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게시판

2026년 6월 13일 토요일[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6.06.13|조회수38 목록 댓글 1

2026613일 토요일[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1독서 : 이사 61,9-11

복 음 : 루카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성가정의 발걸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동사 가곤 하였다.”(루카 2,41)가 암시하듯

되풀이되는 경건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이 익숙한 리듬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됩니다.

유다 전통에서 성인의 책임을 묻는 나이에 가까운 열두 살에

예수님께서는 유다 전통의 익숙함을 끊고 성전에 머물기를 선택하십니다.

이는 부모의 실수라기보다는, 성년의 문턱에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결단이지요.

 

부모가 예수님을 찾아 헤맨 사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인 사흘을 미리 보여 줍니다.

성전의 율법 교사들 사이에 앉아 계신 소년 예수님의 모습은

뒷날 수난 직전 성전에서 펼쳐질 율법 교사들과의 논쟁을 미리 보여 주며,

주님 수난의 큰 슬픔을 마주하게 될 독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슬픔이나 고통 너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이 질문은 애타게 아들을 찾던 부모에게는 차갑지만,

믿는 모든 이에게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넘어 신성한 하느님의 자리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신앙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사흘의 시간을 통하여 저만치 멀리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 한가운데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는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부모에게 순종하시며 일상을 보내십니다.

가장 신성한 순간과 가장 평범한 순종이 교차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우리의 삶이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하느님 현존의 자리입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인간은 평생 자기 뇌의 10%도 쓰지 못한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일까요?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서 이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은 자기 뇌의 15%를 써서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뇌의 1%만 더 써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아마 지금도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알츠하이머의 경우 손상하는 뇌가 10~20%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뇌의 부분이 80~90%나 되는데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사실 모든 사람은 자기 뇌의 100%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만약 뇌의 10% 정도만 사용하게 된다면 생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은 잘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잠재력입니다. 자기가 가진 잠재력의 10%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뇌를 100% 활용하고 있습니다.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잠재력은 뇌의 활동량과 상관없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은 얼마나 쓰고 있을까요?

10%는 쓰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일 것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철저히 동참하신

성모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발견합니다.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찾습니다.

성모님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말씀하시자,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보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의 뜻이 우선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순명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성모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하느님을 애타게 찾고,

그분의 신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사건을 기도로 마음속에 간직하는 거룩한 마음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완벽한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

 

교황 비오 9세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나셨습니다.

 

언제나 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하느님 뜻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나기를 바랍니다.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이여!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당신께서는 오로지 당신 아드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셨듯이,

저희 또한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하소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를 받아들이시어

저희 또한 당신 아들의 성심 안에 흠뻑 젖어들게 하소서.

그 사랑의 성심으로 제 형제들을 가슴에 끌어안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조 욱현 토마 신부

 

1. 축일의 유래와 의미

 

성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성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에 의해

신심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비오 12세 교황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온 세상을 마리아의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 안에 뿌리내렸다.

이후 예수 성심 대축일 바로 다음 날을

성모 성심을 기리는 축일로 자리 잡았다.

교회는 이 축일을 통해 성모 마리아의 깨끗한 마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 마음을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이 되도록 초대받고 있다.

 

성모 성심은 단순히 감정적 차원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일치된 사랑의 마음이다.

교회는 이 축일을 통해, 마리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어떻게 결합하여 있는지를 묵상하고,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음을 되새긴다.

 

2. 복음의 신학적 의미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본문에서

마리아의 신앙 여정을 보여 준다.

열두 살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는 장면은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사흘간의 고통 :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 동안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예시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사흘의 고통을 묵상하며,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당하신 고통을

이미 성전에서 맛보았다.”(Sermones 의역)라고 한다.

 

아버지의 집: 예수님께서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라고 하신 말씀은

그분의 하느님의 아들 됨을 드러내며,

마리아는 그 신비 앞에서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마음속에 간직하는신앙의 자세를 보여 준다.

 

간직하였다.”(συνετήρει)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고

삶 속에서 되새기는 신앙의 태도를 나타낸다.

오리게네스는 마리아는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말씀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Homilia in Lucam 의역)라고 말한다.

 

3. 교회의 가르침

 

교회 헌장은 마리아의 성심이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동정녀는 자유롭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위한 믿음과 순명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모는 믿는 이들에게 신앙의 모범으로서 제시된다.”(53, 58항 의역)

 

성모 성심은 그리스도의 성심과 분리될 수 없으며,

구원의 동반자로서 마리아가 지니는 사랑과 고통의 참여를 드러낸다.

