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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6.06.17|조회수28 목록 댓글 1

2026617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1독서 : 2열왕 2,1.6-14

복 음 : 마태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경고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여기서 의로움은 단순히 도덕적인 품행을 뜻하지 않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의로움이 하느님을 향한 길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무대로 어떻게 바뀌는지를 꿰뚫어 보십니다.

인간은 늘 인정 욕구에 목마르고

그 욕구를 채우고자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제법 있지요.

 

유다 사회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을 향한 경건한 삶을 가다듬어 왔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들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고 끊임없이 가르치고는 하였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선행이 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될 때,

하늘의 상급은 사라지고 땅의 인정만 남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지 마라.”(6,2)라는 말씀은 과장이면서도 정확한 풍자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은 과장된 자기 연출의 유혹과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선자는 그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면을 쓰고 경건함과 올바름을 연기하는 사람이며,

종교 행위나 교회 제도로 자신의 삶과 명예를 챙기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향하여 서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사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합니다.

기도는 회당의 중심이 아니라, 집 안 가장 깊은 방에서 홀로 시작됩니다.

단식은 인정받거나 혜택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며 삶에서

조용히 하느님을 찾는 행위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서 세상의 그 무엇이 그리 가치 있겠습니까.

사람과 세상 눈치를 보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결과일 것입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소원은 빛이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존경하던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학교 들어가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이 길은 빛이 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끝없는 절제와 희생이 요구되었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제는 때로는 비난과 욕설을 들어야 했고,

사제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눈길도 받아야 했습니다.

 

사제가 됨이 그리 빛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의 능력과 믿음의 부족으로 인해 더 빛날 수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고민을 선배에게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배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빛나야 할 분은 주님뿐이야. 따라서 신부는 빛이 안 나도 괜찮아.

하지만 따뜻해야 해. 그래야 주님의 빛이 꺼지지 않아.”

 

이런 마음으로 28년째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빛이 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을 들어도

당연하지. 나는 빛이 나지 않는 존재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따뜻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려 했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과 저와의 관계를 가깝게 하려 했습니다.

빛나지 않아도 이 길을 산다는 것 자체가 행복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행위 자체를 부정하시지 않습니다.

, 신앙생활의 초점이 하느님의 시선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과 평판으로 향하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은

하느님과 무관한 자기 과시에 불과함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선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단식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은 분명 그들 앞에 자기를 빛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빛날 수 없습니다.

대신 세상에 하느님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따뜻한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시선을 따르는 삶이 되고,

이런 삶을 통해서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여전히 '의로움'의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기도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곤 했습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그럴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향하여 있음'이 중요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세 번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4; 6; 18)

 

사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광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광고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저는 어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천사는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말고,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숨어계신 당신 앞에 늘 머무르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올바른 자선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외형적인 행위보다 마음의 자세,

즉 내적 정직과 겸손을 강조하신다.

자선과 기도, 단식 등 신앙생활의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속에서 행해져야 참된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1)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대해 말한다.

참된 자선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De Sermonibus Domini in Monte, 1,5 참조)

, 오른손과 왼손의 비유는 우리 마음의 이중성을 보여 준다.

오른손(의로운 마음)은 왼손(세상의 눈)에 알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칭찬을 받기 위해 자선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적 계산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선행이 아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골방에서 조용히, 하느님께만 향하는 기도여야 한다.(6) 바오로 사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라고 권고한다.

기도는 단순한 말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의 친밀한 교류이며,

천사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하늘의 경배와 일치를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의 진실이다.

겉으로 행한 기도는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Homiliae in Matthaeum, 19,4 요약)

 

예수님께서는 단식할 때도 남들에게 보이려 꾸미지 말라고 하신다.(16-18절 참조)

얼굴을 찌푸리고 연민을 자극하는 단식은 자신을 높이려는 행위일 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단식이 아니다.

교리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도, 자선, 단식은 외적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마음의 정직으로 하느님께 드려질 때 참된 가치가 있다.”(1969항 참조)

 

나는 자선을 행할 때 하느님의 시선을 먼저 의식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의 칭찬을 의식하는가?

나의 기도는 단순한 의무감과 반복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의 친교를 향하고 있는가?

겉으로는 의로운 척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자랑이나 계산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모든 선행은 하느님께서 아시는 마음과 의도에 달려 있다.

참된 열매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속에서 맺어진다.

우리가 수행하는 신앙의 행위, 즉 자선, 기도, 단식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가치가 있다.

겸손과 마음의 정직 속에서 행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원한 상급을 쌓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때 서부영화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황야의 무법자’, ‘장고와 같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내용도 인상적이었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특유의 음악입니다.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황야를 가르는 휘파람 소리,

그리고 긴장감 속에서 울려 퍼지는 기타 선율은

서부영화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시대는 폭력이 많았고, 총으로 문제를 해결하던 거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은 있었습니다.

