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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6.06.21|조회수32 목록 댓글 1

2026621일 연중 제12주일

1독서 : 예레 20,10-13

2독서 : 로마 5,12-15

복 음 : 마태 10,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26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나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이 말씀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피부에 와 닿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박해와 거절을 실감하는 제자들에게 건넨 말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10,26).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는 말씀은,

비밀을 폭로하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뚫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고통 속에서 배운 말, 상처를 통하여 들은 말은 혼자 듣고서 감내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10,28).

몸은 상처 입고 쓰러질 수 있지만,

하느님 앞에 선 나의 참된 가치에는

감히 인간의 위력이나 억압이 닿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위협보다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더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립니다.

이처럼 값싸게 여겨지는 생명의 죽음조차 하느님의 시선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들조차

하느님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버려지는 것, 잊히는 것,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거침없이 오셨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침묵하게 하지만,

신뢰는 우리 입을 열어 주고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세상을 향하여 끝내 나아갈 것인지.

그 선택이 우리의 슬픔을 다른 빛으로 바꿉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시간대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 연구팀은

5년 동안 노년 부부를 추적·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타인을 도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지지를 제공하는 것이

생존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카네기 멜런대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을 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혈압이 낮고, 염증 수치가 낮고,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느린 것입니다.

기여는 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 급격하게 쇠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운동량이 줄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뇌가 나는 더 이상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한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부나 기여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할 수 없다고 하고,

내 코가 석 자라면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뜻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외면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더불어 이 세상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세상 권력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은 고작 육신의 죽음뿐이고,

그 권력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결단코 손댈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고 하십니다.

영혼과 육신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

즉 영원한 심판권자는 오직 하느님뿐으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올바로 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참새와 머리카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참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 먹는 가장 값싼 고기였습니다.

이렇게 시장에서 헐값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의 생사조차

하느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머리카락은 약 10만 가닥에 이르며,

우리 자신도 몇 개인지 모를 만큼 사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를 다 세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만큼 나를 존귀한 자녀로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는 사람만이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때로는 세상의 위협과 조롱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한 우리 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일까요?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이 더 큰 이득입니다.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예레 20,11)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왜곡을 말해줍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두려워함'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세 번에 반복된 말씀을 중심에 두고 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사도들과 모든 제자에게 주어진

선교 사명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반대 받는 표징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루카 2,34),

박해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항상 동반자처럼 존재해 왔다.

 

1. 예레미야의 상징성과 그리스도인의 소명

 

1독서(예레 20,10-13)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당한 고통과 두려움을 증언한다.

그는 동족으로부터 공포가 사방에 있다!”라는 조롱을 받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지만, 끝내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다.

예레미야의 충실함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고하며,

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운명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2.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반복하신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된다.

우선, 심판 때에의 담대함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된다.(26)

, 진리의 말씀은 결국 드러날 것이므로,

제자들은 세상에서 복음을 지붕 위에서 외쳐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감출 수 없으며,

진리를 감추는 순간 스스로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참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육신만 죽일 수 있지만,

영혼과 육신을 함께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28)

이는 인간 권력보다 더 근본적인 두려움, 곧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일깨운다.

사람의 칼은 육신을 베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영혼과 육신을 함께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칼보다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섭리 안에서 확신을 갖도록 하자.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서 살아간다.

하느님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존재 전체가 아버지 손길 안에 있다는 약속이다.

 

3. 고백과 증언의 책임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박해 앞에서 신앙을 증언할 용기와 순교 신앙의 의미를 드러낸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약속을 믿고 생명을 바쳤다.

교회 헌장도 그리스도인의 증언을 이렇게 가르친다.

교회는 언제나 박해를 당해 왔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교회의 운명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십자가는 부활의 빛을 드러내는 표징이다.”(42)

 

4. 은총이 죄를 압도한다 : (로마 5,12-15)

 

바오로 사도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죄보다 더 큰 것이 은총임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죄의 세력은 인간을 두렵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은 죄를 넘어서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신앙인은 두려움보다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5. 신앙인의 삶에의 적용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위협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과 심판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을 고백하는 용기는 인간적 담대함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에서 비롯된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 이레네오는 말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증언이 된다.

