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제1독서 : 2열왕 19,9ㄴ-11.14-21.31-35ㄱ.36
복 음 : 마태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오늘의 묵상
박 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 전체를 거꾸로 비추는 거울의 구실을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짧은 접속사는 앞서 말한
모든 요구, 분노와 보복의 중단, 원수사랑 등을
하나의 문장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오늘 복음은 이 문장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7,12)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그 정신의 확장에 가깝습니다.
이미 있는 도덕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 가르침을 다른 이들을 향한 무한한 관계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황금률은 인류의 여러 전통 속에서 되풀이되어 온 윤리적 경구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 사이의 단순한 계산을 넘어섭니다.
이 말은 ‘다른 이의 자리에 서 보라.’는 요청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방식이 아니라 시선의 이동이지요.
사실 서로를 향한 윤리는 언제나 관점의 문제를 불러옵니다.
황금률은 나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자리를 떠나,
다른 이의 상처가 보이는 자리로 옮겨 가 보라고 재촉합니다.
그 이동이야말로 산상 설교가 요구하는 핵심이자 실체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른 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황금률이 말하는 바는 다른 이를 나와 같다고 단순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다름을 인정하며, 그 다름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라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이 규범은 자기 수양의 기술이 아니라,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 때로는 행복과 기쁨 앞에 멈추어 서서
그의 삶에 머물러 보는 열린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인간적 격언이라기보다,
다른 이를 통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초월의 자리입니다.
그 초월의 끝에는 하느님께서 꼭 함께하실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청소년 자모회 어머니들이 주방에서
아이들을 위해 스파게티를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양파를 열심히 썰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십니다.
양파를 썰며 생긴 화학 반응으로 자극성 기체가 만들어져 눈이 매운 것입니다.
옆에 약간 떨어져 있었던 저 역시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
바로 앞에서 양파를 써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런데 눈물을 흘리면서도 칼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계속 칼질을 해야 나중에 바라던 결과인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눈이 맵다고 양파 써는 것을 포기하고 양파를 넣지 않으면
당연히 스파게티의 맛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맛있는 스파게티를 위해, 또 아이들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면서
눈물을 쏟으면서도 양파를 썰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과 함께하는 길에 항상 기쁨과 행복이 충만할까요?
이 길에 갈등도 또 아픔과 상처도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통과 시련이 있다고
곧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한다면 어떨까요?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없고, 나중에 얻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눈물을 흘리며 노력해서 우리 자신 안에 거룩한 불을 지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흔히 황금률이라 하는
가장 위대한 윤리적 가르침을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당시 유다교의 랍비들이나 동양의 공자 등 많은 사람이
“네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소극적인 형태의 윤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적극적인 선행과 사랑의 명령으로 뒤집으십니다.
즉,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 머무는 무관심을 넘어서,
자기가 위로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그 마음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행하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마태 7,13)
넓은 문, 널찍한 길은 세상의 가치관, 안락함, 그래서 다수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이기심과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좁은 문, 비좁은 길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들어갈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하셔서일까요?
아닙니다.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로는
결코 통과할 수 없는, 철저한 자기 비움이 요구되는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 비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문이고 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한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또 불편한 이 문과 길을 선택할 용기가 있나요?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2,14)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도,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이요,
나아가서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세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의 비유’입니다.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 맺는 나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6절)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우리의 신앙, 지혜, 그리고 영적인 가치들을 상징한다.
진리를 전할 때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신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우리의 영적 선물은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12절)
이 황금률은 율법과 예언서 전체의 정신을 요약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책임을 실천하는 지침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남에게 베푸는 선은 그저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 성숙을 완성하는 계단이다.”
즉, 사랑의 실천은 자신을 단련하고 하느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좁은 문과 좁은 길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편안하고 쉬운 길을 찾지만,
참된 생명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겸손과 온유, 희생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여기서 좁은 길이 편하다고 하신 의미는,
은총 안에서 주님의 계명을 기쁘게 따르는 자에게는
그 길이 부담이 아니라,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남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공정, 사랑, 용서, 자비를 실천할 때, 또한 좁은 길,
즉 주님의 계명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 가르침은 적용된다.
직장, 가족, 공동체에서 상대방에게 바라는 마음으로 행동하며,
은총의 길을 좁지만 기쁘게 걷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를 가르친다.
신앙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무분별하게 주지 말고,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사랑과 선을 실천하며,
좁은 길로 주님을 따라 걸으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뜻 안에서
사랑과 겸손으로 자신을 단련하며,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저는 성격이 조금 급한 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배울 때도
기초를 차분히 익히기보다는 빨리 결과를 얻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영어를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
원래는 기초 영문법부터 차근차근 익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빨리 실력을 얻고 싶어서 곧바로 ‘성문종합영어’를 펼쳤습니다.
