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2일 금요일[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제1독서 : 신명 7,6-11
제2독서 : 1요한 4,7-16
복 음 : 마태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 감사의 내용은 역설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을”(마태 11,25) 감추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늘 나라,
곧 치유와 자비,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 낯선 일일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11,25),
곧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세상을 읽어 내지 못합니다.
켜켜이 쌓아 온 삶의 방식과 그에 따라 이미 몸에 밴
자기만의 논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철부지들”(11,25)이 그 세상과 가깝습니다.
어린아이는 약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받아들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이해가 아니라 신뢰가 먼저 일어나는 자리, 그곳이 철부지의 자리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11,27).
이는 단순히 권력 선언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친교를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친교는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이에게만 열립니다.
25절에 나오는 ‘드러내다’는 그리스 말에서 ‘계시’의 동사형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대상은 “철부지들”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밝히 드러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거나 더 많이 노력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것은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나아가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가능합니다.
내 눈의 들보를 들어내 사람을, 세상을,
그 고유함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중학생 때, 부모님께서는 전축을 사 오셨습니다.
전축은 ‘전기축음기(電氣蓄音機)’의 줄임말로,
LP(레코드판)를 재생하는 턴테이블, 라디오, 앰프, 스피커 등이
하나로 통합된 오디오 시스템을 가리키는 옛 표현입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엘피판을 턴테이블에 올려야만 했습니다.
A면을 다 들으면 B면으로 뒤집어서
세심한 손길로 바늘을 얹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또 내구성이 약하고 먼지에 대한 취약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CD(compact disc)가 등장했습니다.
간편한 데다 음질도 깨끗하고 선명했습니다.
이 CD가 음악시장을 완전히 평정할 줄 알았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CD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디지털 음원의 등장과 인터넷을 이용한 음원 스트리밍으로
전체 음반 시장이 급격한 속도로 기울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예전의 엘피판이 자연스럽고 풍부한 소리를 낸다며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또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인 분이시기에
그분께 집중함으로 인해 사랑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
바로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또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 직무를 더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을 윽박지르는 힘이 아니라,
상처받는 이를 어루만지는 온유함과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는 겸손이라고 하시지요.
그러면서 ‘멍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지역의 농경문화에서 ‘멍에’는 보통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끌었습니다.
어린 소가 멍에 메는 법을 배울 때, 힘센 어미 소와 한 멍에를 매게 하여
어미 소가 사실상 모든 짐을 감당하게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라’는 것은 새로운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한 멍에를 매시고 내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시겠다는 사랑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삶 안에서 자기의 힘만으로 결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거룩하신 예수님 성심 안에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편하고 내 짐은 분명 가벼워집니다.
특별히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사제직이라는 멍에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에 무척 무겁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의 성화를 위한 여러분의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이요, ‘사제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곧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사제들이
‘예수성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성화를 촉구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루가복음>의 병렬 구문에 따르면,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루카 10,21) 노래하는
예수님의 ‘마니피캇’(mangificat)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감사와 찬양의 노래요,
뒤 장면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이들에게 주는 ‘쉼’(안식)으로 초대입니다.
오늘은 이 <복음>을 ‘예수성심’과 관련하여 알아들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마태 11,25)를
우주의 주권자시라는 고백하면서, ‘아들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예수성심’은 무엇보다도 우선 ‘아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는”(마태 11,25)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찬양과 감사”의 감격적인 고백을 드립니다.
또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마태 11,26)라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동의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합니다.
그리고 아들로서, 아버지와 본질적인 동질성 안에서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7)
그래서 아버지께서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듯이,
당신께서도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에게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1,28)하시며 구원과 안식으로의 초대합니다.