 

6. 맺음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진리는 드러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버지의 섭리가 너희를 붙들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빛 속에서 우리는 담대히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구원과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최근에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참례 인원이 늘어난 것입니다.

제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온 지 2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주일 미사 참례 인원이 700명이 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900명이 넘는 때가 많았고,

지난 부활 대축일에는 1,155명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교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가대 모임에서도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원이 늘어서 연습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새로운 성가를 배우고 싶은데 연습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교포 사목의 현실은 점점 고령화되고, 봉사자는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본당은 오히려 봉사자가 늘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고, 교우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입니다.

 

감사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성당 경계를 이루던 나무 몇 그루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봉사자들이 나와서 퇴비를 뿌리고,

죽은 나무를 뽑아내고, 다시 새 나무를 심었습니다.

예전에 마징가 제트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나타나서 도와주던 정의의 로봇이었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그런 형제님들이 계십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묵묵히 나타나서 땀 흘리며 봉사하는 분들입니다.

지난 Mother’s Day를 앞두고

형제님들은 어머니들을 위해서 맛있는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형제님들이 모여서 고기를 썰었고, 정성껏 구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님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성모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참 아름답구나.’라고 생각합니다.

 

30년 전인 1996년입니다. 봉성체를 가면 만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 갔다 오다가 넘어졌는데,

그것이 큰 병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점점 근육이 약해져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첫영성체를 하고 성체를 모시면서 늘 기뻐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친구는 어느 날 제게 짧은 시 한 편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그 시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몸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맑고 따뜻했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본당도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당 청소를 하는 분들,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분들,

주차 안내를 하는 분들, 성가대로 봉사하는 분들,

힘든 교우를 위로하는 분들, 말없이 헌금하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수많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도 있었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박해를 받았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고향을 떠나 깊은 산속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사제를 만나기 어려웠고, 미사를 드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이유는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훌륭한 제도 때문만도 아닙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별처럼 빛나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함과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을 맡겼습니다.

시련은 예레미야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굳건한 믿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두려운 일이 많습니다.

오해받을 때도 있고, 손해 보는 일도 있고, 외로운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지는 십자가라면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힘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흘리는 땀방울입니다. 묵묵히 감당하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교회는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없이 봉사하고, 기쁘게 나누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욱 빛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송 영진 모세 신부

 

1)

26절의 말씀을 앞의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에 연결하면,

26절은,

누가 진짜로 하느님 편이고, 누가 사탄 편인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심판의 날이 되면 사탄과 그것의 추종자들은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 편에 선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해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26절을 27절에 연결하면,

26절의 뜻은

너희가 복음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몫이 없다.”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박해를 받는 일이 생겨도 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하는 활동이고,

이미 확정되어 있는 하느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탄 편에 서 있는 자들의 박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7절의 내가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활동을 가리키고,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제자들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서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셨지만,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가라고 파견하셨습니다.(마르 16,15)

 

2)

여기서 두려워하지 마라.”,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무서운 일을 만나면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데,

무서워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무서워도 참고 견디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믿음, 희망, 간절함의 차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두려움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3-4)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 대한 사명감으로

두려움을 참고 견뎠고, 그런 그를 성령께서 도와주셨습니다.

 

28절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영혼의 멸망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3)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지켜주신다.”라는 뜻인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참새보다 더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금보다 더귀하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1베드 1,7)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선교활동과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하느님께서 전부 다 세세하게 알고 계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니까 힘든 일을 만나도 기죽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을 열심히 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를 구원할 것이다.”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이라는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이 연상되는데,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

두려워하지 마라, 믿으라, 증언하라, 찬양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저의 기도가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은총의 때이옵니다.”(시편69,14)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이 좋은 격려와 깨우침이 됩니다.

 

먼저 목표에 도달한 사람과 나란히 서라.

그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다산>

순임금의 모범에 비해, 나는 아직도 시골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근심이 깊으니 어찌 해야 할까?

그저 순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소학>

장인인 작업장에 있음으로써 일을 이루고,

군자는 배움으로써 도를 이룬다.”<논어>

 

참 신앙인이 되기 위해 한결같은 배움과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직원을 위한

교황의 연설 중 한대목도 마음에 남습니다.

 

폭력과 날카로운 수사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참 평화의 장인(artisan)이 되십시오’,

즉 무장하지 않고 무장 해제시키며, 겸손하고 인내하며,

사람들 사이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십시오.”