문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려운 독해를 하려 했으니
당연히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운동도 비슷했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도 초급 코스에서 기본자세를 익혀야 했는데,
저는 처음부터 중급 코스로 올라갔습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위험한 순간도 많았습니다.
피아노도 그랬습니다.
손가락 연습은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빨리 노래를 연주하고 싶었습니다.
몇 곡은 흉내 낼 수 있었지만
조금만 어려운 곡이 나오면 더 이상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삶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의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조급한 마음으로 고치를 억지로 열어버리면
날지 못하는 나비가 나온다고 합니다.
기다림과 훈련의 시간은 어쩌면 좁은 문과도 같습니다.
답답하고 느리게 느껴지지만, 그 시간을 통과해야만 진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람들은 넓은 문을 좋아합니다. 쉽고 편한 길을 좋아합니다.
빨리 성공하는 길, 빨리 돈을 버는 길, 빨리 인정받는 길을 좋아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가지라고 말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더 빨리 경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무엇입니까?
희생의 문입니다.
양보의 문입니다.
기다림의 문입니다.
이해와 용서의 문입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다면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넓은 문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더 큰 집, 더 많은 소비, 더 편리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바벨탑은 끝없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문을 통해서 들어온 것도 있습니다.
환경오염이 들어왔습니다.
생태계의 파괴가 들어왔습니다.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이 들어왔습니다.
풍요로운 세상 뒤에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도 있었고,
난민들의 고통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결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연대와 협력의 길입니다.
혼자만 잘 사는 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지하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에는 언제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먼저 물을 부어야 큰물이 올라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먼저 사랑해야 사랑이 돌아옵니다. 먼저 용서해야 용서를 받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좁은 문은 먼저 내가 한 걸음 양보하는 문입니다. 저 내가 희생하는 문입니다.
먼저 내가 이해하려는 문입니다.
좁은 문은 처음에는 불편해 보입니다. 느리고 답답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문을 통과한 사람만이 생명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욕심과 경쟁의 넓은 문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나눔의 좁은 문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좁은 문 끝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과 평화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송 영진 모세 신부
1)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느님의 말씀, 복음, 성사’ 등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인데,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15장에 있는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하느님의 은총을 우상 숭배자에게 줄 수 없다.”이고,
여자의 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말은,
“제가 우상 숭배자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만 믿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자기가 숭배하는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과 똑같은 마음과 태도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우상 위치로 끌어내린 것과 같은
신성 모독죄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고,
곧바로 우상 숭배를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성사를 집전하지 않는 것은,
자녀들의 빵을 개들에게 주면 안 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2)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스스로 개, 돼지가 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미신을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개, 돼지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죄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큰 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3)
12절의 ‘황금률’은 앞의 1절에 있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라는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이기도 하고,
뒤의 22장 37절-40절에 있는 ‘가장 큰 두 계명’을
하나로 압축한 계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황금률’의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를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 주어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말씀은,
“너희는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은 하늘나라의 문이 실제로 좁다는 뜻이 아니라,
세속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재미없고,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들의 생활이 재미있고, 편하고, 쉬운 생활이라고 주장하고,
또 자기들처럼 생활하라고 신앙인들을 유혹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탄의 유혹입니다.
“왜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좀 더 편하고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힘들고 어려운 길로만 가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말렸다가
크게 혼난 일이 좋은 예가 됩니다.(마태 16,21-23)
충실한 신앙인들에게 신앙생활은,
세속적인 재미는 없지만 영적인 기쁨이 충만한 생활입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오 복음 7장 13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이며 친지, 세상의 부귀영화 다 버리고
깊고 깊은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자들의 삐쩍 마른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초췌한 얼굴, 그러나 깨달음의 기쁨에 빛나는 얼굴!
세상에 살던 그들은 어느 순간 느꼈을 것입니다.
갖은 유혹거리들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한가운데 있다가는
평생 헤매도 진리를 못 찾겠구나, 일생일대의 깊은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
그들은 결연히 세상을 등지고 혈혈단신으로
아무도 없는 깊은 사막 어두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선택과 집중이었습니다.
진리 중의 진리이신 하느님을 보다 더 잘 파악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
하느님의 말씀의 핵심을 깨닫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었겠지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에너지의 99퍼센트를 기도와 묵상에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1퍼센트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그러니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의 포기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니는 맛 집이며, 골프 투어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사막에서의 단독 수도 생활의 필수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섭생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묵상에 묵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취미가 단식이요, 특기가 고행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극단적 선택과 집중의 결과가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고 단 것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그들은 이제 하산할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 소중한 깨우침을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과 함께 사막을 걸어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보다 큰 선이요 아름다움이요
절대적 가치관이신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옛날 사막의 교부들처럼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사막으로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매일의 삶 안에서도 사막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매일 매 순간 ‘좁은 문’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일상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 시대 참된 영성가들은 바로 이 선택과 집중을 잘 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좋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빨리 오라고 우리를 손짓합니다.
