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1열왕 21,17-29
복 음 : 마태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율법의 핵심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도,
인간이 그 계명의 뜻을 축소하여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라고
암묵적으로 해석한 부분을 정면으로 깨뜨리십니다.
본디 레위기의 문맥은
원수를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웃’의 범위를 ‘친구’로, ‘자기 사람’으로 점점 좁혀 왔지요.
그러면 사랑은 이해관계에 따른 윤리가 되어
그 이해관계에서 밀려난 사람을 배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라는 낱말을
민족이나 정치의 범주로 제한하시지 않고,
개인의 삶에서 나를 적대시하는 존재 전체로 확장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기도는 악과 원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압도’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의 바탕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품으신 선의에서 찾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분의 차별 없는 자비가 곧 하늘 나라의 질서입니다.
세리나 이방인도 자기편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제자는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나옵니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는 흠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선의가 친구와 자기 사람을 넘어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경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하느님을 닮습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을 최초로 오른 사람은
1953년 정상을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정말로 정상에 올랐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정상 도착을 증명한 사진에는 에드먼드 힐러리가 아닌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각종 인터뷰에서 ‘함께’ 정상에 올랐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에드먼드 힐러리의 사진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의심했습니다.
이 의문이 점점 커지자, 에드먼드 힐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메라 작동법을 알려주기에 에베레스트 정상은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텐징이 카메라를 다루지 못했기에 힐러리가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텐징만 사진에 남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지고 있는 사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과연 누가 찍어줬는지를 생각합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진에 있는 사람만을 기억합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을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사진을 남긴 결정적인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삶 안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없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우리를 돕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그런 사랑을 우리 역시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3.44)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웃의 범위를 자기 민족, 같은 교파로 좁히고,
이방인이나 적대자들은 하느님의 원수이므로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한적인 사랑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성품을 닮은 진짜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태 5,45 참조).
주님의 자녀는 하느님을 닮아서 끼리끼리의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자기가 받을 보답이나 상대방의 태도에 좌우되지 않는
주도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빛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십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지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9-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절정을 제시하신다.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이 계명은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드러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이 말씀은 우선 원수를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그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Enarrationes in Psalmos, 109, 4 요약)
즉, 증오는 상대방보다 나 자신을 먼저 병들게 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증오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기도는 그분이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신 실천이었다.
초대 순교자 스테파노도 같은 사랑을 드러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고 기도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가리켜
“스테파노는 말로만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닮았다.”
(Homilia in Acta Apostolorum, XVII 참조)라고 평가한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성 아타나시오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태양은 차별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은혜도 그러하다.
그 빛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일 뿐이다.”(Orationes contra Arianos, II, 67 요약)
따라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절대적 완전성에 도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완전성을 닮으라는 것이다.
교리서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랑은 모든 덕의 원천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성이다.”(1827항)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선택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 속에서 은총의 가능성이 열린다.
원수를 사랑할 때, 우리는 단순히 더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생활 성가 대회’를 준비하면서 친교 분과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작년보다 참가팀이 적었습니다.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취소하고, 내년에 하자는 의견과
참가팀이 비록 적어도 연습한 시간이 있으니 계속 진행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는 참가팀이 적어도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대신에 본당 성가대에서 찬조 출연하고,
본당 밴드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정했습니다.
결과는 좋았습니다.
제일 먼저 성가대가 멋진 화음으로 생활 성가 대회를 열었습니다.
참가팀은 4팀이었습니다.
벤저민 팀이 출연했습니다.
6살 이하의 어린아이 30명이 출연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팔방미인 팀이 출연했습니다.
바이올린, 오보에, 피아노, 플롯, 기타와 4가족의 합창이 이루어졌습니다.
평소에 반 모임을 꾸준히 하던 분들입니다.
울림 중창단 팀이 출연했습니다.
두 달 전에 본당에 음악 교실이 시작되었는데
거기에서 공부하던 분들이 팀을 만들었습니다.
끝으로 자작곡 ‘주님은 나의 사랑’을 준비한 형제님이 출연했습니다.
참가팀이 4팀이라 모두에게 상을 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에게 하였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
저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참가팀을 보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
내년에는 저도 부주임신부님과 수녀님으로 한 팀을 만들어 찬조 출연하려고 합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지켜왔던 원칙이며, 질서입니다.
동양도, 서양도, 종교도 이런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그래야만 약한 사람도 존중받을 수 있고, 강한 사람은 겸손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켜놓고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는 사람에게는 결자해지를 이야기합니다.