 

이웃을 위한 참 좋은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어제 고향 친구가 <구암리카페> 제 고향집에서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 시 보내준 노인들이 되어 함께 어울린

무장해제 된 사진 속 모습들이 참 정답고 푸근했습니다.

<젊은이만 꽃인가 노인도 꽃이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득 떠오른 <저렇게 사는 거다>란 옛 자작시였습니다.

 

저렇게 사는 거다

함께 어울려!

인위와 무위, 자연과 문명의 조화는 어디쯤일까?

 

뽑고 뽑아도 줄기차게 솟아나는 잡초들

아예 더불어 살도록 내버려 두니 잔디밭이 잡초 밭이 되었다

저렇게 사는 거다, 자연이 좋다

 

제 각기 제 모습 제 색깔로 함께 어울려 사는 거다

잔디밭이 어디 따로 있나? 잡초가 어디 있나?

다 고유의 이런저런 모습으로 곱게 폈다지는 풀꽃들이 아닌가?

 

볼수록 평화롭고 새롭기가 무궁무진, 하느님도 웃으신다

젊은이만 꽃인가 노인도 꽃이다, 꽃향기보다 더 좋은 열매의 향기!

저렇게 사는 거다, 하느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다.”<2007.6. >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함께 어울려 평화롭게 사십시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용기있게 두려움을 떨쳐내고

주님의 빛이 되어 평화의 삶 자체로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위에서 선포하여라.”

 

주님은 거푸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만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정말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믿을 때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탓할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입니다.

믿음도 표현하고 증언해야 합니다.

믿음도 성장하라고 믿음의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믿음의 증언입니다. 주님을 증언함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도 굳세어집니다.

바로 사도 바오로가,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증언은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사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우리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예레미야의 주님 증언도 감동적입니다.

그의 믿음이 얼마나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렸는지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간절한 기도로 주님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예레미야의 놀라운 믿음입니다.

주님 증언은 주님 찬양과 더불어 절정에 도달하고

예레미야의 주님과 믿음의 일치는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에레미야 예언자처럼 주님 찬양으로 끝나는

찬양의 선포, 찬양의 증언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이겠는지요!

이런 증언의 삶과 더불어 믿음은 깊어지고

이런 믿음의 빛은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참으로 멋진, 품위 있고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을 원하십니까?

 

1.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만 두려워하십시오.

2. 주님을 믿으십시오.

3. 주님을 증언하십시오.

4.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한 결 같이 이렇게 주님 사랑으로 살 때

날로 깊어지는 믿음과 더불어 선사되는 주님의 참 평화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시편69,17). 아멘.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승화 시몬 신부

 

열정이 많을수록

실수를 많이 하게 됩니다.

앞을 보고 달리는 사람은 자기 몸에 생기는 생채기를 못 보고

때로는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녹여버리거나

뜨거움에 화상을 입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숭고한 가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들은

내적으로도 유혹이 다가오고

외적으로도 유혹이 다가옵니다.

이 유혹을 어떻게 인내하고 나아가느냐는

그 사람이 체험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가진 열정을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을 방해하기 위해서 걸림돌을 두기도 합니다.

그 사람에게 시기 질투를 느끼며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라보는 희망이 무엇인지를 보기보다

그 사람 자체를 공격하면서 좌절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야 지금 여기에 순응하고 사는 자기 자신이

편안해 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부에서 오는 유혹은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맞는 길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가기에 흔들리고

내가 잘못 알거나 체험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러한 의심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세상에 가득한 죄와 죄책감에 동참하며

이 정도는 괜찮겠지 라는 마음이 커지며

어느 순간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믿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처음 만난 하느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내가 점점 깨닫게 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지금 내가 나아가는 희망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과거를 성찰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아 믿음을 키우고

미래를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키우고

현재를 살아가며 하느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세 기둥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 여정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혹 앞에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동시에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안다고 증언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셨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약속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통해 약속에 대한 희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증언할 수 있길 바랍니다.

내외적으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유혹을 앞두고

믿음의 방패와 희망의 투구와 사랑의 갑옷을 두르고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담긴 사랑의 열정이 꺼지지 않고

하느님을 향하며 이웃에게 따스함을 전해주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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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21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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