결투하면 서로 등을 맞대고 일곱 걸음을 걸어간 뒤에 총을 뽑았습니다.

여섯 걸음 만에 먼저 총을 쏘면 비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마을에도 암묵적인 질서가 있었습니다.

어른을 만나면 인사해야 했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했으며,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런 최소한의 양심과 체면은 남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에도 규칙이 있었습니다.

선전포고하고, 민간인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국제적인 약속이 있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규칙이 자주 깨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지켜야 할 명분과 체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그런 최소한의 체면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을 하고, 민간인 시설을 폭격하며,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는데도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현실을 봅니다.

국제사회에 명분을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힘이 정의인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치 영화 속 암수와 비수가 난무하는 세상 같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숨기지 않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원했습니다.

돈을 주겠다고 했고, 다른 포도원을 주겠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거짓 재판을 꾸며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다윗도 충실한 부하 우리야의 아내를 탐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합왕과 다윗이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말을 통해서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하느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유다는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자,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적어도 죄를 죄로 아는 마음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대는 더 무서운 것 같습니다.

잘못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고도 당당합니다. 욕심과 탐욕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예전에는 위선과 가식이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위선조차 사라지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종교 행위를 강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진실한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기도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선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은 겉모습이 아니라 진실함의 문제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그런 시대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습니다.

아합왕의 거짓과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한 사람만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사가 뒤를 잇게 하셨고,

아모스와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을 계속 보내 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하며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 많은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역사는 한 사람의 마라톤이 아니라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성인과 성녀들만의 신앙이 아니라,

이름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신앙인들이 함께 이어가는 역사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전하고, 신앙의 선배가 후배에게 믿음을 전하며,

공동체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거창한 능력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정직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마음입니다.

단식과 기도와 자선도

결국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점점 냉혹해질수록

우리는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점점 거짓되어 갈수록

우리는 더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힘과 욕망만을 말할수록

우리는 양심과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를 진리와 사랑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처음부터, 즉 신앙인이 될 때부터,

위선자가 되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처음에는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을 텐데,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에 익숙해지고,

그러다가 점점 더 그 칭찬과 존경에 취해서 그것만 바라게 되고,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물론 칭찬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쪽에서는 대부분 진심으로 그렇게 하겠지만,

또 위선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더 잘하라고 그렇게 하겠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나쁜 결과로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에 중독되어서

위선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칭찬과 존경은

사탄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6)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누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나 되는 듯이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행동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 자신에게는 자랑거리라 하여도

남에게는 자랑거리가 못 될 것입니다.”(갈라 6,3-4)

 

<바리사이들이 처음부터 위선자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신앙의 순수성을 추구한 사람들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존경에 취하고,

그러다가 서서히 위선자들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모든 바리사이들이 다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고,

그들 가운데에는 진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지만

진실했던 신앙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필리 3,5-6)>

 

2)

칭찬과 존경에 취해서 위선자가 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위선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예가, 갈라티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케파가(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우리가 성인으로 존경하는 사도들도

위선에 빠진 일이 있었다는 것은,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위험한 함정입니다.>

 

3)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감추면

하느님의 눈에도 안 보일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착각이 곧바로 위선으로 이어집니다.

 

<내 눈에 하느님이 안 보이니, 하느님의 눈에도

내가 하는 일과 내 생각이 안 보일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되는 것.>

 

예수님께서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신 것은,

그 착각에서 벗어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 분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0,30)

 

우리는 늘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

지금 이 행동은, 또 이 생각은 위선인가, 아닌가?”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누가 위선자라고 비난하면 화부터 냅니다.

 

나는 절대로 위선자가 아니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성직자든 수도자든 일반 신자든 간에 예외는 없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을

""에 비추어 가늠해 보도록 초대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수행 방식인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대해 말씀하시며,

사람들에게 영광 받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해 강조하십니다.

 

타인의 봄, 즉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며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아무리 길게 바치고 많이 희사하고 철저히 절제해도

위선에 불과하다는 걸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갈망하는 바가 곧 사랑하는 바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갈망하는 자가 동시에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어렵지요.

타인의 눈과 칭찬과 영광에 취하면 매사를 그들 평가에 맡기게 되고,

지향의 순수성보다 돌아오는 칭찬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게 됩니다.

이제 수행은 더 이상 수행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마태 6,4.6.17)

 

숨어서 드리는 기도, 남모르게 베푸는 자선,

드러내지 않는 단식은 아버지의 "", 그분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이고,

자선은 하느님 사랑이 흐르는 곳으로 동행함이며,

단식은 하느님을 더 담아 충만해지려는 자기 비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타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하느님과 나와의 내밀한 통교입니다.

