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열왕 21,1ㄴ-16
복 음 : 마태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동태 복수법’을 다시 이야기하십니다.
이 율법은 받은 상처를 똑같이 되돌려주려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수가 점점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울타리였지요.
범죄와 형벌 사이의 균형을 지키고,
폭력이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정의였습니다.
법은 대체로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나아가 법정의 논리를 넘어,
인간 마음의 깊은 자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악인’은
일상에서 우리를 모욕하고 상처 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굳이 “오른뺨”(5,39)을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폭행이 아니라 남을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잡이가 상대의 오른뺨을 때리는 것은 손등으로 치는 것으로,
당시 노예나 하인을 향한 모욕과 하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5,39)라고 하십니다.
이는 굴욕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모욕이 우리 안에서 증오가 되어 커지지 못하게 하라는 초대입니다.
모욕을 사랑이나 선의로 꺾어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라는 말씀도,
천 걸음을 가자는 이에게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말씀도,
굴복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선의를 끊임없이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억압의 한 걸음을, 사랑의 두 걸음으로 지워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러합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용서받고 위로받으며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자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삽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과거는 학벌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서울대 나온 판검사, 의사, 대학교수가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직업, 지위, 성실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졌습니다.
그보다 서울의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
성공의 척도이고 명함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을 다니며 전문직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어느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의 열등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보이는가?’
다수가 인정해 주어야 안심합니다.
이렇게 다수에 신경 쓰니 불안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남의 눈을 신경 써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의 척도를 진실로 믿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는 터무니없이 미치지 않지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준을 따르게 되면, 자신감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주님께서 워낙 사랑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악에 대해 무조건적인 참음과 굴종을
요구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약자의 비굴한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는 폭력으로, 억압에는 분노로 대응하는 세상의 공식을 깨뜨리시며
자신 있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잡이가 마주 선 사람의 ‘오른뺨’을 치려면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이는 힘 있는 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모욕과 멸시였습니다.
이때 ‘다른 뺨’을 돌려 대는 것은 도망가거나 움츠러드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나는 네가 함부로 모욕할 수 없다.
칠 테면 손바닥으로 제대로 쳐라.’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당당히 주장하는 능동적 행위입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 5,40)
역시 당당한 모습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알몸이 되고 맙니다.
가난한 이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채권자의 탐욕과
부조리한 법정의 민낯을 벌거벗겨 고발하는 것입니다.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마태 5,41)
이 구절은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상황이 배경입니다.
로마 군인은 유다인에게 무거운 짐을
천 걸음 동안 강제로 지고 가게 할 수 있는 징발권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짐을 지고 가면서 속으로 분노를 삭이는 대신,
자발적으로 이천 걸음을 가 주라는 것입니다.
징발의 한계치를 넘어서서 짐을 져줌으로써,
피해자는 힘없는 노예의 자리에서 벗어나 상황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약자의 비굴한 처세술이 아닌,
능동적인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됩니다.
세상 기준이 아닌 주님 기준으로 힘차게 세상을 살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일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0-42) 아멘.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구약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시며,
인간적 정의의 기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윤리를 가르치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탈출 21,24)는
동태 복수법을 억제하기 위한 법적 장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복수 자체를 초월하는 사랑의 길을 제시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 ‘다른 뺨을 돌려대라’ 하신 것은 단순히 악을 참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이기고, 가해자마저 변화시키라는 초대이다.”
(Homilia in Matthaeum, XVII, 4 요약) 즉,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사랑으로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키려는 능동적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이 가르침을 당신 몸으로 실현하셨다.
채찍에 어깨를 내어주셨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도 저주하지 않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먼저 당신 자신이 원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De sermone Domini in monte, I,19,58 재구성)
그분은 단순히 이상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삶과 죽음을 통해 완성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겉옷까지 내주어라.”(40절)라고 하신 말씀은
물질적 소유를 넘어,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더 깊은 차원의 ‘옷’을 가리킨다.
교부들은 이것을 ‘세례로 입는 새 인간’(에페 4,24)으로 해석한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주석한다.
“육신의 옷을 잃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움의 옷, 곧 그리스도를 잃는다면
우리는 가장 큰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Commentarium in Matthaeum 요약)
교회는 이 구절을 단순한 윤리적 교훈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하는 초대로 해석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그것은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함으로써만,
우리가 인간적인 보복 본능을 넘어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다.”
(1825, 1965, 2842-2845항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더 나은 의로움’(마태 5,20)을 요구한다.
