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6년 6월 7일(주일) -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 (2026년 23주)
제목;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義)”
성경; 롬 3:21-31 (p. 342) (시 31:23-24, 288<204>, 510<276>)
<예배의 부름> (시 31:23-24)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국보훈의 달 6월 첫째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먼저 짧은 영상을 하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름 없는 별” 동영상, 사진 보고)
오늘 교회 들어오면서 ‘별’ 뱃지를 두 개씩 드렸는데, 이 별이 조금 전에 본 영상에 등장한 “이름 없는 별”을 기념하는 별입니다. 최근에 국가정보원에서 이름 없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별”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사업으로 별을 만든 것입니다.
“이름 없는 별”은 작전 중 순직한 국정원 블랙요원들을 상징하는 별들로, 2018년 공개되었을 때 18개였는데, 2020년 19개로 늘어나고, 2025년 현재 21개로 늘어났습니다. 2018년-2025년 사이 세 분이 더 작전 중 순직하셨다는 뜻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우리나라도 국가 안위를 위해서 미국 ‘중앙정보부’(CIA)와 같은 정보기관이 필요함을 알고 ‘중앙정보부’(KCIA)가 1961년 10월 창설되었고, 그 후에 1979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김대중(DJ) 정부는 1999년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름을 바뀌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과거 중앙정보부(중정) 시절에 고문, 정치 공작 등 잘못된 관행 때문에 부정적이고 음험한 이미지가 있지만, 국가정보기관은 세계 모든 국가가 가장 중요시할 정도로 국가 안위에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리고 그 기관을 총칭하는 ‘원훈(院訓)이 중요한데, 지금은 ’정보는 국력이다’란 말을 다시 사용하고 있지만, 30년 넘게 쓰인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는 원훈이 국정원과 요원들의 사역과 가장 잘 어울리는 원훈입니다.
이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원훈(구호)은 미국에서 유래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대통령이 백악관 참모진의 노고를 치하하며 쓴 ‘익명의 열정’이란 어구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과거 중정 및 안기부가 저지른 각종 비밀공작과 인권 침해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음지’란 표현에 거부감이 들 수 있지만, 국익을 위한 사업조차도 남들 몰래 추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보기관 요원들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6월을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하는데, ‘호국 보훈’(護國 報勳)이란 ‘호국’(護國)은 보호할 호(護), 나라 국(國), 나라를 보호하고 지킴, ‘보훈’(報勳)은 보답할 보(報) 공훈 훈(勳), 공훈에 보답함, 즉 ‘호국 보훈’(護國 報勳)은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힘쓴 사람들의 공훈에 보답함’이란 뜻입니다. 제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면 꼭 드리는 말씀인데, 실제 공훈을 세운 것도 없는 ‘가짜 유공자’들이 많이 나오는 시절에, 정말 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참된 유공자들을 우대하고 공경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본문 말씀(롬 3:21-31)은이신칭의(以信稱義)의 원리(21-26)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음(27-31)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는 유명한 로마서의 이신칭의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좁게는 바울의 핵심 사상으로, 넓게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으로, 특히 종교개혁으로 출현한 개신교의 핵심 사상으로 간주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는 말씀과 함께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데 기초가 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선교 활동을 총정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분명하게, 로마 교회를 향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쏟아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 박해자에서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숨 걸고 증거하는 복음 전도자로 거듭난 바울은 이제 복음의 핵심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28)
이렇게 외치는 바울의 깊은 속마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 주는 복음은 유대교 율법주의에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인데,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그리스도교 복음이 다시 율법의 종노릇 하는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오늘 본문 로마서 3장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가 지금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드러납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습니다(10-12). 죄인은 당연히 심판대에 올라서 심판을 받고 그에 해당하는 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23). 그런데 그가 치러야 할 죄의 값은 사망밖에는 없습니다(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 죄의 값을 대신 치를 화목제물로 예수님을 택하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고, 이 믿음이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의(義)인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 한 가지는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행위’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적 행위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적 행위 안에 감추어진 신앙의 본질, 다시 말하면 행동이나 행위도 드러날 수 없는 인간의 저 깊은 내면적 성찰을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종교와 신앙은 그 종교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리고 개인의 신앙생활의 세월이 오래될수록 형식화의 길을 걸어서, 외적인 종교 행위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변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그랬고, 종교개혁자 루터 시대의 가톨릭 교회가 그랬습니다. 이제 우리는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통해서 비판했던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했던 로마 가톨릭의 공로주의가 아니라, 유대인과 헬라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 등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의, 곧 믿음으로써 구원얻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칭의(구원)는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21-22).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20)고 말하므로, 유대교에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할 뿐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어떠한 것인지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갈 3:10).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성시키셨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1-22)고, 구원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나 자랑과 관계없이 사람을 의롭다고 부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되었습니다(21).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나 계급이 높다고 해서 더 의롭다고 부를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율법의 덕목을 실천한다고 해서 의롭다고 불릴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의롭다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부를 수 있는 비결을 주셨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22).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힘이나 능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은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사람은 의롭다고 불릴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분 28절에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하므로 이신칭의(以信稱義)만이 구원의 진리임을 재천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내가 가는 길에 동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2. 구원 받는 칭의(justification)는 다음 세 가지 원리로 성취됩니다.
