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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2026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작성자vero|작성시간26.06.22|조회수34 목록 댓글 1

20266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1독서 : 2열왕 17,5-8.13-15.18

복 음 : 마태 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이 명령은 산상 설교에서 걱정하지 마라.”(6,25)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걱정이 미래를 향한 불안이라면,

심판은 다른 이를 향한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심판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크리노

법정의 판결보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하여

성급히 결론 내리는 가벼운 태도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심판을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행위로 보고 꾸짖습니다(4,11-12 참조).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고대 유다 전승에도

사람이 헤아린 그 잣대로 그 또한 헤아림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판의 저울이 인간의 손에 있는 듯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그 저울을 가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심판하는 그 잣대는 사실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추어냅니다.

심판의 시작은 나의 밖을 겨누지만, 그 끝은 결국 제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티와 들보의 비유는

남을 판단하는 우리의 옹졸함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교정하는 자의 어설픈 폭력성을 향합니다.

훈계는 사랑의 행위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훈계는 다른 이에게 폭력이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이르십니다.

다른 이의 흠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자기 안의 갈라진 틈은 어둠 속에 숨기는 것이 우리의 민낯이지요.

다른 이를 판단하고 심판할수록 우리의 어둠은 더욱 짙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의 어둠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일깨우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형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잘 알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생각나는 유머가 있습니다.

이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답은 내 빤스 어디 있지?”라고 해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진짜 로댕이 그런 의도로 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의 자세는 너무나 불편합니다.

오른팔을 꺾어 턱을 괴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오른 팔꿈치를 왼쪽 무릎 위에 올리는 것도 너무 불편합니다.

한 번 이 자세를 취해 보십시오.

아마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기 힘들 것입니다.

로댕은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작품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불편한 생각을 불편한 자세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설명을 들으니 이 작품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알수록 새롭게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알려는 노력보다 그냥 자기 뜻이 하느님의 뜻인 양 쉽게 판단하고,

그 뜻을 가지고 나의 이웃을 함부로 판단, 단죄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하느님께서 원하실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여기서 심판한다는 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정당한 비판이나 판단 능력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상대방의 동기나 영혼의 상태까지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단정 짓고, 그를 단죄하는 교만한 태도를 금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라고 하십니다.

 

타인을 향해 들이대는 그 엄격하고 냉혹한 잣대가

결국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재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타인에게 자비가 없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바르게 돕고 교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자기의 죄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보다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이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 죄를 바로잡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마지막 구절에서 보여주듯이,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데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다른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마태 18,15-16)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1티모 5,20 참조)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단지 남을 심판하지 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하시면서,

자신의 죄를 먼저 보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이웃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난하고 심판하면서,

자신의 큰 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에 대한 꾸짖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4)

 

또한 단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고 하십니다.

그래야 심판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보는 대체 어떻게 빼낼 수 가 있을까?

그것은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하느님의 눈과 마음'을 지니는 것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호의와 자비의 마음’,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입니다(마태 7,5 참조).

 

그렇습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넘어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그보다 적극적으로 호의로 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카복음의 병행구문에서 '용서'를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결국 심판을 넘어서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

심판을 벗어나는 길임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아멘.

 

 

 

 

 

 

 

남을 심판하지 마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인간은 종종 선입견, 제한된 정보, 감정적 판단에 따라 타인을 평가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

이는 심판이 오직 하느님의 고유 권한임을 명확히 보여 준다.

인간이 내리는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에 있는 티와 자기 눈의 들보(3-5)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티는 작은 잘못이나 사소한 흠이며, 들보는 자신의 큰 잘못이나 죄악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소한 잘못을 쉽게 판단할 때,

사실은 자신의 큰 잘못을 보지 못하는 위선에 빠진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죄를 직시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작은 죄를 꾸짖는 자는,

스스로 정의를 행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영혼을 해치는 죄를 짓는 것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30,1 요약)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큰 잘못을 제거한 후에야

다른 이를 돕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자세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결함을 깨닫고 정화함으로써,

이웃에게 올바른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성찰은 단순히 자기반성을 넘어서 영적 성장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먼저 자기 마음을 정화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바로잡을 수 없으며,

먼저 자기 영혼을 돌보는 이만이 형제를 사랑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

(Homiliae in Matthaeum, 33,2 요약)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은 겸손과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삶과 영혼을 돌보는 일에 힘쓰고,

그 후에 주변 사람들을 진심 어린 관심으로 돕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5)라는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자기 성찰과 겸손한 사랑을 통해 참된 영적 성숙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준다.

타인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고 정화하며,

겸손과 사랑으로 이웃에게 도움과 격려를 해주는 삶이

바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 것이다.

우리 모두, 자기 마음속 들보를 먼저 제거하고,

그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의 작은 티도 올바르게 도와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운이 좋다.” 혹은 운이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기회를 얻고, 뜻밖의 도움을 받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을 말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운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운은 찾아옵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행운은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걷고, 또 걷고, 사람들이 함께 다니면서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작은 오솔길이 되고, 큰 신작로가 되고, 마침내 고속도로가 됩니다.