TV나 컴퓨터를 켜면 즉시 이거 사라 저거 사라 외치는데,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꼭 필요한 물건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영성가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필요한 많은 것들 가운데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
그것이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든 일을 다 할 수도 없고 다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영성입니다.
자신이 꼭 서 있을 자리에 반드시, 그것도 항상, 기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남이 내게 바라는 대로 해 주라는 주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바라는 것은 뭔지 그것도 성찰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찰해 보니 제가 바라는 것이 분명 있을 텐데
뭘 바라며 사는지 언제부터인지 성찰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반성이 먼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성찰해 보니 이것저것 바라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뒤집으며 ‘바라는 것 오직 하나!’가 아니었음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좋은 평가 곧 칭찬도 받고 싶고,
위로와 격려와 지지도 받고 싶고,
사랑과 용서도 받고 싶고 좋다는 것은 다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남이 해주기를 바라면 되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남이 다 해주면 이 세상에서 행복은 하겠지만
그것에 만족하고 안주하여 오직 하나이신 하느님을 바라지 않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면 오직 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이라는 시편 노래를 부를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 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선이신 하느님 대신에 온갖 좋은 것을 다 바라는 저는
당연히 그 반대되는 싫은 것들과 십자가가 제게는 없기를 바라며 살겠지요.
그러니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따르라는,
자기마저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그 주님을 제가 따르겠습니까?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겠습니까?
그러니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는데
주옥같은 말씀을 주님께서 주셔도 그걸 뭉개버리는 제가 실은 개와 돼지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주옥같은 말씀을 주님께서 아무리 하셔도
저는 그것을 다 뭉개버리고 좋은 것만 제게 있기를 바라고
계속해서 저 좋을 대로 살려고 하다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 해주라는 주님 말씀을 묵상하다가
샛길로 빠져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성찰하는 것으로 끝냈는데
실로 제가 옳은 것을 바라야 남에게도 그대로 해줄 수 있으니
오늘 주님 말씀 묵상을 제가 이 정도로 갈음해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승화 시몬 신부
여행을 갈 때마다 미사 도구를 챙겨가는 편입니다.
동네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해도 되지만
아무래도 미사 도구를 챙겨 가면 제가 원하는 때에 할 수 있기에
기도 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안 챙겨갔다가 동네 미사 시간이 맞지 않으면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을
불편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미사 도구를 모두 챙겨가는 건 아닙니다.
혼자서 미사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만 가져갑니다.
초는 화재 위험 때문에
미사주는 해당 지역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제의는 영대만 챙겨갑니다.
모든 것을 다 챙겨가 규정대로 하면 좋지만
그러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죠.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대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자세입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동시에 상황에 따라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자세.
바로 이럴 때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대할 수 있고
타인에게 요구하기 전에 먼저 모범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대할 때
우리의 신심이 자라남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 안에서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거룩함을 수호하는 영적 분별력
최 빠코미오 수사
1. 성전 바닥에 펼쳐진 위협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산헤립 임금은 편지를 보내 하느님을 조롱하고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유다의 히즈키야 임금은
인간적인 외교나 무력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 그 편지를 하느님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당신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2열왕 19,19)
히즈키야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세상의 돌과 나무 신상처럼 취급하는 이방 왕의 오만을 직시하며,
오직 참되신 주님께만 모든 것을 의탁했습니다.
2. 진주를 짓밟는 이들에게
히즈키야가 마주했던 아시리아의 조롱은,
오늘날 복음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의 시선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
이 말씀은 복음의 진리를 무분별하게 대하는
'지나친 느슨함'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 건네진 진주는 발에 짓밟힐 뿐이며,
오히려 돌아서서 우리를 물어뜯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곳에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머무를 수 없습니다.
3. 초대 교회가 수호한 성찬의 문
초대 교회는 이 말씀에 따라 성찬례의 거룩함을 엄격히 수호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교회 문헌인 『디다케』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이들 외에는
성찬례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말게 하십시오."라고
규정하며 이 구절을 직접 인용했습니다.
미사 중에 모시는 성체는 단순한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고백하고 삶을 가다듬은 이들만이 다가설 수 있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분별없는 태도로 성물을 대하는 것은 은총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4. 비좁은 길을 걷는 신앙
세상은 편하고 넓은 길을 가라고 유혹합니다.
남의 것을 쉽게 짓밟고 자기 이익을 채우는 길이 똑똑한 삶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촉구하십니다.
남이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먼저 베푸는 황금률을 실천하고,
성체의 거룩함을 삶으로 증언하는 길은 비좁고 험난합니다.
그러나 그 끝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앞의 편안함과 타협하지 않고,
영적 분별력을 지닌 채 이 좁은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