세상은 여전히 힘과 보복의 논리로 움직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용서와 자비의 논리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악을 참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명령하신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오직 사랑과 자비뿐이다.
우리가 성령의 은총 안에서 ‘다른 뺨을 내어주는 용기’를 낼 때,
세상은 조금씩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생활 성가 대회’가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나는 꽃이야’와 ‘감사해’가 공동체 안에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많은 교우가 함께 무대에 올라 하느님을 찬양했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가 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올해는 ‘인생’이라는 노래가 1등을 차지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교우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길고 길었던 겨울
봄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견뎌내고 보니 어느덧 봄이더라.
숨 막히게 더운 여름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참아내고 나니 어느새 가을이더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움
등불 같은 친구 곁에 있었고
멀고 먼 길 홀로 걸을 때
누군가 내 손잡고 함께 걸으니
걸어온 길 돌아보니
나의 이야기 남아있고
빛바랜 기억과 흘린 눈물
우리의 인생이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움
등불 같은 친구 곁에 있었고
멀고 먼 길 홀로 걸을 때
누군가 내 손잡고 함께 걸으니
걸어갈 길, 눈 들어보니
까마득해 보이지만
새겨질 발자국 하늘빛 미소
우리의 은총이라
이것 인생이라.”
고된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추억과 기억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사업이 사람을 잘못 만나서 쫄딱 망했던 기억,
공부 잘해서 의대에 갔던 아들이 지독한 스트레스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던 기억, 푸른 꿈을 안고 왔는데
아들은 평생 투석해야 하고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엄마는 혈액암으로
긴 투병을 해야 했던 기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어린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 성공하여 웃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죽을 줄만 알았던 아들이 건강을 회복하여
지금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투석하는 아들도 좋은 직장을 얻었고,
암 투병 중이지만,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들과 딸을 선물로 보내 주셨고,
지금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래 가사처럼 등불 같은 친구가 있었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했었다고 합니다.
35년 저의 사제 생활을 돌아보면
‘인생’의 가사처럼 추운 겨울도, 무더웠던 여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험난함의 길목마다 저를 지켜 주셨고, 좋은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사제 생활 첫해에 ‘유행성 출혈열’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덕분에 인생은 하루만 살아도 ‘흑자’요, 인생은 ‘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으로 갔을 때는
큰 본당으로 갔던 동창 신부님이 부럽기도 했지만
돌아보니, 그 삼 년이 제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딱 맞는 성당을 맡겨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신문사에서 의욕적으로 홍보를 시작했을 때입니다.
미국 서부와 캐나다 밴쿠버까지 특강과 신문 홍보를
한 달 반 일정으로 야심차게 기획했습니다.
제 앞에도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게 했습니다.
덕분에 코로나 팬데믹 동안에 좋은 신부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주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라는
잠언의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합왕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봇의 포도밭을 탐합니다.
결국 악한 방법으로 그것을 빼앗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성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실패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봇은 억울하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그의 억울함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라.”
이 말씀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 되갚고 싶어집니다.
억울하면 똑같이 갚아 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악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본능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를 살린 것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였고,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었으며,
우리의 계산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하느님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세상은 “되갚아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노래 가사처럼 우리의 인생은 눈물과 기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고,
앞으로의 길에도 그 손길은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이 고백처럼, 우리가 악을 선으로 이기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보다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이 말씀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켜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라는 말에 대해서,
“악인에게 천벌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아니면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로마 13,4)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악행과 범죄를 당했을 때,
그 일의 심판과 처벌을 사법제도에 맡기는 것은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경찰과 사법부와 교도소는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이고,
하느님의 뜻을 집행하는 제도입니다.
2)
그런데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할 때
사법제도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침 제1독서에 왕비 이제벨의 악행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 자리에 앉히시오.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1열왕 21,9-11)
바로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나봇에게 가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왕비 이제벨과 원로들과 귀족들과 불량배들이 모두 한 통속이 되어서,
아무 잘못도 없고 힘도 없는 나봇을 죽인 그 일은,
사랑과 자비보다 ‘선과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셔서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셨습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1열왕 21,23)
나중에 왕비 이제벨은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2열왕 9,30-37)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나봇처럼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는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데, 가해자의 힘이 너무 커서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2-23)
그 일과 비슷한 일이 바오로 사도에게도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사도 23,1-3)
만일에 악행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 침묵 때문에 더 큰 악행이 계속 저질러진다면?
