겨진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르나바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이가 파견 받아 확인을 하니

더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파견된 사도들의 자세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찰해 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지 살피며

유혹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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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11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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