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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6.06.18|조회수44 목록 댓글 1

20266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1독서 : 집회 48,1-14

복 음 : 마태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마태오 복음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6,8)라는 선언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그러니 이는 불안이나 부족함을 달래고 채우려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심을 바탕으로 한 신뢰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6,9)

하느님의 초월성과 아버지로서 친밀함을 동시에 붙드는 고백이자 외침입니다.

이러한 친밀함은 개인에서 시작되지만

저희라는 복수형 표현 안에서 공동체로 확장됩니다.

 

그다음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 중심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6,9)

하느님 스스로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시는

종말론적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도(에제 36,23 참조),

백성이 현재의 삶에서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세를 포함합니다(이사 29,23 참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10)

구약의 야훼 통치 사상을 재해석한 종말론적 청원으로,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게 하소서.”(6,10)

순종의 윤리로, 앞선 두 청원을 더욱 간절히 요청하는 백성의 호소가 됩니다.

 

이어지는 청원들은 인간의 삶을 다룹니다.

일용할 양식(6,11)은 모호한 내일의 잔치가 아닌,

오늘 하루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가리킵니다.

잘못의 용서는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조건이 됨을 강조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6,13)

삶의 시련에 주저앉지 않게 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그리하여 악에서 구해 달라는 마지막 청원이 이어지지요.

결국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 앞에 인간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조용히 봉헌하며 내맡기는 기도가 됩니다.

우리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주님의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인간과 쥐, 누가 더 똑똑할까요?

 

미국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교의

파크리사누 교수 연구팀이 진행한 제비뽑기 실험이 있습니다.

실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가자는 AB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뽑기를 총 200번 진행합니다.

A를 뽑으면 75%의 확률로 1,000원을 벌고,

B를 뽑으면 25%의 확률로 1,000원을 법니다.

물론 참가자는 이 확률을 모른 채로 실험에 참여합니다.

 

참가자는 AB를 선택하며 시행착오를 거치고,

100번쯤 했을 때 A를 뽑으면 B를 뽑았을 때보다

훨씬 더 높은 확률로 보상받는다는 규칙을 눈치 챕니다.

그런데도 대다수가 AB를 왔다 갔다 하며 수익률을 떨어뜨렸습니다.

반면 쥐는 눈치를 채자마자 계속 A만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쥐가 사람보다 12,000원을 더 벌었습니다.

왜 쥐보다 어리석은 판단을 할까요?

 

눈치를 채고서도 자기의 첫 판단을 함부로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판단이 신중한 사고 체계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자기 판단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표징과 말씀만으로 예수님을 향한 이유가 충분한데도,

자기 안의 고정관념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주님의 기도는 단순히 미사 때 암송하기 위한 주문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 하느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양식의 나눔과 용서를 실천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가르침을 주신 이유는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지 못하면서,

대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마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용서에 관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이미 우리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용서는 부족하기만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한 용서, 상대의 보상에 따른 용서를 외치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 이웃을 향해 마음을 닫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기도에 나오듯이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기 삶을 하느님 뜻에 맞추는 영적인 조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치면서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결단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줍니다.

곧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으며,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 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기도는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2765)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 중세 시대로부터 이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를 올바르게 바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다.

단순히 말의 공식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드리는 기도로서,

모든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는 기도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것은,

신자에게 하느님과의 친밀한 자녀 관계를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분을 아들 안에서 믿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De Trinitate, 8,5 재해석)

,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 안에 사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는 단순한 찬미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도록 살아가게 해 달라는 청원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것은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과 삶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20,1 재해석)

, 기도는 삶으로 구현되는 신앙을 요구한다.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라는 청원은

하느님의 정의와 통치가 우리 삶과 세상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이미 하느님의 나라 시민인 우리는,

우리의 내적 순종과 선행을 통해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리서는 주님의 기도를

신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그분의 통치를 따르는 삶으로 인도하는 기도(2816-2827항 참조)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11-12)라는 청원은

하루하루의 삶과 영적 필요를 하느님께 맡기는 겸손한 마음을 나타낸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구절을 해설하며,

양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영적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죄의 용서 청원은 타인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속적으로 회복하려는 의지를 전제한다.(마태 6,14-15 참조)

 

마지막 청원은 우리를 사탄과 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이다.

