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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참된 부자”(눅 12:13-21)

작성자모세 강홍준|작성시간25.08.23|조회수98 목록 댓글 1

일 시 ; 2025. 8. 24(주일)     - 성령강림절 후 열한째 주일 -     (2025년 35주)

 

제목;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참된 부자”

성경; 눅 12:13-21 (p. 114)     (시 107:8-9, 522<268>, 524<313>, 621장) (216, 342)

 

<예배의 부름> (시 107:8-9)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훈련의 달 8월 넷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8월은 8.15 광복절이 있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순국순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즘 마트에 가면 청포도가 매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시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생을 마감한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란 시를 나누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청포도(靑葡萄)’   이육사(본명 이원록) (「文章」, 1939)

 

내 고장 七月(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아도 조국 대한민국의 해방과 독립을 사무치게 갈망했던 시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를 때의 수인번호인‘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陸士)'라고 지었습니다. 본명 ‘원록(源錄)’보다 호명이 더 잘 알려진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李陸士)를 기억하며, 비록 이육사 시인과 같이 무장 투쟁을 하는 독립투사는 아니더라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기도와 나눔 등을 통해 조국 해방과 통일에 동참하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눅 12:13-21)은 소위 말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갑자기 한 사람이 형이 가진 유산을 공정하게 나누어달라고 요청합니다(13-14).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15-21). 그리고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다시 부자는 승승장구하는 듯하지만(15-17), 하나님을 제쳐둔 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18-19). 부자에게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부요하라는 교훈으로 인생의 참된 가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20-21).

누가복음 12장에는 ‘성령의 소욕과 물질에 관한 집착’이 대조됩니다. 물질이 주는 안전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추구한다면 그것은 패망의 지름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운 나라를 추구하는 생활은 복되고 안전합니다(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령님은 인간이 진정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인생을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교훈하십니다.

다음 주에도 누가복음 12:31-40절말씀으로 은혜를 나눌텐데, 12장 전체의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며, 앞부분(1-34)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탐심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외식) 경고(1-3), 환난과 핍박에 대한 교훈(4-1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3-21), 생활에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구할 것(22-34).뒷부분(35-59)은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와 시대를 분별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35-40), 두 청지기의 비유(41-48), 불을 던지러,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49-53), 시대의 분별과 회개의 촉구(54-59)

누가복음 말씀을 나눌 때면 늘 말씀드리지만 누가복음은 ‘사회 복음(Social Gospel)’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서’입니다. 오늘 본문도 재물을 가난한 자 등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해 쌓아두고 향락을 즐기자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참된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고 경고하며 세상의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요하라(21)고 말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1. 서론 : 유산을 공정하게 나눠달라고 요청함(13-14)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수만 명의 군중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경고하면서(1-3), 환난과 핍박에 대한 교훈(4-12)을 주고 계신데, 느닷없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 하고 말합니다. 분배 문제에 대한 책임이 내게 있는 줄 알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형에게 명령을 하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서 예나 오늘이나 똑같은 상황을 발견하게 됩니다. 보통 변수(變數)는 내게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앞에 놓고 “내가 어떻게 할까요?”하고 묻지를 않고 “저 사람들을 감동시켜 움직여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들 요구하고 있습니다. 있는 자들은 없는 자들에게 좀 조용히 있어 달라고 합니다. 없는 자들은 있는 자들의 마음을 좀 고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은 가만히 둔 채 움직일 생각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변화됨으로 해결이 있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에 어려운 문제가 깃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동생이라는 자가 유산 분배 문제를 가지고 와서 그런 식으로 나오자 예수님께서는 직접 개입을 거부하십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14)주님은 더 근본적이고 깊은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관습으로는 형제가 유산을 나누는 경우, 형이 3분의 2를 가지고 동생은 3분의 1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왜 분배 문제가 대두되고 있을까? 다음의 몇 가지 경우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경우입니다.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문제될 것이 없겠는데 유언 한마디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그래서 형이 유산을 제 마음대로 움켜쥐고 앉아 동생한테는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경우입니다. 둘째로, 형이 형 노릇을 못하여 평소에 동생이 부모를 모셔 왔다면, 이것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형이 동생 몫의 두 배를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이 부모를 모신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부모를 모셔 왔으니, 동생으로서는 자기가 형보다 많이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형제가 둘 다 부모를 모시지 않았던 경우입니다. 그래서 동생은 형이 자기 몫의 두 배를 차지할 이유가 없으니 반씩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 이제 묻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하겠습니까? 이 형제가 어떻게 분배를 해야 올바른 분배라 할 수 있을까요?관례를 따르기도 애매하고, 법을 따르자니 그도 분명치 않고, 현실적으로도 어떻게 해야 합리적일는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좀처럼 쉽게 풀 수 없는 답답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시온산 언덕에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에 얽힌 두 가지의 전설이 있는데, 성전이 자리한 그 터가 모리아 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그곳이라고 하는 전설이 그 하나요, 또 다른 의로운 두 형제 이야기입니다.