과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겉옷까지 내주고, 이천 걸음을 가 주는 것은,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일,
즉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회개시키기는커녕 악을 더 큰 악으로 키우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악행에 동조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루카 17,3ㄴ)
꾸짖어야 할 때 꾸짖는 것도 선과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뺨을 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에 대해서,
“가르침과 행동이 다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자체가 다른 뺨마저 돌려대신 일이고,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은,
그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사제를 꾸짖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때에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기쁨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사랑대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악인이란 어떤 악인인지
맞선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말하는 악인이
내게 악한 짓을 하는 악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인이요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악한 짓을 하는 악인이라면
그런 악인도 맞서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신 다음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네 왼뺨마저 돌려대라고 하셨지,
다른 사람의 뺨을 칠 때 내버려 두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도
남이 아니라 내게 재판을 거는 사람에게,
내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갑절로 해주라고 하신 것이지요.
이것은 보통의 우리와 다른 태도입니다.
우리는 보통 남에게 악한 짓을 할 때는 눈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내게 악한 짓을 하면 길길이 날뛰며 맞대응하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악행은 끔찍한 짓인데도
내 일이 아니니까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면서
내게 한 것은 악행도 아니고
그저 내가 싫어하는 행위를 할 뿐인데도
우리는 그 사람을 싫어하고,
싫어하기에 나쁜 놈이라고 하고 악인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므로 내게 악한 짓을 하거나
내가 악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짓을 할 때
맞서지 말라는 것은
그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라는 것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대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대인(大人)은 사랑의 대인입니다.
싫은 것도 사랑하는 대인이요,
그러니 싫은 사람도 사랑하는 대인이요,
정말로 악행을 내게 저질러도 사랑하는 대인이요,
악행도 보통 악행이 아니라 보통 사람은 그로 인해 불행케 되는,
그 정도의 악행을 내게 저질러도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사랑하는 대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게 대한 악행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악인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 이상으로 대인입니다.
엄마는 자식과 맞서지 않고,
엄마의 사랑은 자식의 어떤 악행도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이요,
적어도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말라는 것임을
깨닫고 실천하려는 우리입니다.
보복의 포기, 비폭력적 사랑의 저항
“악인에 맞서지 마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오늘 복음 환호송이 우리 삶의 참 귀한 지침이 됩니다.
주님 말씀의 빛이 우리 무지의 어둠을 밝힙니다.
무지의 탐욕, 무지의 폭력, 무지의 보복, 무지의 잔인함,
참으로 무지의 해악이 끝이 없습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반복되는 무지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제1독서를 요약한 말마디가 충격적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마디입니다.
무지의 악에 희생된 나봇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나약한 아합왕이요
그의 아내 이제벨의 잔인함이 거침없이 표현됩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이 나봇은 죽음을 당합니다.
흡사 세례자 요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의 죽음을,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연상하게 됩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억울한 이들의 죽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참으로 늘 무지의 악에 대한 경각심을 지녀야 함을 배웁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요약한 말마디입니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무저항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악인에게 일일이 맞대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지혜에서 나온 처방입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악이 바라는 대로 보복의 악순환,
폭력의 악순환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습니다.
어떻게?
적극적 비폭력적 사랑의 저항입니다.
참으로 상생의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악인도 살고 나도 사는 일입니다.
악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선 안 됩니다.
악을 무장해제하여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약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정말 내적으로 강한 이들이요 인간 존엄을 지키는 이들이니
바로 다음 주님이 주시는 삶의 가르침입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않는 참으로 큰 지혜, 큰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대우大愚인 듯하지만, 대지大智의 사람들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악을 무장해제 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일이요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相生의 길입니다.
오래전 바닷가를 거닐다가
문득 발견한 <바위섬>을 보며 쓴 시가 생각납니다.
“바위섬을 배우라
대응하지도 반응하지도 지키지도 않는다
비바람 파도에 고스란히 내어 맡겨 깎이고 닦여
자기완성에 이르지 않았는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기완성에!”<1997.11.10.>
온갖 풍상고초를 견뎌내고 버텨낸 성자聖者를 상징하는 바위섬입니다.
29년 전 시가 감동으로 와 닿습니다.
흡사 오래된 고목에서도 이런 성자의 품위를 배웁니다.
어디를 가든 우선 찾아보는 것이 감동을 주는 바위와 노목老木입니다.
<나무로 살고 싶구나>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예나 이제나 제 나무 사랑은 여전합니다.