성 베네딕토는 이를 영적 투쟁의 기도로 보며,

기도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악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제시한다.

우리의 연약함을 하느님께 맡기며,

성령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친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자녀 관계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기도다.

우리가 오늘도 삶을 통해 주님의 기도를 살아가는

참다운 제자가 되도록 힘쓰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반가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의 사제서품 60주년과 문규현 신부님의 사제서품 50주년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형제 사제인 두 분은 서로 다른 길을 걷기보다 오히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오셨습니다.

한 분은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과 함께하면서 옥살이하셨고,

다른 한 분은 임수경 양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 옥살이하셨습니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현장에도, 용산 철거민의 거리 성당에도,

세월호의 팽목항에도 두 분은 늘 약한 이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세상은 편안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은 말보다 삶으로 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기도의 문장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기도는 단순한 암송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아픈 사람들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굶주린 사람의 배고픔과, 외로운 사람의 눈물과,

힘없는 사람의 절망을 함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분, 노 사제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만 바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냈습니다.

 

오늘은 두 분 신부님의 서품 기념을 축하하면서

제가 2009년에 썼던 글의 일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7년 전의 글입니다.

어제, 저녁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규현 신부님께서 단식 도중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문 신부님은 전주교구 신부님이십니다. 이제 나이가 60이 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쾌유하시어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문 신부님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임수경 양과 함께입니다.

남과 북이 분단된 이후,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온 최초의 민간인들이었습니다.

문 신부님은 혼자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올 임수경 양을 생각하였고,

임수경 양이 받아야 할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생각하였고,

착한 목자의 심정으로 임수경 양과 함께 돌아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또 이렇게 썼습니다.

문 신부님은 성령의 관심사를 생각하였습니다.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였고, 불의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이들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들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세상은 힘과 성공과 효율을 이야기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생명과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삶의 가장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민자의 삶도 그렇습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의 벽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웃고 살아도 마음속에는 말 못 할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문장이 아닙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한다면

굶주린 이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기도한다면

미움과 원망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면

내 욕심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 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승의 길이 제자에게 이어집니다.

신앙은 책으로만 이어지지 않습니다. 삶으로 이어집니다.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삶으로 전해지고, 사제의 믿음도 결국 삶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년의 두 사제를 보며 감동하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낮은 자리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사제로 살아오면서 자주 부족함을 느낍니다.

강론은 할 수 있지만 삶으로 증언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때로는 외면하고 싶고, 침묵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다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주님의 기도를 어떻게 살고 있느냐?”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삶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말로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랑과 작은 희생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도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송 영진 모세 신부

 

1)

다른 민족 사람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입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고, 듣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게 바치는 기도는 그 자체로 빈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고,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빈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 ‘믿음 없이입으로만 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만일에 기도를 하면서

기도한다고 이게 될까?”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를 빈말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어떻게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실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고,

당신이 정하신 가장 좋은 때에,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두 번째, ‘실천 없이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실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을 모두 가리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떠넘기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은,

주인이 하인에게 온갖 일을 시키는 것과 같고,

그래서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세 번째, ‘사랑 없이바치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만일에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에는 관심 없이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빈말입니다.

 

네 번째,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고,

바라고 있다면, 그 기도는 빈말이 되고 거짓말이 됩니다.

 

만일에 마음속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심이 가득 차 있다면,

그래서 그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빈말이 되고, ‘거짓말이 됩니다.

 

2)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도

기도를 빈말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날마다 바치는 기도여서 특히 더 그렇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라는 말은,

간절함도 없고 정성도 없다는 뜻인데,

기도에 간절함과 정성이 없으면,

그 기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3)

주님의 기도는 주님과 함께바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전부 다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일들이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것,

아버지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나타내고,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기도에 연결됩니다.(요한 17,20-21)

용서 없이는 일치도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적극적인 회개로 응답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주님께서 다 해 주시는 일은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 쪽의 능동적인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고,

주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기도

기도도 보고 배웁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여,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4)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인간, 인간의 정의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기도입니다.