이는 ‘예수성심’이 ‘아버지를 닮은 마음’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이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라기보다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요,
아버지의 ‘종’으로서 아버지의 자녀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며
그들의 아픔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 하시면서
‘멍에’를 함께 메시는 ‘스승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가 혼자가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멍에’를 함께 메어주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지는 ‘멍에’에 올려 진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27).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사제들은 바로 그렇게 신자들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이들일 것입니다. 바로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마침내는 당신의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의 짐을 짊어지시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셨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이사 53,5)
바로 이 지고한 사랑의 마음이 ‘예수성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신 심장에 거부와 배신의 창을 꼬았건만
당신은 오히려 생명의 심장을 열어 주셨고,
우리는 당신에게 고통과 죄를 쏟아 부었건만
당신은 우리에게 은총의 피와 생명의 물을 쏟으셨습니다.
그 지극한 사랑으로 당신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우리의 불신과 불순명으로 피 흘리셨고,
저희는 당신 사랑의 심장으로 새 살이 돋았습니다.
저희 안에 당신의 피가 흐르게 하고, 은혜로운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오니, 오 사랑하올 예수 성심이여!
당신의 피를 흘리는 능력 외에는, 아무 능력도 없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피를 흘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을 모르게 하소서.
오로지 사랑만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임의 사랑, 임의 성심만을 알게 하소서. 아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조 욱현 토마 신부
1. 예수 성심의 의미
초기 교회로부터 예수 성심(聖心)에 대한 언급은 이미 존재했다.
성심은 단순히 신체적 기관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가운데
사랑의 중심이자 구원의 샘으로 이해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의 심장은 교회의 탄생을 낳은 샘이며,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성사들의 기원이 되었다”
(Tractatus in Ioannem 120,2 의역)라고 말한다.
이는 요한복음의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에 대한 교부적 해석으로,
교회가 성체와 세례성사로부터 태어남을 드러낸다.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너희는 기쁨으로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1956)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상한 구세주의 심장에서 구원의 샘이 터져 나와 온 인류에게 은총이 흘러넘친다.
성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다.”
따라서 성심 공경은 단순한 감정적 신심이 아니라,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사랑,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대한 응답이다.
2. 역사적 전개
13세기 이후 독일 신비가들과 시토회 전통 안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묵상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신심이 보편 교회 안에서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은
17세기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을 통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파레이 르 모니알에서 성녀에게 발현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인간들로부터 받은 냉담과 배은망덕에 찢어지고 있다.
너는 이 마음을 공경하게 하고, 보속의 첫 금요일을 바치게 하여라.”
이 요청에 따라 교회는
성체 성혈 대축일 후 첫 금요일을 성심 공경의 날로 정했고,
후에 비오 9세 교황이 보편 교회의 대축일로 선포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이 축일은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랑에 대한 감사의 날로서
더욱 깊은 전례적 의미를 지닌다.
또한, 한국 주교회의는 이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여,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도록 기도한다.
3. 복음 묵상: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오늘 복음(마태 11,25-30)은 예수 성심의 핵심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다.”(25절)라고 하신다.
이 “철부지 어린이들”은 세속적으로 무력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마음을 비우고 순명하는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가장 온전히 따른 이는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내셨으며,
이제 그 사랑을 받아들인 자들은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방식이다.
그분은 힘이나 권세로 다스리지 않고, 사랑과 겸손으로 구원을 완성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초대는
곧 그분 사랑의 방식을 배우라는 부르심이다.
4. 성심과 성체성사의 연관성
예수 성심 대축일이 성체 성혈 대축일 직후
금요일에 지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체는 곧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실체이며,
성체 안에서 우리는 “상한 심장”의 사랑을 체험한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듯이,
지금도 우리는 성체와 세례의 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성사적 표현이며,
우리의 성체성사 참여는 곧 성심 안에 들어가 그 사랑을 나누는 행위이다.
5. 오늘의 실천과 성찰
예수님의 성심은 단지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본받아야 할 마음이다.
사제들에게는 성심을 닮아 사랑으로 봉사하는 마음,
평신도들에게는 가족과 이웃 안에서 그 온유와 겸손을 실천하는 마음이 요청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심장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이며,
성체성사와 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사랑의 표현이다.”(478항)
예수님의 성심을 닮아갈 때, 우리는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을 증언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사랑의 도구가 된다.