“나 나씨였다면
이름은 무조건 무無였을 것이다
성명은 나무無,
나없어 무아無我이니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
나무처럼 넉넉하고 편안하게
늙어가면 얼마나 좋으랴!
나무처럼 싱그러운 마음 향기라면
나무 나이테처럼
영혼의 나이테 신비 그윽한
무늬와 결에 색깔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지날 때 마다 한 가슴 가득 안아 보는
늘 봐도 늘 좋은 나무야!
나 나무로 살고 싶구나”<1999.2.28>
바위섬이, 노목이 상징하는바 성자 같은 참 어른입니다.
악을 무장 해제시켜 무력하게 만드는 대우이자 대지의 어른들입니다.
참으로 악이 바라는 바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을
단斷, 끊는 참 좋은 처방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비폭력적 사랑의 저항입니다.
오늘날의 국내외 현실이나 우리 서로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벗어날 길도 참 요원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늘 가르침이 답을 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
이런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비폭력적 사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새삼 오늘 영성체송 시편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빼앗긴 포도밭과 돌려댄 뺨
최 빠코미오 수사
1. 탐욕의 자리와 소유의 비극
사마리아 임금 아합은 왕궁 곁에 있는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탐냅니다.
정원을 만들고 싶다는 권력자의 가벼운 욕망은
조상 대대로 이어온 상속 재산을 지키려는 한 인간의 신앙적 고백과 충돌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 재산을
임금님께 넘겨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1열왕 21,3)라는
나봇의 거절은 결국 피비린내 나는 음모를 부릅니다.
왕비 이제벨은 거짓 재판을 꾸며 나봇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고 그 포도밭을 강탈합니다.
세속적인 소유욕과 집착이 어떻게 인간을 파멸로 이끌고
무고한 피를 흘리게 만드는지 성경은 엄숙하게 증언합니다.
세상의 논리는 이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타인을 짓밟고,
받은 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되갚아 주는 보복의 연쇄 속에 묶여 있습니다.
2. 겸손의 고개와 능동적 인내
예수님께서는 이 잔인한 인과율의 세상 한복판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이 파격적인 말씀은 힘이 없어 굴복하라는 수동적인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성 베네딕도는 이 구절을
역경과 차별 대우 앞에서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겸손의 넷째 단계'를 실천하는 핵심 근거로 삼았습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역시 영적 성숙을 갈망하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으뜸가는 실천 지침으로 건넸습니다.
뺨을 돌려대고 겉옷까지 내어주는 행위는
본능적인 분노와 자존심을 온전히 내려놓고,
악을 선으로 갚음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가장 적극적이고 영웅적인 사랑의 증거입니다.
3. 십자가의 완덕과 은총의 길
나봇의 포도밭 사건이 보여주는 세상의 불의와 탐욕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반복됩니다.
억울한 모욕을 당할 때, 부당한 요구에 직면할 때
우리의 본능은
아합처럼 분노하거나 똑같이 맞서 싸우기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불의 앞에서도 십자가 위에서 침묵과 온유함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능동적으로 모방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계산과 세속적인 집착을 비워낼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일 하시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고단함과 신앙적 고뇌 속에서도
보복의 논리를 거부하고, 끝없는 인내와 용서로써
주님의 계명을 채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연중 시기에 들어오면서
삼위일체 대축일을 통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바라봤습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와
강생구속의 신비를 묵상하였다면
이제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변화하게 됩니다
그 변화는 이렇습니다.
1독서에서 말하듯,
하느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구해낸 것을 기억하는 만큼
하느님을 따르는 백성은 거룩한 민족이 되어
세상과 하느님을 연결시키게 됩니다.
자연히 거룩한 민족이 되어 선민의식에 빠지기보다는
자신들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믿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세상을 복음화 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깨달은 만큼 가능합니다.
나약함으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면
그분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었고 화해를 이룬 이들이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로 초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느끼고 체험한 만큼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고,
그분을 더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내가 원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듯
하느님께서 군중을 보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랑은 받은 이들이
아직 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도와주길 바라셨고
하느님이 이끌어 주신 많은 영혼을
이미 하느님 안에 있는 이들이 초대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가 대단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먼저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고 사랑받았기에
그들은 길 잃은 양들을 초대하러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용기를 내어 나아가야 합니다.
거저 받은 사랑을 거저 주는 선행을 통해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 사랑으로 채워지고
그 사랑의 향기를 이웃에게 전하며,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