1) 첫째, 칭의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오직 은혜”(sola gratia)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b)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그 대가를 치르고 벌어들인 것이 아니라, 값없는, 내가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칭의(구원)는 율법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의한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에서 기본 진리는 성부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의 주도권을 쥐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자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오셨고, 값없이 자신을 내어주셨지만, 성부 하나님의 주도권에 복종하신 것입니다(히 10:7).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랑하고(2:17), 율법을 자랑하는(2:23) 유대인들의 자랑은 배제됩니다.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칭의의 근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값이 없다’는 말은 ‘공짜’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값을 매길 수 없다’(priceless)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큰 은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느껴지려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먼저 느껴야 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책 사진)은 출간된지 400년 가까이 되었지만 계속 인쇄되어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의 본명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순례자의 이름은 ‘기독도’(Christian)이지만, 그가 멸망의 도시에 살 때 본명이 무엇인지 아세요? ‘은혜 없음’(Gracelessness)입니다. 우리도 역시 같은 이름의 소유자였습니다. 은혜받을 수 없는 자가 은혜를 받았고, 칭의 받지 못할 자가 칭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리 브리지스가 자신의 책 Transfoming Grace에서 지적하듯이, 은혜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 은혜로 구원받아 놓고 ‘자기 행위의 땀’으로 살아갑니다.”이 같은 신앙 유형은 이단 못지않게 교회를 해칩니다. 신앙이 ‘율법적 동기’로 변하는 순간 자유를 잃고 신(新) 바리새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와 기도 등 경건 생활과 봉사와 헌신,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응답이 되어야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섬김, 헌금과 나눔이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으로써 헌신이 되시기 바랍니다. 의무가 아니라 은혜의 기대치를 높이므로 참 자유를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2) 둘째,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의를 불의와 타협하거나 눈 감아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의인은 의롭다고 하고, 악인은 정죄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신 25:1). 만약 그 반대로 재판하면 미워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잠 17:15). 그리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뒤집는 자들에게 화를 받게 됨을 경고하셨습니다(사 5:22-23, 출 23:7). 이렇게까지 말씀하고서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24-25)
여기서 십자가를 통해 행하신 중요한 일 세 가지를 주목하게 됩니다.
① 속량(아폴리트로시스,ἀπολυτρώσις) : ‘아포’(ἀπο, …로부터)와 ‘뤼트로시스’(λυτρώσις, 풀어줌)의 합성어로, 신약 성서에 10회 나타나는데, 값을 지불한 결과로 얽매여 있던 속박에서 꺼내어 완전히 해방되도록 하는 것으로, 팔렸던 노예를 값을 지불하고 사들여 자유롭게 할 때 사용된 상업 용어입니다. 우리 역시 죄와 죄책에 속박되어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노예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피로 사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② 화목 제물(힐라스테리온, ἱλαστήριον) : ‘속죄하는 것’, ‘화해하게 하는 것’, ‘속죄를 얻기 위한 선물’이라는 뜻으로, 헬라 비문에서 이것은 ‘신들을 위한 화해의 예물’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70인역(LXX)에서는 이 단어가 ‘화해’ 혹은 ‘속죄소’(mercy seat) 등을 뜻하는 히브리어 ‘캅포레트’(כפרת)의 번역어로 나타납니다. ‘캅포레트’는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의 장소’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화목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으로 성부 하나님의 의를 손상하지 않고도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마련해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③ 간과하심(파레신, πάρεσιν) :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유일하게 나오는 단어로, ‘간과(看過)’란 ‘지나쳐 본다’는 말인데, ‘볼 것을 지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원어로 ‘파레시스’(παρεσις)인데 ‘지나가게 두다’라는 뜻으로, 기본적인 뜻은 ‘간과함’, ‘벌하지 않고 내버려둠’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함의는 ‘면제’, 또는 ‘양도’인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죄를 따지지 아니하고 그 책벌을 면해 버리는 것’이라고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단어를 ‘용서’라고도 번역합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라는 것은 죄를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따지지 않고 옆으로 치워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참고 눈감아주심으로”, 새번역은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받았지만 ‘의로운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충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파레시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죄(불완전한 제사의 상태)를 참으시면서 완전한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대신 담당하게 하여 그 구속의 은혜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죄까지 포함하여 인류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완전히 속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의 구원, 곧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구원과 부활의 근거입니다. 이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면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더없는 헌신으로 영광을 돌립시다.