비오 12세 교황은 회칙,

너희는 기쁨으로 물을 길어 올리리라.”(Haurietis Aquas, 1956)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마리아의 깨끗한 성심은

인류 구원의 제단 위에 예수님과 함께 봉헌되었으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불가분의 표징이 되었다.”(의역)

 

4. 신앙의 길: 성모 성심 본받기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하느님을 잃어버릴 때: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예수님을 잃었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 여정에서 주님을 자주 잃어버린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다시 성전으로,

하느님의 뜻 안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주님을 찾게 된다.

 

묵상의 태도:

모든 것을 즉시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 위에 서야 한다.

 

깨끗한 마음:

성모 성심은 티 없는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도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정결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을 지향해야 하겠다.

 

5. 삶에 적용

 

말씀을 간직하기:

매일 복음을 읽고 마음에 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진다.

 

주님을 찾기:

어려움과 방황 중에 세상적인 해결책만 찾지 말고,

성전으로 돌아오듯이 주님 안에서 해답을 찾는다.

 

사랑의 마음 닮기:

마리아처럼 깨끗한 사랑으로 가족과 이웃을 대하며,

특별히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6. 결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단순한 신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마리아의 온전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도 성모 성심을 본받아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다시 찾으며, 깨끗한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다.

 

마리아의 성심은 교회가 거울로 삼아야 할 완전한 성소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배운다.”

(성 요한 바오로 2, 1986년 성모 성심 강론 요약)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 복음은 어린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 길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을 드러내는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정에만 머무는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리아는 더 깊은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지만,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미쳤다.”라는 소문까지 듣게 됩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찾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나의 어머니이고 형제입니다.”

 

이 말씀 또한 마리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말씀도 가슴에 품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간직하고, 아파도 받아들이는 것이 성모님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인간적으로는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기에 그 길을 받아들이셨고,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드님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마음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채워진,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이후,

여러 발현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다섯 가지 당부가 있습니다.

 

첫째,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라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한 반복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공생활, 수난, 부활을 묵상합니다.

다시 말해서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함께 걸어가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고통을 예수님의 삶과 연결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둘째, 성경을 자주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식은 자주 듣고,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으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을 배우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 고백성사를 자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 죄가 쌓이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고백성사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한 달에 한 번의 고백성사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넷째, 미사에 충실히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평일 미사에도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미사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참여하는 가장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미사를 중심으로 살아갈 때 더욱 깊어집니다.

 

다섯째, 단식과 절제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라고, 더 많이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반대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훈련입니다.

절제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특별한 신앙인의 길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기본적인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결국 성모님의 마음,

티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자녀의 건강과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것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드님을 놓지 않으셨고,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이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믿고,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성모님의 다섯 가지 당부를 마음에 품고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우리 교회가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면서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이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인데,

성모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잃은 아들을 애타게 찾으신 성모님의 마음과

죄인들을 애타게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같은 마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인들을(나를)

애타게 찾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2)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늘 함께 계셨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성모님도 함께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것도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 마음과 사랑에 응답하려면, 회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마음에

나의 마음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관해서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 12,33-35)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 15,18-20)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성모님은 마음의 깨끗함에서 모든 사람의 모범이신 분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진심으로 회개해야 하고,

마음속의 나쁜 것들을 억누르는 의지와 노력도 중요하고,

오직 마음의 깨끗함만을 희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8-19)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마귀를 쫓아낼 수 없는 것처럼,(마르 9,29)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기도가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성모님께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쁜 것들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좋은 생각과 말들로만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은 말씀을 통해 성모님의 마음을 만나는 날입니다.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입당송).

 

미사를 여는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을 임신하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노래한 성모 찬송의 '한 줄 요약' 같습니다.

미사의 시작부터 기쁨과 환희가 펼쳐지는 것 같네요.

 

사실 우리는 "성모성심" 하면 성모 칠고를 상징하는

칼 일곱 개에 심장이 찔리신 성모님 성화를 먼저 떠올립니다.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 그분의 인생이 고통 투성이였고,

인류의 어머니로서 무수한 자식 걱정에 근심이 그칠 날 없는 숙명을 보여 주는 것 같지요.

