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제1독서 : 2역대 24,17-25
복 음 : 마태 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어조로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을 들추어내십니다.
“목숨”은 먹고 살아야 하는 구체적 생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안으로 삶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삶에 대한 염려는 삶을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새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삶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새는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 먹이시지요.
여기서 초점은 노동을 부정하며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먹이고 입히는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6,27)라고 물으십니다.
불안과 걱정은 우리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 삶을 소진할 뿐입니다.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제자들은 참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6,33)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이 정확히 알려 줍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신앙은 주어지는 오늘을 건네받는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 삶은 나의 노력이나 걱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는 문제로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 서로가 챙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지는 오늘을 걱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야겠습니다.
적어도 먹고 입는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게 서로 챙기면 좋겠습니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가을이 좋은 계절이라는 뜻일까요?
당연히 가장 좋은 계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어원은 당나라 시인 두심언(杜審言)이 지은 시
‘증조관기(贈趙管記)’에 등장하는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라는 구절에 유래한다고 합니다.
그 뜻은 가을 하늘이 높고 변방의 말이 살이 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좋은 계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시기를 의미합니다.
당나라와 국경을 마주했던 흉노족은 가을만 되면
말을 타고 쳐들어와 곡식을 약탈하고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북방 변방에 사는 당나라 사람들은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가 침략할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결국 ‘가능 하늘이 높고 변방의 말이 살이 찐다’라는 말은
흉노가 쳐들어올 시기가 되었으니 경계하고 대비하라는 말입니다.
그 누가 ‘천고마비’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까요?
하지만 원래는 가장 걱정되는 계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향한 노력이 필요하고,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지혜를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특히 세상을 살아가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느님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온갖 걱정을 하며,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하십니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의 종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섬김에 있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느님과 재물을 적당히 양립시키는 타협을 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물질이 주는 가짜 안정감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걱정하다’라는 말은 ‘마음이 나뉘다, 찢어지다’라는 어원을 가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걱정은 하느님을 향해야 할 신뢰가 세상의 불안으로 인해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흩어진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모으는 방법을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우리 일상의 필요를 무시하고 정당한 노동을 폄하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걱정 없이 기쁘게 사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일까?
어떻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섬기거나, 물질과 재능이나 기능 등의 피조물을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주장이나 자신의 뜻을 섬기지 않고,
‘주님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하는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믿고 섬기는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이나 자기 자신에 속하여 자기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섬기는가 하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정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둘째로, 신앙인은 ‘걱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신앙인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성취나 자신의 편리나 이기, 자신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찾기’를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곧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선사되어 와 있는 것을 찾는 일입니다.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 이미 우리 가운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의 삶을,
두 주인을 삼기지 않으며, 하느님께 의탁하고, 자신을 걱정하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와 의로움을 먼저 찾는 삶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누구를 섬기도 있는가?
참된 주님이신 하느님인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생각이나 물질인가?
혹 그렇게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또 나는 지금 무엇을 근심하고 걱정하고 바라고 있는가?
누구에게 의탁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인가?
진정 나는 모든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분의 의로움을 찾고 있는가?
대체 누구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가?
자신의 기쁨인가?
하느님의 기쁨인가?
주님!
제 생각과 편리, 이기심과 자애심에 떨어져,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 숭배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채우느라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의로움이 저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이 저의 주님이시오니,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신다(24절).
재물은 인간을 종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마음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재물이 마음을 지배할 때,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잃고,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노예가 된다.”(De Civitate Dei, 10,13 요약)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을 두려워하거나 섬기지 말고,
그것을 올바르게 관리할 줄 아는 주인이 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하늘의 새와 들꽃을 예로 들어,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30절)라고 말씀하신다.
자연은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을 보여 주는 거울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자연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을 베푸시려는 신비로운 방법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마련하셨음을 믿는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Homiliae in Matthaeum, 62,1 요약)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가 먼저 하늘의 가치와 의로움을 추구할 때, 필요한 것을 더해 주신다.(33절)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33절)
인간의 궁극적 선은 하느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다.