어디나 기도하라 눈 들면 하늘이고, 하늘보고 기도하고 땅에서 일하라 직립인간입니다.

인간의 영성도 인간의 고귀함도 인간다운 품위도 기도에서 나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바로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소통의 기도가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을 닮은 참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물음인 사람만 있고 답인 하느님이 없으면

인간은 영원한 미궁에서,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나무들이 참 좋은 기도의 모범이자 스승이 됩니다.

수차례 나눴던 수도원 <하늘 길> 산책 때 마다 즐겨 바치는 기도입니다.

 

하늘 님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하늘 길

하늘 향해 쭉쭉 뻗은

하늘의 사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사열 받으며

하늘보고 하늘기운 숨쉬며

하늘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 되어

가슴 펴고 힘차게

하늘 길, 하늘 님, 예수님 따라

나는 듯 걷는다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2026.3. 21>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나무는 땅이 하늘로 쓰는 한편의 시"라 말합니다.

하늘 향한 직립의 나무들 역시 기도하는 사람을 닮았습니다.

오래 전 수도원 성전 창문 밖 바람에 눈부시게 떨리는 나뭇잎들 보며

이맘때쯤 쓴, <기도는 저렇게 하는 거다>란 시도 생각납니다.

 

기도는

저렇게 하는 거다

하늘 안, 하늘 향한 눈부신 떨림

나뭇잎들처럼

성령 충만, 샘솟는 기쁨

초록빛 온 몸, 온 마음으로

하느님 사랑, 하느님 찬미, 하느님 감사

웬만한 병, 다 낫겠다

기도는

저렇게 하는 거다<2010.6. >

 

저절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도 부지런히 배우고 공부해야합니다.

사랑처럼 아무리 배우고 공부해도 <초보자>로 머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날마다 배우고 공부해야할 기도입니다.

바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그 모범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의 사람>인 수도자들에게

<하느님의 일>인 기도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 결 같이 시편 공동전례기도를 성전에서 함께 바칩니다.

베네딕도 규칙서 73장중 1-7장 까지는 영성의 기초에 대하여,

그리고 8-20장까지는 공동전례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옛 현자 다산의 삶의 수칙 <부지런함>은 기도수행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삶의 격을 높이는 것은 지위나 신분이 아니라 부지런함이다.”

어찌하면 뭉툭한 것을 뚫을 수 있는지를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며 거친 것을 연마할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저 역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던 학창시절,

두 어른(정하권 몬시뇰, 김승혜 수녀)

이수철 수사님은 <대단한 노력가>시네요.”

이구동성의 격려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는 온갖 겸손과 순결한 경건심으로 간청해야 할 것이다.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의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 간청이 들어 허락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성규20,2-4>

 

기도뿐 아니라 글도 시도 강론도 행동도 짧고 순수하면 좋습니다.

오늘 복음중 주님의 가르침도 성인과 일치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끊임없이, 한 결 같이 기도하는 까닭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기도하면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마침내 주님의 뜻과 하나 되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필요한 것 하나 하느님만 남을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기도의 대가, 기도의 달인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듯,

그 옛날 엘리사도 기도의 대가이자 달인인 엘리야 스승 예언자로부터

기도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보고 배우며 전수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 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에게는 어떤 일도 어렵지 않았으며, 잠든 후에도 그의 주검은 예언을 하였다.”

 

과연 그 스승 엘리야에 그 제자 엘리사였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말씀하시면서

당대 제자들을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당신의 기도 노하우를 공개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야말로 만고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는 성서의 요약 같은

예수님의 삶과 영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일체의 거품이나 허영, 환상이 배제된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내야 할 단순 소박한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기도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 참사람의 참 나의 실현에 이르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비단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한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결코 주님께 맡겨 드리는 무책임한 일방적 기도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파트너로서 우리의 자발적 기쁨의 협조와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우선 하느님 아버지 중심의 삶이 강조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며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자녀들이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이 잘 드러나고 이뤄지도록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온힘을 다해야함을 배웁니다.