형은 일찍이 장가를 가서 어느덧 슬하에 여러 명의 자녀도 있으나 동생은 미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두 아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형제는 저마다 분배받은 땅에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저마다 그 소출(所出)을 쌓아두었습니다.

넉넉하게 쌓여 있는 곡식단을 보고 동생은 생각합니다. ‘자. 나는 혼자 사는 처지라 이렇게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형네는 식구가 많으니 그 소출로는 혹 일 년 양식하기에 모자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생은 아무도 보지 않은 야음을 타 자기 곡식단을 형네 밭으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한편, 형은 형대로 ‘나는 마누라도 있고 아이들도 있는데 저 동생은 혼자 사니 얼마나 외로울꼬? 녀석이 재물이라도 많이 모아야 장가도 들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뭘 좀 주려고 해도 녀석은 도무지 받지를 않으니 이번에는 몰래 갖다주어야 되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형은 자기네 곡식단을 밤새껏 날라 동생네 밭에다 옮겨놓았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밭에 나가보니 곡식단이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밤새껏 그렇게 옮겨놓았는데 여기 그대로 있다니, 거참 이상하다?’ 형도 이렇게 생각하고 동생도 자기 밭에 여전히 높직하게 쌓여 있는 곡식단을 보고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날 밤에 형제는 저마다 지난 밤에와 똑같이 되풀이했습니다. 동생은 자기 곡식단을 형네 밭에 옮겨놓았고, 형은 자기네 곡식단을 동생네 밭에 옮겨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마침내는 서로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웬 놈이냐?” 어둠 속에서 똑같이 서로를 보고 소리칩니다. 그러다가 확인을 해보니 동생이고 형이 아닙니까? “왜 이런 짓을 했느냐?” “형님네는 식구가 많지 않습니까?” “너는 장가도 들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니 부지런히 모아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들 시비를 하던 형제는 급기야 서로 얼싸안고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져서 임금의 귀에까지 들려왔고, 임금은 무릎을 치면서 명합니다. “그 형제의 밭이야말로 보배로운 땅이로다. 그 땅에다 성전을 지으렷다!” 솔로몬 성전 터가 바로 그 밭이라고 하는 전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 앞에는 부모와 자식도, 형제와 자매도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돈(재물)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이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조금은 초연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5-21)

 

1) 하나님 없는 부자의 상태(15-17)

예수님은 형의 유산을 공평하게 분배해 달라는 동생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고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 후에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16-17)라는 말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탐심(貪心)’은 헬라어로 ‘플레오넥시아스’(πλεονεξίας)로, 이는 ‘더 많은’(플레온, πλέον, more)과 ‘소유하다’, ‘가지다’(에코, ἔχω, have)의 합성어, 어원적으로는 자기의 분에 넘치도록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본절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탐심이란 단지 물질에 대한 탐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과도히 욕심을 부리게 되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더 가지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분수에 넘치도록 더 가지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탐심을 물리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지나친 욕심을 물리치라는 말씀입니다. 로마 사람들의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말라진다.”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닷물은 마시면 더 목이 탑니다. 돈이란 모으면 모을수록 더 모으고 싶어집니다. 우리 속담에 “사람의 욕심은 땅보다도 두텁다”고 한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또 “황금은 흑사심(黃金點士心)이라”고, “누런 돈이 깨끗한 선비의 마음을 검게 한다”고 합니다. 매우 뜻이 깊은 말들입니다.