일상의 필요와 세상의 재물은 부차적이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 충분히 공급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영혼의 구원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인간 활동의 최상 목표이며,
물질적 필요는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충족된다.”(Summa Theologiae, II-II, q.188, a.2 요약)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34절)라는 말씀은
불필요한 미래 걱정을 내려놓고, 현재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초대이다.
마음이 하느님께 향할 때, 우리의 일상적 필요와 영적 필요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재물이나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고
세상의 재물은 종으로 삼는 삶이 신앙인의 삶이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우리 마음과 행동을 조율하라는 신학적·영성적 가르침이다.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늘의 보물과 의를 우선하며,
하느님 안에서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우리가 매 순간, 재물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는 삶을 선택할 때,
모든 필요와 걱정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손안에 맡겨지게 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23년 ‘Chat GPT’가 세상에 나왔을 때입니다.
컴퓨터가 사람과 대화하는 기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복잡한 프로그램을 몰라도 친구와 대화하듯이 질문하면
컴퓨터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제 ‘검색의 시대’가 저물고 ‘대화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인공지능과 함께 어느덧 3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도움을 받은 것은 ‘번역’이었습니다.
한국어 강론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부탁하면 실시간으로 제가 하는 번역보다
더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번역을 보여주었습니다.
교구의 공문이나 영문으로 오는 메일도 실시간으로 번역해 주었습니다.
저는 번역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었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 계획과 일정 정리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여행 계획을 질문하면 교통, 숙박, 장소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사목에도 도움을 받습니다.
성경 말씀을 찾아 주기도 하고, 제가 쓴 글을 요약해 주기도 합니다.
지도 대신 내비게이션, 운전 대신 자율 주행이 있듯이
인공지능은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029년이 되면 ‘에이전트 인공지능’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인공지능이 질문에 응답하는 수준이라면,
앞으로의 인공지능은 ‘비서’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기업의 임원에게는 부속실이 있습니다.
부속실 직원은 임원의 일정을 정리하고 필요한 자료를 준비합니다.
앞으로의 인공지능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병원 예약도 대신해 주고, 건강관리도 도와주고, 은행 업무도 처리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기 마련입니다.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도 있습니다.
개인정보와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기술은 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해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상속에 대해서 미국은 한국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상대적으로 덜 하는 것 같습니다.
잘 키워주고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들도 부모의 재산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독립하면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재산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이민 2세대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재산은 부모님의 것이니 부모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재산을 자녀에게 남길 수도 있고, 기부할 수도 있고, 여행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선택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세상의 재물을 많이 물려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더 귀한 것을 물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부모님께서는 말보다 삶으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부모님은 건강하게 사시다가 하느님의 부르심 속에 선종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봅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신앙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앙 교육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릇과 같습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고,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됩니다.
돈과 성공만 담으면 불안과 경쟁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담으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먼저 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인공지능은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자동차와 좋은 집도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돈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우리 삶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편리함이 커질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많은 정보를 얻을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겨야 할 것은 단지 재산이 아니라 신앙의 유산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붙들어야 할 것도
단지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라는 그릇 안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가장 먼저 담을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을,
하느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이 있다는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재물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그것을 하느님 위치에 올려놓고,
하느님처럼 섬기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재물을 섬긴다는 말은,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 위치에 올려놓고
섬기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신앙생활보다 세속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마치 시간이 날 때 하는 취미생활처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재물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사회생활도 하긴 해야 하는데,
그래도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신앙인으로서 살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2)
“걱정하지 마라.”는, “집착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살다보면 어떤 걱정스러운 일이 생길 때가 있고,
그럴 때에 걱정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걱정이 지나쳐서 숨이 막힐 정도라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우리는 어떤 걱정거리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걱정하더라도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걱정되니까 더욱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걱정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나를 걱정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하며 걱정하는 것을,
눈앞에 놓인 많은 음식들 가운데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는 것과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고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만일에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는 이웃이 옆에 있는데도,
그 이웃을 외면한 채, 음식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3)
26절의 “너희는 그것들(새들)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너희는 솔로몬보다 더 귀하다.”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 왕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 라고
믿는 것이 우리 모두의 믿음입니다.