 

신앙의 길도 그렇습니다.

사랑과 희생, 용서와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신앙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길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적지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몸소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라는 혹독한 시간을 겪었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성전을 잃었고, 자유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왕을 원망했고, 시대를 탓했고, 심지어 하느님까지 원망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예배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은 무너졌고, 희망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배의 시간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성찰의 시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상을 따르며 세상의 욕심에 흔들렸음을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비록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느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눈물의 자리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목적지 하나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은 과정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릅니다.

서울에 있어도, 달라스에 있어도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아플 때도, 기쁠 때도, 외로울 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도착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는가입니다.

저는 신학생 때 산악반 활동을 했습니다. 산행을 가면 저는 늘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먼저 가서 텐트를 쳐야 했고, 식사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돌로미테 산행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산장에 도착했고, 누구보다 먼저 쉼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들꽃의 향기를 맡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뒤처지는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형제님 한 분은 달랐습니다.

지친 사람의 짐을 대신 들어주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산 아래까지 내려가 약을 사 왔습니다.

저 역시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 난처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형제님은 아무 불평 없이 저와 함께 산 아래까지 내려가

새 신발을 사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해 다른 산장으로 옮겨야 할 때도 기꺼이 자원했습니다.

 

그 형제님에게 산장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이 이미 목적지였습니다.

걷다 보면 산장은 나오기 마련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성공이라는 산장에 가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명예와 권력이라는 산장만 바라보며 앞만 보고 걷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도 보지 못하고,

뒤처진 사람의 손도 잡아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지적할 때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밉니다.

그러나 나머지 손가락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신앙의 길은 남을 판단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는 길입니다.

원망과 비난 속에서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이미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 때로는 험하고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서로 손을 잡아주고, 기다려 주고, 함께 걸어간다면

그 길은 이미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성공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목적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걷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길 위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가 바로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3-5)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요한 8,7.9)

 

하느님의 뜻은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입니다(요한 3,17).

 

만일에 죄인 자신이 끝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심판을 받고 멸망하겠지만,

그 심판과 멸망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여자를 붙잡아 끌고 오긴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떠나간 사람들은

그래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4,4)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12)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1요한 5,16-17)

 

<이 말에서 죽을죄

죄인 자신이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4)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6.17)

 

죄 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형제애 실천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파문하라는 뜻인데, ‘파문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파문당한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들입니다.

 

형제애 실천함께 가는 일입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형제와 함께 가기 위해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들보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주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일 뿐이고,

누구의 눈에 무엇이 있는지, 즉 누구의 죄가 더 큰 죄인지,

그것은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들보라는 표현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말씀은,

너나 잘해라.”가 아니라, “너부터 잘해라.”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이 먼저할 일인데,

내가 회개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랑 없는 일, 이기적인 일이 됩니다.

 

우리는 함께 회개해서,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 다음에는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어라.”로 읽어야 합니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일을

모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순서는 나의 회개가 먼저입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래전 학생 수도자들을 양성 책임자로 살 때였습니다.

당시 공동체에는 신학교와 신학원에 다니던 젊은 형제들로 북적였습니다.

당시 젊은 형제들은 막 운전면허를 취득한 초보운전자들이었는데,

소년원이며 분류 심사원, 법원 등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접촉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속, 신호 위반 등으로 딱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보들이니 그러려니 했었는데, 한번은 일주일 사이에 세 장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날을 잡아, 모두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했습니다.

 

우리가 수도자로서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데다 과도한 지출을 한다는 것,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제발 시간 넉넉하게 출발하고, 양보 운전, 방어 운전 잘하면서

앞으로 제발 딱지 안 날아오도록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공동체 분위기가 싸해졌겠지요.

다들 어색한 침묵 속에 저녁 식사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조심하겠지 했는데,

바로 그 다음 날 또 하나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는 제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뜯어보니 과속에 신호 위반에 법칙금이 7만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또 이렇게 날아오는구나, 하는 마음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습니다.

범인이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날짜와 시간, 장소를 확인해보니, 범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황급히 수녀원 새벽 미사를 가던 중에 찍힌 것입니다.

저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은행에 가서 범칙금을 납부했습니다.

지난 시절 돌아보니, 그런 부끄러운 케이스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니 그 시절,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실수에는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내 부족이나 실수 앞에는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참 인간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이승화 시몬 신부

 

율법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가이드와 같습니다.

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가 있으면

더 많은 정보를 통해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죠.

그러나 가이드에게만 붙어 있으면

여행의 재미는 반감됩니다.

 

틀에 박힌 세상을 보고 올 뿐

그 여행지의 맛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없죠.

안정성은 있지만 생동감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면서

동시에 가이드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율법도 그렇습니다.

율법의 생동감을 잊고 율법에 매인다면

목을 뻣뻣하게 된 이스라엘의 조상들처럼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그런 유혹에 빠지는 것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처럼

율법의 도움을 받되 율법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러 해야 합니다.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기보다

먼저 나를 살피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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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22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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