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내가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판사인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판사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어느날 아빠 판사에게 ‘아빠 판사가 높아요 선생님이 높아요?’ 판사는 아이의 질문이 뭔지를 알았습니다. 며칠후 선생님을 집에 초대했는데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판사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깍듯이 대접을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잔에 술을 따르고 차를 대접하고... 아이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 선생님이 판사보다 높구나..’ 사실 아이 아버지는 아들이 선생님을 깔보면 제대로 배우지를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아들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그 선생님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 것 같습니다. 판사라는 존귀한 분이 하찮은 나를 귀하게 여기는구나.. 아마 판사 아들을 잘 가르치지 않았겠나 생각 됩니다.
사람이 사람의 인정과 평가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상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12:26)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하나님이 귀히 여기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4:18-22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데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들은 배와 그물과 가족을 뒤에 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에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을 앞에 두고 마태복음 10:37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정성을 바칩니다. 젊은 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우리의 마음은 온통 그 사람 뿐 이었죠.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좋은 선물을 하고 편지를 쓰고 그 집 앞을 서성거리며 오가며 만나기를 기다렸죠, 이것을 사랑이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양파를 몹시 싫어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파뿐만 아니라 양파 냄새나는 과자, 양파를 넣어서 만든 음식 등 양파에 관계된 모든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떤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너무 사랑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녀와 함께 햄버거 가게에 갔습니다. 가게 점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습니다. “뭘 드시겠어요?” 그녀가 주문을 했습니다. “양파 낀 햄버거 하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아르바이트생이 또 물었습니다. “이쪽은요?” 청년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도! 똑같은 걸로! 양파를 듬뿍 넣어서!”
사랑은 제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제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둘째,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4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라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이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1)했을 때,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마26: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되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할 때, 어떤 여자 종이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 했을 때 나는 아니라 저 사람을 모른다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마26:69-75)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의 자아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자기 부인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부인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예수님을 시인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자기가 살아있습니다. 예수를 시인하는 것, 예수가 나의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려면 내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자아를 죽이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못 박아야 그리스도를 따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뭡니까? 내가 나를 높이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내려놓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스스로 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주님을 시인하게 됩니다. 자아를 죽일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고통과 죽음입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했습니다. (골 1:24)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길은 때로는 가시밭길을 가기도 하고 때로는 길이 없는 광야의 거친 들도 있습니다. 고난과 환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잘 이겨내야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보석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보석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다이아몬드와 진주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보통 숯과 같은 탄소로 되어 있습니다. 석탄과 다이아몬드, 둘의 공통점은 탄소로 된 결정체라는 것입니다. 탄소의 대부분은 새까만 석탄으로 남지만, 엄청난 고압과 고열을 견딘 탄소는 찬란한 빛을 뿜는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다이아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기 위해서는 지하 약 140~200km의 깊이에서 탄소 원자들이 1500℃ 정도의 고온과 1㎠당 65,000kg의 고압(보통 대기 기압의 65,000배)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엄청난 압박, 스트레스와 용광로같은 1500도의 열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 때 석탄이 빛나는 보석 다이아로 탄생합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만, 마치 탄소에서 다이아가 만들어지듯,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여러가지 수고와 봉사, 고난을 통과한 성도가 보석과 같이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진주는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진주조개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조개는 그 모래알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 모래가 조개의 살에 상처를 내고 조개는 큰 고통을 당합니다. 잘못되면 조개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주조개는 대부분 그 몸속에서 아비큘리데 라는 화학물질을 내어 그 모레를 감싸고 또 감싸게 되는데 그것이 커서 진주라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진주조개의 몸에 들어오는 모래는 진주의 살을 상처내고 많이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견디고 상처를 어루만지면 귀한 보석을 만드는 것입니다.
보석은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감당하고 십자가를 질 때, 보석같이 귀하게 됩니다.
요셉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고, 그 고난을 잘 이겨냈더니 귀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고난과 환난을 이기는 성도가 보석과 같이 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