27절의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라는 말씀과
34절의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야고보서에 있는,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에 연결됩니다.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 나라는 그분의 힘,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걱정의 바탕에 어떤 감정이 존재하는지 묵상해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마실 음료가 없으면 어쩌나?
내 편안한 안식처가 사라지면 어떡하지?
내가 더 나이 들어가면서 병고가 찾아오면 어쩌지?
내가 지금 버티고 있는 무대에서 밀려나면 어쩌나?
결국 우리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 그 가장 근저에는 나란 존재의 소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수시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반드시 쌍으로 붙어 다니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항상 함께 하겠다!
정녕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세상 재물이 사라지는 것,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지상의 평화와 안녕이 붕괴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우리 영혼 구원과 관련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근심과 걱정,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포심이나 불안한 마음과 더불어 찾고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이미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재물 자체를 단죄하거나
의식주의 필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과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특별히 경고하시는 바는
목숨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요 탐욕입니다.
매일의 안정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경제적 기반은 더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침입니다.
미래를 위한 재물의 축척도 어느 정도여야지,
너무 지나칠 때 인간은 재물의 노예가 되고,
언젠가 그 지나친 재물이 오히려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진정으로 추구할 보물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요, 그분의 다스림입니다.
내일에 대한 지나친 근심 걱정을 모두 말끔히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두 손에
우리들 인생을 몽땅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자체 해결해 버리고자 기를 쓰면,
그분께서 활동하실 여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이승화 시몬 신부
명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입니다.
이미 주어진 일상을 깨트리면서까지 추구하는 명분은
자칫 하나의 구호일 뿐 삶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떤 명분을 추구할 때에는
그 명분이 일상을 바꿔야 할 정도로 중요하고 시급한지
또 반드시 필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명분이 좋아보일지라도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께 은총을 가득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을 알지 못하고 인간이 남용하게 된다면
하느님을 스스로 저버린 꼴이 됩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하느님께 돌아가기 위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며
어느새 하느님을 저버리고 나의 뜻을 세우려 합니다.
자연히 주어진 선물과 은총을 상실하며
길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은총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걸어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일과 기도의 균형, 그리고 오늘의 신뢰
최 빠코미오 수사
1. 두 주인의 자리와 무너진 성전
기원전 9세기 남유다의 요아스 임금은
처음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이끌어주던 대사제가 죽자마자
세상의 권력과 재물이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요아스는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며(2역대 24,18 참조),
이를 꾸짖는 예언자마저 성전 뜰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느님을 밀어낸 자리에 재물과 안위라는 우상을 들여놓은 임금의 최후는 참혹했습니다.
외세의 침략으로 모든 보물을 빼앗겼고,
결국 자신의 신하들에게 모반을 당하여 침상에서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2역대 24,25 참조).
이 비극은 인간이 하느님과 세속의 욕망을 함께 섬기려 할 때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2. 세속적 근심의 사슬과 아메림니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역사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실지 걱정하는
일상의 염려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가로막는 영적인 사슬이라는 점을 짚어내십니다.
초기 교회 동방 수도자들은 이 말씀에 따라
'아메림니아', 곧 '세속적 근심이 없는 상태'를 영성 생활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내일을 걱정하느라 온 마음이 세상에 묶여 있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재물에 쏠린 시선을 거두고 내어맡길 때, 비로소 영혼의 평정이 찾아옵니다.
3. 일과 기도의 균형, 그리고 오늘의 신뢰
과거 카르타고의 일부 수도자들은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새와 들의 나리꽃처럼 하느님이 먹여주실 테니
자신들은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겠다고 버틴 것입니다.
이때 성 아우구스티노는 노동을 거부하는 게
의탁이 아니라 게으름임을 지적하며,
땀 흘려 일하는 일상과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올바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땀 흘리되,
그 결과와 미래는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라는 초대입니다.
4. 먼저 구해야 할 하느님의 나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우리의 삶이 늘 불안하고 고단한 이유는
세상의 것들을 하느님보다 먼저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도
솔로몬의 영화보다 아름답게 입히시는 분이십니다(마태 6,30 참조).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불안을 오늘로 당겨와
스스로를 괴롭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자비로우신 손길을 신뢰하며,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도록 온전히 맡겨드리는 영적 자유의 길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