왜 탐심을 물리치라고 합니까? 탐심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여기 본문에 보아도 형제 간에 부모가 남길 유산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겨서 이렇게 예수님에게까지 와서 물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탐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먼저 ‘탐심(貪心)’은 자족(自足)이 없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후 6:6-8)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가졌건 만족하고, 내가 가진 것이 제일 좋은 줄 알고 귀한 줄 알고 충분한 줄 알고 살아가는 삶이 은혜스러운 삶이요, 그렇게 살아간다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늘 복 받지 못했다고 원망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내게 복은 안 주신다고, 돈을 안 주신다고 불만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제대로 못 믿습니다. 자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곧 탐심입니다.

‘탐심(貪心)’은 다른 말로소유욕입니다. 목적 없는 소유욕입니다. 한계를 모르는 소유욕입니다. 무엇 때문에 더 가져야 합니까? 사람이 쓰는 것에는 한도가 있습니다. 무한정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거늘 목적도 없이, 다 쓸 수도 없으면서 무제한으로 가지겠다고들 합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데 취직하고, 사업도 하고 해서 돈 많이 벌어라, 목사는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고 쓰는 사람인데, 선교를 쓸 수 있도록 도와주라’, 저는 지금도 선교를 위해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국내외 선교도 해야 하고, 군 복음화, 학원 복음화도, 또 평생 꿈을 꾸는 선교학교도 세우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돈이 없지만, 이런 저의 소망이 주님의 뜻에 합쳐진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기다리며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좀 살다보니 가끔가다 부자(富者)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나이 많은 노인인데 가진 돈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도 다 쓰지도 못할 것을 손에서 안 놓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제가 부자가 못되어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저 같아서는 가진 것 다 내놓겠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자가 되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인지, 저로서는 참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계를 모르는 소유욕 이것이 탐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계명에서도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그리고 탐내지 말라... 참으로 중요한 계명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탐심을 어떻게든 제거한 다음에 이야기가 성립됩니다. 그래야만 공정한 분배도 성립하고 공평한 것을 공평하다고 수긍할 수 있게 됩니다.

 

2) 부자의 노력과 착각(18-19)

소출이 매우 많은 부자가 이 많은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기에 한 가지 궁리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의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말했다.”(18-19)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문제를 처음부터 잘못 파악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 해서 그것이 다 내 것인 줄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나는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다음으로 이 어리석은 부자는 또한 재산을 보존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재산을 바로 보존하는 길은 베푸는 데 있습니다. 바로 쓰는 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쓴 것만이 내 것입니다. 손에 쥐고 있다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가끔 농담 삼아 말하곤 합니다마는 ‘먹은 것만 내 것’입니다. 먹어버렸으니 내 것임에 틀림이 없지요. 내 앞에 차려진 밥상에 놓인 것도 내 입으로 떠 넣기 전에는 아직 모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자유롭게 쓴 것, 그것만이 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19절에 ‘내(나의)’(my, μου)라고 하는 소유격이, 한글 성경에는 세 번, 영어 성경에는 다섯 번, 헬라어 원문에는 네 번이나 나옵니다. ‘내(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 이 이기적인 생각이 가장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다고 전부 다 내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잠깐 맡겨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내게 잠시 맡겨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결론 :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부요하라(20-21)

 

어리석은 부자가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소출을 창고에 들인 후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19)고 말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예수님은 이 어리석은 부자에게종말론적인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 네 생명 거두어 가면 창고에 아무리 많이 쌓아둔 소출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수의(壽依)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 사진 보며)

제가 가끔 말씀드리지요. 한자 ‘죽을 사(死)’를 파자 하면, ‘하나 일(一) + 저녁 석(夕) + 비수(살촉) 비(匕)’로 ‘하루 저녁에 날아오는 비수’에 죽는 것이 죽음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옛말에 “오는 순서는 알아도 가는 순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꼭 기억하고, 살아있는 오늘 열심히 보람있게 충성스럽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생명 문제를 교훈한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21) 예수님은 재물을 바르게 쌓아두고 보존할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창고를 크게 짓고 넓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무 것도 쌓아둔 것이 없는 사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 그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주제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음을 떠나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물질면에서는 대단한 부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빈곤한 사람이 있습니다.돈은 많으나 인품이 없으면 그것처럼 목불인견은 없습니다. 정신적인 것은 하루 아침에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도 가슴도 텅텅 비었는데 돈이 많다고 부자랍니다. 그리고는 입만 열면 나오는 것이 천박한 상소리인데 무슨 부자란 말입니까? 비록 초라한 차림을 하고 생활은 어려워도 교양과 인격에 있어서 훌륭하게 부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요즈음 자가용 시대를 맞이하여, 사람이 타고 다니는 차 크기로 그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더 좋은 차를 갖지 못해서 계속 불만입니다.자가용 없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에서, 자가용을 가지고도 불만이라면 그는 분명 가난한 사람이요, 그 버릇 가지고는 죽을 때까지 가난합니다. 그야말로 빌어먹을 팔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오늘날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길게는 다 설명하지 못하지만, 다음 질문을 통해 우리의 하늘 보물을 점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돈을 정직하게 벌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정치적으로는? 정의와 공의를 지지하며, 하나님의 가치를 실현하려 노력하는가?