3) 셋째, 칭의의 수단은 믿음입니다. : “오직 믿음”(sola fide)
사도 바울은 계속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22,25,26,28,30,31). 칭의는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이뤄짐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 믿음에는 공로의 측면이 전혀 없습니다. 구원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된다고 말할 때, ‘한 종류의 공로(행위)를 다른 한 종류의 공로(믿음)로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의롭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한편 ‘믿음’을 나타내는 헬라어 ‘피스티스’(πιστίς)에는 ‘믿음’(faith)과‘신실’(faithfulness)이라는 뜻이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믿음과 신실(순종)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한 아버지가 귀신들인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하십니다. 이에 아이의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소리쳐 아룁니다. 아버지의 태도에서 주목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지척인데 왜 소리쳤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자신이 부탁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요행’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다며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칭의의 수단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음을 숨기는 것은 절망입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어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믿음의 능력을 받아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항상 주님과 동행하고,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전하므로 생명을 살리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3. 칭의는 선물이므로 자랑할 것이 없으며, 칭의의 범위는 모든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에서 칭의 곧 구원의 범위에 한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선물로 자랑할 것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칭의(구원)이므로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3-24)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값 없이”를 의미하는 헬라어 ‘도레안’(δωπεάν)은 ‘(값 없이 주어지는) 선물로’라는 뜻으로, 은혜를 받는 사람이 그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25)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죄의 속박 아래 신음하던 인간들이 의롭게 되었다는 선언을 받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인간이 생명을 얻는 구원은 스스로의 힘이나 율법을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화목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헛된 것이며(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또 인간의 구원이 스스로의 힘이나 공로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헛된 일입니다(9-12,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믿음의 법을 통해서만 사람은 의롭다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
그리고 이 칭의, 곧 구원은 모든 예수 믿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9-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그 누구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처럼 그 누구도 의롭다고 불릴 자격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인종이나 국가, 곧 피부색이나 출생지에 따라서 차별을 받지 않습니다. 남성이라서 유리하거나 여성이라서 불리하지도 않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거나 계급이 낮은 사람이라서 무시되지도 않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고 불릴 자격에는 결코 차별이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누구나 다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고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III.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영상을 하나 더 보도록 합시다. (☞ “최덕근 영사”)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최덕근(崔德根, 1951/1952년 11월 2일 -1996년 10월 1일) 영사 살해 사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 영사는 당시 미국 100달러 위조지폐의 유통경로를 추적하고 있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소속 대북정보수집요원으로 3급 부이사관에 해당하는 간부였습니다. 그는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자원으로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안기부의 대북 정보 활동은 물론 개척단계에 있던 공관의 외교활동 지원에서도 탁월할 역량을 보인 정보기관의 재원이었다고 합니다. 사건 당일 최 영사는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퇴근하던 길에 자신의 아파트 계단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였습니다. 최 영사의 시신에서는 북한 공작원들이 독침에 사용하는 '네오스티그민 브로마이드' 독극물 성분이 검출됐으며, 심한 두개골 손상과 오른쪽 옆구리 부분을 찔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건 발생 2일 후 주러 북한대사관 윤명진 참사는 “북한은 금번 사건과 무관하다.”고 공식 발표하고 러시아 수사관의 북한인 4명의 연행조사를 인권 침해라고 항의하며 극동지역 검문 검색 완화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여러 정황상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되었지만 러시아 정부의 수사는 답보상태였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사건 이후 4차례(1996년 10월, 11월, 1997년 1월, 2001년 5월)에 걸쳐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지만 수사에 대한 성과 없이 장기화되어 2011년 10월 1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사실상 수사가 중단됐습니다. 그후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2012년 10월, 러시아 검찰의 수사 재개 결정이 내려져 연해주 검찰청에 사건을 재배당하였지만 현재까지 범인 검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름 없는 별”중 유일하게 이름에 알려진 최 영사 사건에 대한 연구가 최근에 진행되고 알려지므로, 국정원 블랙요원에 대한 내용들이 알려지고, 그들의 헌신과 애국에 대한 조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해 6.25전쟁 발발 기념일을 앞두고 설교하면서 이런 말을 했는데 기억나십니까?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시 위스 파켐, 파라 벨룸>, “If you want peace, prepare for war.”)이 문구는 로마 제국의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저술한 병법서 『군사학 논고(De Re Militari)』에서 유래한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격언입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처럼 ‘자유와 평화, 민주와 정의’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화가 공짜로 주어지지 않듯이, 우리의 구원 역사 결코 대가 없이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값비싼 대가를 치뤘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시키므로 인류 유일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목숨을 내준 사랑과 은혜, 희생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구원 얻었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예수님을 믿는 믿음 하나로 구원 얻었습니다. 또한 그 구원은 인종이나 신분이나 남녀 등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값싼 구원이 아니라, 그 가격과 가치를 측량할 수 없는 ‘priceless’, 가장 값비싼 구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호국보훈의 달 6월 첫 번째 주일, 어제가 현충일이었는데, 이 아름다운 산하 대한민국이 그냥 맨손으로 맨입에 이뤄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국제적으로 전쟁이 끝난 종전(終戰)상태가 아니라, 전쟁이 잠깐 멈춘 휴전(休戰)상태입니다. 전쟁을 그치고 민족 화해와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일은 결코 ‘말’(구호)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은 행위(실천)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오늘 나눠드린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산화한 “이름 없는 별”을 기념하는 ‘별’ 뱃지를 가슴에 담고 이들에게 감사하는 6월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구원이 결코 값싼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주어진 결코 가치나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값비싸고 고귀한 구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내가 받은 구원의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므로 날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