6. 결론
예수 성심 대축일은 단순히 신심의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의 사랑을 닮아
세상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온유하고 겸손하신 당신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소서.
우리도 당신의 사랑 안에 평화를 누리며,
세상에 그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예수 성심 기도)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즘 한국에서는 소풍과 수학여행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압사 사고 이후,
안전과 책임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학교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는 시간’입니다.
학교는 배움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경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시험과 평가를 통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비교되고 서열화됩니다.
그러나 소풍과 수학여행에서는 달랐습니다.
성적순으로 줄을 서지 않았고, 점수로 평가받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친구의 새로운 장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도 학창 시절 소풍을 가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응원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교실에서는 성적으로 평가받았지만,
소풍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풍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관계가 회복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풍과 수학여행은 ‘제3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의 공간도 아니고, 규율의 공간도 아닌, 관계가 살아나는 공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사랑입니다.
평가하기 전에 사랑하시고, 판단하기 전에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학교처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회당에서만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길 위에서, 호숫가에서, 들판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소풍과도 같고, 수학여행과도 같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었고, 때로는 실패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평가로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불러주시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마음, 부족해도 품어주시는 마음,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입니다.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음악회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소풍과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적이나 실력으로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재능을 자유롭게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며 기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노래를 잘하고, 누군가는 악기를 잘 다루고,
또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묵묵히 봉사할 것입니다.
그 모든 모습이 소중합니다. 그 모든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다양성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서로를 비교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잘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점수로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경쟁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신앙은 평가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며,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비교하기보다 격려하며,
평가하기보다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본당이, 우리 가정이,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에게는 ‘소풍과 같은 시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성심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평가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당신의 성심을 닮게 하소서.
저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 일을,
“우리를 대신해서 멍에를 짊어지심으로써
우리의 멍에를 없애 주셨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십자가는 멍에가 아닌가?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멍에를 없애기 위해서
당신이 스스로 짊어지신 멍에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또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고 가는 ‘나의 십자가’는,
멍에가 아니라 멍에를 벗기 위한 열쇠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위한 일이다.” 라고 표현하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한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의 멍에를 완전히 없애 주겠다.” 라는 약속입니다.
무거운 멍에를 벗기고
덜 무거운 멍에를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9절과 30절의 ‘내 멍에’ 라는 말과
‘내 짐’이라는 말은 반어법적 표현일 뿐이고,
이 말의 진짜 뜻은
‘우리의 멍에를 없애 주는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멍에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싶으면
내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살아라.”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내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니다.
너희에게 참된 해방과 안식을 주는 열쇠다.”입니다.
<지금 ‘열쇠’ 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 쪽의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해방과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를 받아서 자물쇠를 열고,
스스로 멍에를 벗는 능동적인 응답을 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해 가실 때,
예수님이 가엾다고 울었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3,28.31)
이 말씀은,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여라.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공경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더욱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
25절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말씀은,
“가난하고 힘없고 무식하고 못난 사람들도 빠짐없이 구원하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뜻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음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라는 말씀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감추시고’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감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자들이 외면했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또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도 모두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이고,
그런 자들이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분입니다.>
4)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온갖 멍에와 짐에서 해방된 사람이고,
영원하고 참된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한눈을 팔다가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이미 벗어버린 짐과 멍에를
다시 짊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2베드 2,20-21)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 사랑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노력해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이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운명하시면서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또 다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공경에 대한 근거는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 금요일 오후 세시,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십자가형은 형 집행 방법 중에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체력이 좋은 사형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틀 사흘까지 견딥니다.
집행관들도 피비린내 나는 사형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겠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형수들의 얼굴을 유심히 봅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적당한 때가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트립니다.
그럼 체중이 아래로 쏠리고 심장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즉시 운명하게 됩니다.
마침 다음날이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이 군사들에게 빨리 좀 처리해달라고 청합니다.