 

1독서는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예언직 승계 장면입니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2열왕 2,9)

 

엘리야가 떠나기 전 엘리사는 스승님 영의 두 몫을 청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맏아들이 다른 이들보다 두 배의 상속 재산을 받는 관습이 있지요.

이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엘리야의 영적 상속자로서의 권리를 달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2열왕 2,10).

 

엘리야는 ""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엘리야가 주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엘리사 본인과 주님께 달렸다는 의미 같습니다.

스승의 지상 여정 마지막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본인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맛볼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은 곧 기도, 특별히 관상의 경지를 가리키지요.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2열왕 2,6)

 

""의 첫째 조건입니다.

상대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사랑, 곁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의지이고 열망입니다.

관상기도는 주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쟁취해

거기서 서로에게 친밀히 머무르는 기도입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2열왕 2,11).

 

""의 둘째 조건은 이야기, 곧 말씀입니다.

이 중요한 순간 두 예언자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해

성경에는 별 언급이 없지만 적어도 뒷담화나 심심풀이 한담은 아니었을 테지요.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염려와 자비,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의 소명 등

그들은 더 뜨겁게 말씀 안을 걷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관상하는 이는 엠마오 제자들처럼 말씀이 닿으면 뜨겁게 타오릅니다.

 

""의 셋째 조건은 함께 계속 동행하는 지속성입니다.

관상기도는 잘 되는 것 같으면 열렬히 바치다가

메마름이 오면 손을 놓는 일희일비의 감정놀이가 아닙니다.

 

은총의 희락에 젖을 때나 주님 부재의 무미건조함 속에서도

다름없이 꾸준하고 항구히 동행합니다.

그래서 그는 골방이나 외딴곳을 더욱 사랑합니다.

하느님과 머무르는 충만한 고독을 찾아다니지요.

 

관상하는 이는 하느님의 시선 앞에 자신을 두고,

타인의 시선은 물론 자기 자신의 시선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 앞에 머물러 그분을 봅니다.

사람이 주는 영광과 칭송이 더 이상 그에게 매력이 되지 못하듯,

사람의 비난과 공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어계시는 아버지를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이미 그분은 우리를 보고 계시니 우리는 그분 시선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분 눈에 비치고 그분 마음에 들면 족합니다.

 

그 자체가 그분 사랑 안을 헤엄치는 것이니까요.

사람에게서 오는 대가성 위안들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처럼 "쓰레기"(필리 3,8 참조)에 불과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과 나만의 내밀하고 은밀한 골방에서

""에 취하고 그 사랑에 취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그 골방에서 사랑이 되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것으로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진답니다. 아멘.

 

 

 

 

 

 

 

부풀릴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젊은 시절 돌아보니 저도 참 많이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했습니다.

장상들에게는 모범생 이미지를,

후배들에게는 좋은 선배 이미지를 심기 위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시선에 의존하며 사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과대 포장된 나로 살려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참 피곤했습니다.

이제 조금 나이가 들고 철이 들다보니,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풀릴 일도 없고, 내세울 일도 없으니.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내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놀랍게도 삶이 참 편안해졌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제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임무-자선기도단식-

바람직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명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들의 모습을 배격하라고 크게 강조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허영심과 허세,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했던 부자들은

쥐꼬리만 한 적선을 하면서도, 그것을 크게 떠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예의바르게 자선을 베풀지 않고, 공개된 자리에서,

플랜카드도 크게 내건 다음,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선을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은근히 자신들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치켜세우는 가장 비인간적, 비신앙적인 이벤트를 펼쳤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 앞에 당대 위선자들이 펼쳤던

치졸한 자선의 행태는 차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작은 사랑의 실천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겠습니다.

진실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한다면 이렇게 대응해야겠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종일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 이웃들이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자선을 베풀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선을 베풀려는 상대방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들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부()는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야겠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자선을 우리의 지난 죄를 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보속이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배움의 여정

희망의 표징이 됩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

 

요즘 수도원의 변화가 눈부십니다. 획기적 전환점에 들어선 시점 같습니다.

수도공동체가 역동적이고 활력이 솟는 듯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수도원 기반을 닦았고, 파코미오 수사는 수도원 틀을 놓았고,

새 원장 이사악 수사는 수도원 틀에 내용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엊그제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오전 떠들썩한 소리에 집무실 문을 여니 이사악 새 원장 수사가

허름한 작업복 차림에 젊은 수도형제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나뭇가지들을 쳐내며 정원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공동체 공동노동 울력의 시간이었습니다.

순수와 열정의 젊은 원장 수사가 앞장서 솔선수범하니

젊은 수도형제들도 신나게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저절로 떠오른 생각입니다.

 

, 새 원장이 희망의 표징이 되고 있구나!

이웃이 보고 배울 이웃에 희망의 표징이 되는 것보다 이웃에 더 좋은 선물은 없겠다!”