사회적으로는?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문화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문화를 만들고 소비하고 있는가?

경제적으로, 재물을 우상화하지 않고, 부당이익, 탈세, 사기가 아닌 정직하게 돈을 벌고, 정직한 소비와 투자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소득의 일부를 선교, 구제, 교회 헌금, 어려운 이웃 돕기 등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부패와 불의를 묵인하지 않고 정직하며 정의로운 정책을 촉구하며, 자유와 공의를 수호하고, 정치적 성향에 치우쳐서 분쟁을 조장하지 않고, 화합과 공존을 이루도록 노력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노인, 장애인, 빈곤층 보호 등)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것 등입니다.

사회적으로, 정직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 부정과 부패를 멀리하고 거짓 없이 정직하고 성실한 삶,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돕는 삶,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삶, 갈등을 조장하지 않고 화합과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삶, 혐오와 차별이 아닌, 사랑과 이해로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 고아와 과부, 장애인, 노인, 난민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동참, 시부, 자원봉사, NGO 단체 후원 등입니다.

문화적으로,점점 하나님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현대 문화에서, 미디어, 예술, 콘텐츠를 통해 하나님의 가치를 전파하고, 기독교 세계관이 담긴 영화, 책, 음악 등을 만들고 소비하며, 유튜브, 블로그, SNS를 활용하여 복음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음란물, 폭력, 악한 영향을 끼치는 콘텐츠 대신, 생명을 살리는 문화를 확산하는 등 선한 문화를 만들고 확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기 존재를 소유로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내가 소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하고 말하는 셈이 되는데, 그렇다면 내가 소유하는 것만큼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이처럼 그릇된 논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나의 행복도 소유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하는 것을 깨닫고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졌다고 교만할 것 없고 못 가졌다고 비굴할 것도 없습니다. 또 내 소유가 누구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어디에 쌓여 있는가? 하는 질문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III.

 

약 100여년 전인 20세기 초에 미국 콜로라도 은광 개발업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예일대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윌리엄 화이트 보던(1887-1913)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중국 간쑤성의 무슬림 선교를 위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무슬림과 아랍어를 공부하던 중 병으로 25세 되던 해인 1913년에 사망했습니다. 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을 포기하고 선교를 준비하던 보던은 중국 내지 선교를 위해 80만 달러를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보던의 사망 소식이 미국 여러 일간지에 소개되자 수많은 청년이 재산을 포기한 채 자신의 인생을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소유에 마음을 쓴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가 되느냐를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 부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참된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함을 알고 탐심을 버리는 사람, 내 모든 소유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선한 청지기같이 사용하는 사람, 하늘 나라에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부자라고 말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에는 주먹을 쥐고 나온답니다. 온 세상을 손안에 쥘 것처럼…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에는 손을 펴고 간답니다. 아무 것도 못 가지고 간다고...” 참 그럴듯한 이야기지요. 우리 말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전부 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을 가는 존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40개쯤 되는데, 그 중에서 16개가 돈과 소유에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워드 헨드릭(Howard Hendrik)이라고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보다 돈에 관한 말씀을 더 많이 하셨다”는사실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는 ‘돈(재물) 신’, ‘맘몬’(Mammon)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이 돈(재물)이 신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하는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시요, 그 하나님을 주인 삼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대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성도의 삶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게 맡겨주신 생명, 가족, 직장, 사업, 물질, 재능, 지식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내게 잠시 맡겨두신 거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 모든 것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참된 바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후 6: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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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모세 강홍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08.24

    2025년 8월 24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https://www.facebook.com/hongjoon.kang/videos/818660047156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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