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 텔레비젼에서 인상 깊게 봤던 영화
엘리노아 릭비: 그 남자, 그 여자 The disappearance of Eleanor Rigby를 다시 보고 있는데
이 귀절에 잡혔습니다.
Tragedy is a foreign country. We don't know how to talk to the natives.
비극은 낯 선 타국이다. 우리는 원주민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하는지 모르지.
이 영화 속에서 젊은 주인공부부는 어린 아들을 잃었지요.
그 후에 하는 그들의 방황을
참으로 잘 그린 영화입니다.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충격적인 비극을 겪으면
낯 선 타국에 던져진 상황이 맞겠다...
주변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리긴 하는데
타국인들이 내가 모르는 그 나라말을 내게 하는 것처럼
의미가 가슴에 들어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게 되다.
어쩔 줄을 모르게 되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
정말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
먼 딴 나라에 있는 것처럼
시간감각을 잃고
식욕을 잃고
보는 것, 듣는 것들이 낯 설고
입도 닫혀버리다.
내 몸도 내것같지 않고
허공을 걷는 듯하다.
허수아비처럼 되어버리다.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
그런 때가 있지요.
그런데...
왜 그런 경험을 하게되는 것일까?
타국어를 배우기 위함이다...이런 답을 떠올리네요.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찌해야하는 지를
배우기 위함.
이전에 읽었던 글귀처럼
고통의 목적은
고통 멈추는 법을 배우기 위함인 것.
고통이
이유 없고 목적 없는 것이 휘몰아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이나 고통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성장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
한참 고통 속에 있을 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지요.
마치 총을 맞고 피를 흘리는 사람 처럼 절박하니 말입니다.
처절하게 울부짖고 몸부림을 치는 날들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느낌으로 배움이 이루어지기에.
하지만 죽지만 않으면 상처는 아물게 되어있지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의식을 하든 못하든
뭔가가 바뀌구요.
우리 삶에서도 웬만한 기본적인 교육도 고등학교까지 12년이 걸리는군요.
전문적인 교육을 더 받으려면 대학, 대학원...또 세월이 흘러야하구요.
수없이 많은 수업시간을 겪어내야하고
수없이 많은 시험을 치워야 하고.
의식의 성장도 그런가 봅니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배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변화를 수반하는 비슷한 경험들을
여러번
수없이
하고 나서야
뭔가가 익혀진다.
낯 선 타국에 여러번 나가야 한다.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고
남으로도 가고
북으로도 가고
위로도 가고
아래로도 가고.
그래서 삶이 온통 뒤죽박죽이다.
그 뒤죽박죽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길을 찾으며
미소 짓는 법을 배우는 것.
우리가 이 땅에, 이 몸을 입고 오는 것이
바로 이런 성장을 위함인 것.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떠나간 아이를 그리며 그 커플은 서로를 부등켜 안고 웁니다.
보는 이의 눈도 젖게 만들지요.
몸 만 컸지 아이 같았던 두 사람이
이제 고통을 이해하는 성숙한 어른이 되고있음을 짐작하게 만들구요.
타국에서
타국인들에게 말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 되다.
꼭 이렇게 배워야하는가?
꼭 타국에 나가야 하는가?
후우...한숨을 쉬네요.
기본적으로
이 세상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타국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지구의 말을 배우고 있구요.
모든 사람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것.
요즘 이 지구인들이 받는 수업이 이전보다 더 고된 수업이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병 들고 심지어 죽어가니 말입니다.
바깥에 마음 대로 못 나가고
하던 짓을 못하게 되다.
새로운 종류의 언어를 배우다.
새로운 성장을 하고 있다.
이 공부를 잘 마치면
좋겠다...
이런 바램을 갖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