 

하지만, 평생 사랑을 보람으로 여기고 살아온 이들에게 인생을 묻는다면,

늘 고통과 비탄뿐이었다고 푸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대개는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르면서

사랑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소환해낼 것 같지 않나요?

마리아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고

침묵과 인내로 품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지만,

교회가 마리아를 기념하며 기쁨을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루카 2,46)

 

복음은 예루살렘 축제 후 소년 예수님을 잃었던,

부모로선 십 년 감수했을 사건을 들려줍니다.

외아들을 찾아 헤맨 사흘은 죽음과 같은 시간이었겠지요.

사흘은 마리아께서 먼 훗날 예수님을 무덤에 묻고 견뎌야 할 고통의 사흘을 예비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다행히 예수님을 찾긴 했는데, 예수님의 답변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요.

사흘 졸인 가슴에 사과는 커녕 영문 모를 당당함까지...

아마도 마리아는 어미로서 한계를 느끼셨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을까요?

고통? 조바심? 두려움? 괘씸함? 한계? ...

놀랍게도 오늘의 말씀은 제게 '그건 기쁨이었다'고 속삭이십니다.

마리아의 성심 안에 가득 찬, 티없이 깨끗한 기쁨을요.

 

누군가 인생의 위기를 물을 때,

", 정말 진짜 힘들었어요. 죽을 뻔했다니까요" 하며

사건의 초반부터 구구절절 한숨과 눈물을 섞어가며

과정 위주로 들려주는 사람도 있고,

"그러게요 분명 어려운 순간이었는데 그럭저럭 지나갔어요.

견딜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며

승화시킨 결과를 나눠주는 사람도 있지요.

아마도 전자는 고통과 슬픔이, 후자는 감사와 기쁨이

마음속에 더 짙게 간직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

그의 성격이 되고 인격이 되고 영성이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1,10)

 

1독서는 이렇듯 마리아의 기쁨을 예언합니다.

풍요하고 순탄해서도 아니고 누리며 대접 받는 삶이어서도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자격은

주님의 축복과 구원과 의로움을 믿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던져 의탁한 이에게 부여되는 상급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마음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요.

녹록치 않은 삶에서도 마음속에서 기쁨을 길어 올리시는 성모님처럼,

믿음과 의탁으로 마음속에 기쁨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성모성심의 사랑

사랑의 찬미, 사랑의 관상, 사랑의 순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 하리이다.”(시편13,6)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기상하여 카톡을 열어보니 제가 자는 동안 도착한 메시지에 감사했습니다.

 

존경하옵는 신부님,

예수성심의 마음으로 저희 양떼들을 이끌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사제보다는 목자로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다음 오늘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의무 기념일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파도바의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은 없습니다.

인류구원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순수한 사랑과 순종,

그리고 하느님 뜻에 함께한 깊은 고통과 기쁨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 성모성심 기념일의 기원과 역사를 잠시 살펴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요한 외드(St.John Eudes)에 의해 공경이 시작되었으며,

1942년 교황 비오 12세가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세상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봉헌하면서

온 교회가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822일 이었으나, 1996년 교황청 경신성사성 교령에 따라

예수성심 대축일바로 다음 토요일로 옮겨져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깊은 일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새벽 인터넷 검색 중 언뜻 한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친구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친구가, 성모님의 친구가 되어 깊은 우정을 나누는 방법은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는 항구하고 진실한 사랑의 노력이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그리하여 면담성사 후 형제자매들이

잠시 수도원 정원 바늬 성모상 앞 의자에 앉았다 가도록 권하곤 합니다.

 

요즘 스페인에 사도적 방문 중인 레오14세 교황의 눈부신 활약에 감동, 감탄합니다.

날마다 묵상 공부해야할 내용이 무궁무진합니다.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사랑을 그대로 닮은

레오 14세 교황의 메시지 제목만 봐도 깊고 아름답습니다.

 

인간존엄성은 여권이 필요 없습니다”(Human diginity has no passport)

 

인간 그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아져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차별받고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하느님다운 사랑입니다.

 

사랑의 숨겨진, 고동치는 마음을 들으십시오.”

저는 여러분에게 제 마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얼굴들을 볼 때, 여러분의 마음들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이해합니다. 여러분의 인간성의 보물을 나누세요.

더욱 인간적이 되는 여정이 되게 하세요.