 

이어지는 일상에서 겪게 되는 본질적 청원 넷입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 잘못의 용서와 용서받음, 유혹에 빠지지 않음,

악에서의 구원을 위해 청원과 더불어

우리의 최선을 다한 노력의 협조와 응답도 절대적임을 배웁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새롭게 바치고 새롭게 시작하여

살아내야 할, 선물 같은 하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기도 후에 주님께서 다시 강조하시는 용서입니다.

아버지께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타인의 허물을 먼저 용서하라하십니다.

타인을 용서할 때 비로소 아버지께 용서를 받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우선 내가 다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살고 자유롭기 위해서도 용서는 필수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이래서 미사 중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일용할 양식인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7). 아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이승화 시몬 신부

 

주님의 기도를 묵상하면

2가지 포인트에 주로 머물게 됩니다.

하나는 용서에 대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유혹과 악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다른 부분에 눈에 머물게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부분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이미 시작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인간의 참여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힘과 뜻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할지라도

그 결과를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자세가 될 때

우리가 희망하는 아버지의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바로 여기에서

여기 있는 사람들 안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충실함은 희망을 향한 발걸음이 되고

그 발걸음이 모였을 때

주님의 뜻이 여기에서 이루어짐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 안에서 충실한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침묵 속에 타오르는 횃불

 

최빠코미오 修士

 

1. 빈말을 멈춘 자리에 남는 것

 

예언자 엘리야는 불의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집회서는 그를 두고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라고 전합니다.

하늘을 닫고 세 번이나 불을 내려 보낸 그의 열정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깨우는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뜨거운 예언자 역시 하느님을 깊이 만난 곳은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 불 속이 아니라,

그 모든 폭풍이 지나간 뒤에 들려온 '부드러운 조용한 소리' 속이었습니다.

참된 신앙의 힘은 소란스러운 외침이 아니라 고요한 내면의 울림에서 나옵니다.

 

이 영적 전통을 이어받은 고대 수도승들은 진정한 기도의 힘이

화려한 말재주나 많은 말에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 카시아노와 성 베네딕도 같은 영성가들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습니다.

그들은 오늘 복음에서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횃불처럼 타오르는 신앙은 입술의 수다스러움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서 드리는 짧고 순수한 기도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2. 가난한 이들을 위한 거룩한 생명줄

 

중세 수도원에서는 시편을 중심으로

하루의 시간을 하느님께 바치는 성무일도가 일과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평수사들이나

고단한 노동으로 성가대 기도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 방대한 시편을 다 바칠 수 없었습니다.

교회가 그 가난한 영혼들을 위해

성무일도를 대신하여 바치도록 한 공식적인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 하시며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가장 단순하지만 복음의 모든 본질을 담고 있는 완전한 요약입니다.

글을 몰라도, 책이 없어도, 오직 하느님을 향한 자녀다운 신뢰만 있다면

누구나 하늘 아버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화려한 지식은 없었으나 매일 주님의 기도를 소박하게 반복했던 이들의 삶은,

죽어서도 놀라운 업적을 남긴 엘리사 예언자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되었습니다.

 

3. 매일 아침 깨어나는 자비의 처방전

 

성 베네딕도는 이 주님의 기도를

수도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구체적인 처방전으로 삼았습니다.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다툼과 오해, 마음의 가책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이 상처들이 마음에 굳은살을 만들지 않도록,

매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끝에 공동체의 책임자인 아빠스가

모든 이가 듣는 가운데 주님의 기도를 끝까지 소리 내어 낭송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수도승들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는 구절을 귀로 들으며,

방금 전까지 미워했던 형제를 향해 마음의 빗장을 열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내가 형제를 용서하는 그 좁은 문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옵니다.

복음은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라며

엄중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줍니다.

 

말만 앞서는 이방인들의 기도는 허공을 맴돌 뿐이지만,

마음의 소음을 가라앉힌 고요한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닿습니다.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담백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온전히 바쳐야 하겠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이웃의 나약함을 마음 깊이 용서함으로써,

우리 삶에 하늘 아버지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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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18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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