 

젊은 후배 수도자들이 보고 배우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습니다.

감동에 젖어 조용히 배우는 마음으로 함께 했습니다.

집무실 앞 예쁜 꽃밭은 사라졌지만 하나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간혹 반가운 지인 손님들이 왔다 가면,

우리 원장님입니다!”자랑하는 마음으로 소개했습니다.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자랑하는 것을 보면 저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봅니다.

뒤이어 떠오른 <하늘이 활짝 열렸다>라는 글을 나눕니다.

 

초록색 단풍잎들

가득 하늘을 덮었다

있는 그대로의 초록가지 초록 잎들이 좋고 예뻐

베어내는 건 꿈에도 생각 못했다

 

가지들 쳐내니 하늘이 활짝 열렸다

한 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 구름 푸른 산

마음도 활짝 열려 환하다

 

쳐낸 초록잎가지 꽃병에 꽂으니

참 멋지고 신선하다

늘 봐도 참 좋고 새롭다

꽃꽂이에 비할 바 아니다<2026.6.16.>

 

꽃 대신 초록잎가지 꽃병에 꽂으니

그 정취와 분위기도 색다른 느낌에 마음도 평화롭고 행복했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을 경계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다산>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백번을 하고,

열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을 한다.”<중용>

 

남용이 <백규>구절을 날마다 세 번씩 외우자,

공자가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논어>

 

이런 대단한 노력의 수행자들이라면 희망의 표징이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AI에 대한 답도 이런 노력의 수행뿐이겠습니다.

오늘 말씀도 보고 배울 가르침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인류의 영원한 희망의 표징이 되고

지금까지 열왕기 상권 독서의 주인공이었던 엘리야 예언자 역시

참 좋은 희망의 표징이 된 분입니다.

 

엘리야로부터 바튼을 터치하여 뒤를 잇는 제자 엘리사,

그대로 예언자 엘리야 스승을 따라 평생 충실히 보고 배웠음을 봅니다.

옐리야의 승천을 목격하자,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부르짖었고,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잡고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 어디 계신가?” 강물을 치자

물은 갈라지고 엘리사는 강을 건너니 새로운 장정의 시작입니다.

평생 엘리야 스승을 충실히 보고 배운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노인은 많으나 어른은 없고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는 시대라 개탄합니다만, 쓸데없는 기우입니다.

겸손으로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만나는 스승입니다.

저에게는 몸담고 있는 수도공동체가 평생 배움과 섬김의 위대한 스승이며,

복음의 예수님이야 말로 영원한 스승이자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수행의 핵심을,

참된 영성, 참된 겸손, 참된 관상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들 중심부 안에 그 모범이신 예수님이 자리하고 계심을 봅니다.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을 통해 참된 수행의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일체의 허영이나 위선이 없는 본질적 깊이의,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의 하느님 중심의 진짜 수행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불가의 성철 대선사가 격찬한 복음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를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참으로 매력적인 아름답고 향기로운 수행자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더도 덜도 아닌 나일뿐입니다.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수행, 참된 수행생활의 대원리입니다.

숨겨진 삶의 기쁨을 터득한, 발광체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들인

참된 겸손의 수행자들이야 말로 보고 배울 영원한 희망의 표징들입니다.

어제부터 흰 붉은 자귀나무 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 반가와라

때 되자

1년 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

꿈처럼 피어난

흰 붉은 자귀나무 꽃

늘 향기 맡고 뒤돌아 찾아내는 꽃

언제나 그리움의 향기, 겸손의 향기로 남아 있는

자귀나무 꽃 같은 당신입니다<2008.6>

 

이맘때쯤이며 언제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귀한 손님

자귀나무 꽃, 향기 역시 보고 배울 스승이자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어제 어머니 기일을 맞아 성묘 차 다녀왔습니다.

제 어머니 신 마리아는 자귀나무 꽃같은 분이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웃의 참 좋은 <희망의 표징>이 되어

묵묵히 <배움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굳세게 굳세게 마음들을 가져라.”(시편31,25). 아멘.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은 겸손하게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의 탈을 쓰고

하느님이 주신 사명에 참여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겸손이라는 말을 오염시키고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사람들 사이에 숨어드는 명분으로 삼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살피면

새로운 관점이 열립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남에게 우쭐되기 위함이 아니라

더 좋은 도움의 길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사람들의 시선보다는 하느님을 바라봐야 하고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제가 sns을 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작은 노력이 쌓여 사람들에게 작은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목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선을 넘어서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연예인 병에 걸리거나

마치 대단한 권력을 가진 것처럼 착각한다면

하느님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 동료 사제들을 보면서 늘 경계하고 있죠.

 

신자 여러분들도 그 선을 잘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기쁨으로 신앙을 살고

사랑으로 신앙을 살아가며

하느님 안에서 충만함을 누리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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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17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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