그 어떤 폭풍우도 주님의 현존으로부터 여러분을 떠나지 못하게 하세요.

주님 안에 뿌리 내리세요.”

어느 인간도 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양에 자신을 여세요’(Open Chtist’s Ocean of love)”

회개하세요! 하느님의 정의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Repent! Divine justice awaits you).“

 

모전자전, 성모성심의 사랑을 그대로 닮은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성모성심의 사랑을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사랑의 찬미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한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후예이자 찬미의 어머니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을 노래하는 찬미뿐입니다.

오늘 화답송 찬미가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입니다.

성모님의 사랑의 찬미, 마니피캇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의 하느님 찬미가 흡사 성모님의 사랑의 찬미처럼 들립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한결같은 끊임없는 사랑의 찬미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날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바로 마리아 성모님의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둘째, 사랑의 관상입니다.

사랑의 관상은 사랑의 인내, 사랑의 침묵,

사랑의 경청, 사랑의 기다림, 사랑의 담아둠을 함축합니다.

고결한 영혼은 담아두는 능력에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관상가들은 지혜롭고 자비롭습니다.

절대 미련하게 부화뇌동, 경거망동,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풍도 미풍으로 바꿉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소년시절은 결코 평탄치 않았습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문제아였습니다.

뒤늦게 소년 예수 아들이 보이지 않자

예수님 부모는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찾습니다.

부모와 예수님이 주고받은 문답이 점입가경, 불가사의입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문득 절이, 수도원이 고향집에 온 듯 편안하며 절에,

수도원에 머물러 살게 됐다는 불승이나 수도자에 관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이미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각했으니

있어야할 제자리를 발견한 거지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성소였음을 봅니다.

 

이에 대한 마리아 성모님의 짧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는 대목이

지혜와 사랑이 일치를 이룬 관상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모든 어머니들이 배워야 할 덕목입니다.

제 어머니 신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꾸짖거나 화내거나 매를 드는 일 없이 저를 끝까지 믿어주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평생 회개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어머니를 그리며> 사모곡思母曲같은 자작시 한 대목을 나눕니다.

내일 614일은 제 어머니 제21주기 기일이기도 합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 없이도 한 결 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삶 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 오신

내 어머니.”

 

이런 어머니가 그리워 어머니를 찾는 마음에

<구암리카페>로 변한 고향집을 자주 찾게 됩니다.

지금에서야 제 어머니 역시 깊은 사랑의 관상가였음을 깨닫습니다.

 

셋째, 사랑의 순종입니다.

순종의 사랑, 순종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예수님에 대한 대목이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모전자전, 그대로 예수님은 마리아 성모님의

사랑의 관상, 사랑의 순종을 보고 닮았다는 확신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참 자존감 높은 자식으로 키웠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갔다.”

 

새삼 오늘날 교육 환경이 얼마나 부실한지 깨닫게 됩니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는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데

도대체 주변에서 보고 배울 어른이 자연환경이 없습니다.

스페인 방문 중 어린이들과의 대화 중 레오 교황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모든 어린이가 하느님의 꿈이다(Every child is God’s dream)’.

렌조! 어린이들은 아주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물어야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싶은 꿈이 있는지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하느님께 내 삶을 봉헌하고 싶다는 꿈을,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마리아 성모님은 사랑의 순종의 달인이자 대가였습니다. 순종의 진리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듯이

하느님 뜻에의 자발적 사랑의 순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바로 이런 마리아 성모님의 사랑의 순종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랑의 찬미, 사랑의 관상, 사랑의 순종으로 요약되는

티 없으신 성모성심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티 없으신 성모성심의 사랑을 닮게 합니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5). 아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이 승화 시몬 신부

 

성모 마리아는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렸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가진 나약함은

때때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곤 합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하느님이셨죠.

그래서 그분이 성전에 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풍습에 따른 행동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이 계셔야 할 집에 계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러나 마리아는 성전에 발견한 예수님을 보고

애타게 찾았다며 인간적 시선을 보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순명을 보인 모습과 달리

인간적인 모성애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로 이런 나약함이 우리를 더 성모님께 다가가게 해 줍니다.

그분이 신이 아니기에 편안히 다가갈 수 있고

그분이 인간적인 허점들이 있기에

우리도 나약함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성심 대축일 후에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성모님의 사랑과 함께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기도합니다.

나약함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한 성모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희망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13 아멘.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