집행관들이 먼저 좌도와 우도의 다리를 꺾고 난 다음,
예수님 다리도 꺾으려고 봤더니,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사살 차원에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을까요?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옆구리, 곧 예수님의 심장,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을 의미합니다.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양육하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많은 분이 사제인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 성찬의 전례 시작 때, 포도주에 물을 살짝 부으시던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포도주가 너무 독해서 물로 희석시키는 의미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들은 포도주잔에 물을 살짝 첨가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사 경문에 살짝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미사 집전 사제는 포도주잔에 물을 넣으면서
마음속으로 한 문장을 읽게 되어있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물은 인성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결국 포도주에 물을 넣는 행위는
죄인인 우리의 인성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곧 예수 성심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겁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 성심 대축일에 우리는 오늘 복음을 듣습니다.
예수 성심이 곧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라는 뜻이고,
이 축일을 지내며 이 마음을 배우라는 뜻이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부담감을 많이 느끼고 갈수록 부담감을 못 견뎌 하며,
그래서 조그만 부담도 감수하고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것은 미성숙할수록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서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심은 답을 줍니다.
어떻게 부담스러운 짐들을 잘 져서 사랑을 이룰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부담이 아니라 사랑이 될 수 있는 법을 알게 해주고,
일과 책임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법을 알게 해줄 것입니다.
무엇이?
예수 성심이.
그렇다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어찌 그렇게 해주는지 이제 보겠습니다.
짐 지는 것이 부담이 되고 고통이 되는 것은 그 근본적인 이유가
우리가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임은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결코, 부담스럽지 않고 전혀, 고통스럽지 않지요.
그렇다고 짐이 무겁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무겁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똑같이 무거운 짐을 지는데도 좋아하는 사람의 짐을 질 때는 고통스럽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의 짐을 질 때는 더 고통스럽지 않고 심지어 기쁘기까지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무거운 것을 들어줬다는 것이 오히려 기쁘게 합니다.
예수 성심은 이런 마음입니다.
사랑하기에 무겁고 싫어하는 일 곧 십자가를 기꺼이 지려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마음가짐에서 겸손과 온유한 마음도 나오고,
반대로 겸손한 마음에서 사랑의 마음과 온유한 마음도 나옵니다.
사랑할 때 ‘이것이 왜 내게’를 따지지 않듯이
겸손할 때도 따지지 않습니다.
하인에게는 주인의 짐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이 되듯
겸손한 사람은 ‘내가 왜?’를 생각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주어진 짐을 집니다.
사랑의 마음만큼 기쁨은 없어도 거부감에서 오는 부담감이나 고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짐을 지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에 이르러야 하고 이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겸손만 가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매달려 당신 심장에서 피와 물을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그리고 그중에서도 수난의 사랑(Passion)으로 그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난의 사랑을 지닌 마음을 우리는 오늘 성심이라고 칭송하며
우리의 마음이 이 주님의 마음과 같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이 승화 시몬 신부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사랑을 나눠줄 줄 알게 됩니다.
내가 받은 사랑의 무게와 가치와 깊이를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을 하게 되고
내 안에 사랑이 채워질수록 넘쳐흐르는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전달로 이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랑의 사람인 이유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수난 받고 죽으셨으며
온갖 비난과 공격 앞에서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만 살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흔들었고
흔들린 마음 안에 교만과 시기 질투, 허영이 떨어져나가며
떨어진 자리에 주님의 사랑이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커질수록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그 사랑을
이웃에게 똑같이 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닮아가기 때문이고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사랑으로 우리 삶의 결핍과 불합리함 속에서도
희망을 전해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돌보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지만
어느 순간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교만의 씨앗은
하느님을 잊고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사람만을 바라보고
모든 사람 중에 나만을 바라보며
결국 갈등과 분열 속에서 승리자만 되고자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죠.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돌아볼수록
허무함이 아닌 사랑의 충만함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내적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고
그 사랑의 깊이를 체험함으로써 충만함 속에서
참 행복을 바라보고 누리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 기도합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그 사랑 앞에서 서서
우리 마음에 그 사랑을 담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