공상과 망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뿌리지 않고 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필귀정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연과 업보의 결과
다시 말해 인과응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자해지,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인류가 지켜왔던 삶의 원칙과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원칙과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이고,
이것이 우리가 따르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옳고 그름의 인연을 끊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나눔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인터넷 서점을 방문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았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땅에 떨어진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제가 돈을 주고 사서 읽으면 저는 책 속에 있는 보물을 얻게 됩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쉴 수 있듯이
제가 읽은 책은 저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서점에서 2개의 보물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다른 하나는 ‘트렌드 2026’입니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의 표징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찾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을 넘어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서도,
나를 시기하는 사람에게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기 전에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습니다.(창세 3,21)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카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그에게 표를 찍어 주셨습니다.(창세 4,15)
그 일들은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좋은 예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시는 것은,
죄인들도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1-23)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32)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주시는 것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했음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그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요한 13,1-20)
배반자 유다도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으신 채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배반자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도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왜 회개하지 않고 떠나버렸을까?
마음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 자체가 완전히 식어버리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사랑하는 것도 거부하고
사랑받는 것도 거부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데,
그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선택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묵상할 때,
사랑을 실천하는 입장에서만 묵상할 때가 많은데,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도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여전히 똑같이 사랑하신다.
이웃들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답은, 회개와 보속, 그리고 사랑 실천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원수 같은 존재가 된 적이 없다.”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과 ‘아닌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 성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회개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실제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원수처럼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 그 이웃이 원수 같은 나에게
사랑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실천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는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인 유대인을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마리아인이 베풀어 준 사랑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 사랑을 고마워한다면,
자기에게 사랑을 준 사마리아인에게만 보답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해야 옳지 않은가?>
3)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친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쌓아 놓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지금 우리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 높은 벽들을 없애라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처럼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원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차가 있을 겁니다.
대개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게 소중한 이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상해를 입힌 사람을 가리키지요.
하지만 이념과 사상이 달라서
서로 맞서고 대적하는 이들을 원수의 범주에 넣기도 합니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1열왕 21,20)
제1독서에서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외칩니다.
엘리야는 나봇의 일로 분노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아합 임금 앞에 섰지요.
아합은 무장을 하지도 않고 폭력을 쓸 이유도 없는 엘리야를
왜 원수라 부를까요?
원수의 범위에는 사사건건 나를 공격하고 상처 입히는 이들은 물론,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도 포함됩니다.
내 생각이나 계획과 대립각을 세우고 엇나가는 이,
내 어둠과 죄악에 대해 직언을 하는 이,
결국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도 넓게 보면 적이고 원수일 수 있습니다.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1열왕 21,27).
나봇에게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상응하는 징벌을 내리시리라는 예언자의 전언에
아합은 당장 태도를 바꿉니다.
옷을 찢고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을 하는 것은 회개와 참회의 전형적 행동입니다.
바라 마지않던 포도원을 차지한 기개 따위는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합 임금이 원수라 칭할 정도로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인 엘리야의 말을 들었다는 점이고,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원수라 여겼던 존재에게서
자기 성장의 단서를 발견했다고 한다면 너무 거창할까요...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1열왕 21,29).
결국 하느님은 자신을 낮춘 아합 임금의 태도를 보시고
내리시려던 벌을 유예하십니다. 그 태도에서 통회의 마음을 보신 겁니다.
나봇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하면
당장 두 쪽을 내어 처단해도 시원찮을 악인이지만,
아합 역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이지요.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예수님의 자상한 당부입니다.
우리가 당장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에게 집착해
하느님 자녀라는 본질을 놓치지 않길 바라시는 마음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 실존을 잘 아시는 그분은
원수 사랑이 감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모르시지 않기에 우격다짐하듯 강요하지는 않으시지요.
그저 너희 아버지처럼,
너희가 사랑하고 또 너희를 사랑하는
그 아버지처럼 되어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구분하고 나눠서 일부분만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사랑입니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치우침 없는 사랑,
나를 낮추고 너를 높이는 사랑,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은 편애와 집착이고 자기애와 욕정, 애욕과 과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혹 원수로 여겨지는 이가 있습니까?
그이 때문에 힘드시죠?
그를 포함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뜨겁고 진실하게, 담백하고 순수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보려 애써 봅시다.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아버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아멘.
우리 인간의 궁극의 평생 과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을 길이길이 의지하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바위이시다.”(이사26,4)
어제 우리는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서 돌에 맞아 죽은,
참으로 억울한 나봇의 충격적 죽음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합의 탐욕과 이제벨의 잔인한 처사에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악인의 절정을 목격했습니다.
정말 천인공노할 완전범죄였고 도저히 인간이라 할 수 없을 경우였습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범죄는 없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를 통한 아합과 이제벨에 대한
의노義怒하시는 하느님의 심판 예고가 참 엄중합니다.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게서 잘라 버리겠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아합이 뉘우치자 주님은 일시 재앙을 보류하지만
후대에 재앙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겪는 시련이나 어려움은
죄에 대한 보속일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겸손히 배우고 비우는 계기로 삼을 때 전화위복의 축복일 것입니다.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후회해도, 뉘우쳐도 늦었습니다.
