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5-11)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하늘 영광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을 품고 살아가라고 합니다. 마치 새가 알을 품듯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4:19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알을 품으면 재앙이 옵니다. 예레미야 17:11에 자고새는 낳지 않은 알을 품는다고 했습니다.
뻐꾸기라는 새가 있습니다. 봄이 되면 뻐꾹 뻐꾹 하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새입니다. 뻐꾸기는 둥지를 만들지도 않고 자기가 낳은 알을 품지도 않습니다. 이를 탁란이라 합니다. 다른 새가 품어서 부화하고 먹여 키우는 것이죠.
뻐꾸기가 자기 알을 자고새의 둥지에 낳고 갑니다. 자고새는 큰 뻐꾸기 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고 느낍니다. 자고새는 자기알과 뻐꾸기알을 함께 품습니다.
12-3일 후에 뻐꾸기 알은 몇 시간 더 일찍 깨어납니다. 뻐꾸기 새끼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자고새 알을 둥지에서 밀어내어 떨어뜨립니다. 곧 알에서 깨어난 자고새 새끼들도 덩치가 큰 뻐꾸기 새끼가 둥지 밖으로 밀어내 죽입니다. 어린 뻐꾸기 새끼는 살벌합니다. 결국에는 뻐꾸기 새끼만 키우고 자고새 새끼는 다 죽고 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 수도 있고 악마의 마음을 품고 살 수도 있습니다. 마귀가 준 마음을 품으면 자고새가 뻐꾸기 알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헛된 일을 하고 마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강생하실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오셨나 하는 말씀입니다. 이 성탄 계절에 우리가 꼭 새겨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첫째,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7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비웠다 했습니다.
비운다는 것은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에 가득찬 것을 비우고 내려놓으면 가벼워집니다. 새의 뼈 속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내부가 텅 비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새의 몸이 가벼운 이유입니다. 몸이 가벼워야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습니다.
기러기 한 마리가 남쪽으로 날아가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기와 비슷한 새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곳에 내려앉으니 오리들이 있었는데 먹을 것이 많았습니다. 구태여 힘들게 하늘을 날아 갈 필요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기러기는 마음껏 먹고 자고 정말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몇 달이 지났는데 하늘을 보니 자기 친구들이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생활도 별로라 생각한 기러기는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날개짓을 했는데, 몸이 뜨지를 않았습니다. 너무 살이 쪄서 너무 많이 먹고 배가 불러서 몸이 뜨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가벼워야 하늘을 날 수 있죠. 속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대나무로 피리나 단소를 만들 때, 예리한 송곳으로 대나무 마디에 구멍을 냅니다. 대나무 속이 비지 않으면 청아한 단소나 피리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대나무 속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를 때처럼 우리의 마음을 비울 때도 아픔이 있습니다.
‘비우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케노센’이라고 해서 ‘포기하다’, ‘박탈하다’라는 뜻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오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으로서 본래 가지고 계셨던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겁니다.
내 자신을 비우는 데는 아픔이 있습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이익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의 어떤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잘못되는 일이 많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죠오지 부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술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어느 날 ‘당신이 술을 너무 좋아하니 당신과 살지 못하겠다. 술과 나 중에 선택하라 나를 선택하려면 술을 끊어라.’ 부시는 감리교 성도입니다. 그는 아내를 선택하고 술을 버렸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포기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 후에 부시는 대통령에 출마했고 8년이나 세계최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에게 보상이 있습니다.
둘째, 주님의 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했습니다. 종은 대접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10:45)
생각해보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힘드는 일입니다. 종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님을 따라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멘 소리가 왜 이렇게 작습니까? 자, 큰 소리로 아멘!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성도끼리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했지 일방적으로 누구의 종이되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도 종이고 너도 종이다, 같은 종의 신분이니 서로 종노릇하라 했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했으니까 종이 되려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일본에 한국의 어떤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사랑의 불시착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젊은 여성 사업가가 패러글라이딩을 하다가 돌풍으로 북한 최전방에 떨어졌습니다. 거기서 북한의 어떤 장교를 만나고 도움을 받습니다.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죠.
한국에서 크게 성공하고 잘나가던 여성이 북한의 궁핍한 환경을 만났습니다. 간헐적 단식을 하는 입짧은 공주가 자기는 하루에 고기를 두번 먹어야 한다니까 북한 장교가 어디서 고기를 구해서 먹이고, 아 원두커피를 먹고 싶다 하면 장마당에서 커피를 구해와서 가마솥에 볶아 원두커피를 내려서 가져오고..
심지어 나는 아로마 향초가 없으면 잠을 못잔다 하니까 어디서 그것을 구해오고.. 누가 총을 쏘니 대신 총을 맞아 사경을 헤매고... 그러니 일본 여성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이 남주의 모습이 사랑의 종의 모습입니다. 남자만 그렇습니까? 여주도 남자가 맞을 총을 대신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합니다.
종이 무엇입니까?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 맘대로 사는 것이 종입니다. 내 몸을 주인이 샀으니 내 것 아니고 주인의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수준에 자신을 맞추셨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셨다는 것입니다. 7살 어린이가 어느 그림 전시회에 왔습니다. 그림들은 어른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그림이 너무 높았습니다. 이때 한 할아버지가 아이를 번쩍 안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눈높이가 맞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성에 왕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화려한 왕자의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는데 길가에 어떤 아가씨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남루한 옷을 입은 집시 처녀였습니다. 왕자가 그에게 다가갔더니 도망을 갔습니다. 달려가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왕자가 다시 그곳에 갔더니 아름다운 집시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집시처녀는 재빨리 도망을 갔습니다.
그 다음날, 왕자는 왕자 옷을 벗고 남루한 집시 옷을 입었습니다. 말도 타지 않고 집시모습으로 얼굴도 좀 지저분하게 해서 그곳에 갔습니다. 왕자가 집시처녀에게 다가갔더니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집시왕자가 그 아가씨에게 갈 곳이 있다. 나와 함께 우리 아빠를 만나러 가자... 그 도시에 왕궁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왕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왕자가 집시가 되듯이 하늘아버지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우리는 그분을 친근하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우리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기준이 내가 되면 사람을 단죄하기 쉽습니다. 기준을 상대방에 두면 이해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넷째, 자신을 낮추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더 높으냐 하는 토론을 했습니다. 누가 더 예수님의 인정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들이 노중에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시고는 어린 아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새해가 되면 번영화라는 단체가 주관하는 신년 하례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홍천의 유지들이 다 모여서 의식을 치르고 신년 덕담을 나누는 행사입니다. 제가 홍천군 기독교연합 회장이라 몇 번을 참석했습니다. 홍천의 권력서열, 높은 사람 순서대로 호명되고 나와서 덕담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다 했습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시무할 때였습니다. 그 교회에는 민족의 지도자로 존경받는 조만식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낮 조만식 장로님이 바쁜 일로 예배에 늦었습니다. 황급히 들어서는 조만식 장로님을 본 주기철 목사님이 소리쳤습니다.
“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요 장로님이 예배에 늦으면 어떻게 본이 되겠습니까?” 그날 조만식 장로님은 문 앞에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주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는 말했습니다. “서 계시는 조 장로님,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요시한 죄를 용서 하옵소서. 주의 종의 마음을 상하게 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성도들이 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실 주기철 목사님은 조만식 장로님의 제자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에 학생일 때, 조만식 장로님은 그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의 그 겸손한 마음은 두고 고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억하고 귀감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것이 훌륭한 신앙인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 자신을 낮추는 마음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