이들이 후대에 받을 죄과의 보속이 참 엄중합니다.
아합과 이제벨은 그대로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참으로 고귀하고 존엄한 인생을
절대로 이런 악인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래서 오늘 복음의 가르침이 참 고맙습니다.
참으로 천사와 악마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가능성으로의 인간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평소 제 지론이 생각납니다.
“인생광야여정에서 인간에게는 세 가능성이 존재한다.
‘성인이 되느냐, 폐인이 되느냐, 괴물이 되느냐 셋 중 하나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 되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 괴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자하는 구도자들에게
삶은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배움의 여정, 성화의 여정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한번뿐이 없는 소중한 인생
하느님을 닮아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대변한 예수님의 인간에 기대 수준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에 대한 결정적 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늘 아버지의 우리 인간에 대한 기대 수준이 참 높습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에 평생과제가 부과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하늘 아버지를 닮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명령입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책임이자 의무 사항임을 깨닫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닮아
거룩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셋 인듯하나 실은 하나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이요 완전한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둥글둥글 온전한 사람,
바로 원만圓滿하고 원숙圓熟한 사람입니다.
바로 다음 <배>와 <원숙圓熟>이란 시가 그 전모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어쩜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꽃도 아름답지만 열매는 더 아름답다
화사한 꽃도 좋지만
성숙한 열매의 그윽한 향기는 더 좋다
긴 안거동안 봉투 안
어둠속에 숨어 커오던 배 형제들!
마침내 인고의 세월 지나
가을 해제 때 되니
봉투는 저절로 터지고
둥글둥글 황금빛 찬란한
열매 얼굴로 환히 드러냈다
나는 들었다,
침묵 중에 터져 나오는
환희의 오도송悟道頌!
태양도 배 자식들이
마냥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가을 햇살
환히 내리 쏟고 있었다”<1998.9.5.>
지금서야 나누는 놀랍게도 28년 전, 제 나이 50세 때 작품입니다.
둥글둥글 탐스럽게 익어가는 배 열매들이
고맙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 저절로 탄생된
<배>시詩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대로 성화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어 <원숙圓熟>이란 자작시입니다.
“가을 열매들은 태양의 자식들
호박, 배, 사과....
태양을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
사람도 사랑으로 익어 열매되면
얼굴도 마음도 글도 말도 행동도
하늘 아버지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1998.9.10.>
*시작노트;
둥근 태양 아래 둥글둥글(圓) 황금빛 얼굴로 찬란하게 익어가는(熟)
배 열매들을 보고 원숙圓熟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 아버지가 기대하는 당신을 닮은 완전한 사람은
태양의 자식들인 배 열매들처럼
잘 익어 온전하고 원숙한 모습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바로 앞서의 주님의 복음 말씀이 답을 줍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예수님이 말씀이 정답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내 눈에 원수요 박해자이지 하느님 눈에는 다를 수도 있고,
원수와 박해자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답은 아가페 사랑과 기도뿐이요 하늘 아버지께 맡겨드리는 것뿐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우리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하십니다.
결코 값싼 은총이 없듯이 값싼 하늘 아버지의 자녀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모두에게 차별 없이 공평무사公平無私,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늘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 희망,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하늘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믿음, 희망, 사랑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자랑이듯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각이 철저할 때
아합이나 이제벨 같은 괴물의 출현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폭포수 같은 말씀도
우리의 일체의 변명이나 핑계를 봉쇄합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한다.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한다.”
마치 취미가 같은 동호회처럼
우리의 유유상종 끼리끼리의 이기적 폐쇄적 사랑을
참으로 부끄럽게 합니다.
이웃 모두에게 차별 없이, 경계 없이
활짝 열려 있는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바로 이타적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 사랑을 닮아가는
우리의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최종 평생과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아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승화 시몬 신부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는
작은 감정선들이 모여서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그 중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감정선이
바로 분노와 미움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마음의 힘이 다르기에
분노를 하는 정도는 다릅니다.
그러나 한번 분노가 타오르면
그 분노는 옆으로 퍼져나가면서 분노의 고리를 만듭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분노의 고리를 끊어지지 않습니다.
정당한 분노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하더라도 선을 지키지 않으면
분노는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집어 삼키게 되어
복수의 형태로 계속 이어져갑니다.
자연히 공동체는 흩어지게 되고
사람은 서로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영혼이 분노의 고리에 매이는 것을 막고
자기 영혼을 지키기 위한 방법입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움을 넘어 사랑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분노의 감정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