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Edinburgh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
이 그림을 처음 대했을 때 받는 인상은 색채의 화려함과 풍성함, 그리고 다채로운 충실감일 것이다. 오른 쪽 앞에 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비스듬히 선 여인, 그 옆쪽에 두 손을 모으고 경배를 드리려는 듯 한 몸짓을 보이는 두 여인은 물론이고, 주위 풍경인 바나나 배경의 수목, 꽃, 잎사귀, 나무 사이의 오두막에 대한 각각의 명확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가 바로 그 인상을 구성하는 대상의 내용들이다. 어느 한 구석도 과감한 생략 없이 색채와 형태로 메워진 것이 인상파인 모네나 피사로의 그림들과 구별되는 고갱의 회화 세계이다. 다시 말해 고갱은 공간보다는 이국적인 장식성을 추구함으로서 입체감이 있는 광대한 공간을 화면에 붙잡으려 하지 않고 2차원의 화면 그 자체에 그 어떤 틈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이다.
이 그림의 의미 내용에 대해서는 화면 왼쪽 구석에 고갱이 써넣은 그림의 제목인 <IA ORANA MARIA>의 글귀가 단서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마리아여, 우리는 당신에게 예배를 드립니다"라는 타이티 말로 기독교의 '아베마리아'에 해당하는 뜻이라 한다. 그렇다면 고갱은 타히티섬의 정경을 그리면서 서구의 기독교적 의미를 넣은 셈이다. 요컨대 분명히 의도적으로 타히티인 마리아와 예수를 그리려 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이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원광이나 두 타이티 여자의 경배 모습이 영락없는 실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얼핏 이국 풍물 정경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독교적 도상화를 바탕으로 한 타히티 버전의 성상 종교화이다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1891)
고갱은 타히티에서 나른한 여인들의 자태와 우수 어린 시선 등에 매료되었다. 그는 이 그림에서 해변가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을 아주 가까운 근경에서 묘사했는데 대담한 구도와 색채가 돋보인다. 반면 화면이 전면의 여인들이 앉아 있는 공간과 뒷 배경을 구획짓는 수평띠에 의해 강조됨으로서 그 깊이감은 약화되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고갱이 의도한 바이다. 왼쪽 여인의 옆 얼굴과 앞으로 내민 오른 팔, 오른쪽 여인의 뭉툭한 발바닥과 툭 불거져 나온 무릎 선이 이루어내는 시각적인 조응은 화가의 치밀한 장식적 조형의식을 반영한 것이리라...

언제 결혼하려나(1891)
타히티의 원주민 처녀 두명이 순진무구한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앞의 처녀는 뒤의 처녀와 달리 조신한 포즈를 잡으려 해도 자신의 내면에 들어있는 활기찬 에너지를 더 이상 감출 수 없다는 듯 동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강렬한 원색으로 이글거리는 원시적 생명력을 가감없이 표출시킨다.

아레아레아(1892)
이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땅은 따뜻한 색상으로 채워지고 있는데 실재하는 것이 아닌 상상의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 대상을 재현하려 하지 않고 선과 색의 배열 사이에 있는 그 어떤 신비감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왼쪽 위에 부드럽운 색상으로 채색한 신상은 달의 여신을 나타낸 것이고, 중앙의 인물이 연주하는 피리는 타히티의 밤에서 고갱이 느낀 고요함을 표현한 것이다. 왼쪽의 불그스름한 털 빛의 개는 그 어떤 악의 이미지로 대비시키기 위해 고갱이 집어 넣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마치 티치아노나 조르조네와 같은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이원적 대치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자주 등장시켰던 화면적 공식을 타히티의 무대에서 한번 실험해 보려는 듯이...

귀신이 지켜 본다(1892)
이 그림에 나타난 모델은 고갱이 타히티에 와서 얼마지 않아 동거하게 된 현지인 처녀 테후라이다.
고갱은 그녀의 모습을 통해 마오리족 사이에 살아 있는 당당한 원시적 생명력을 구현하려 한다.
이목구비가 크고 갈색 피부가 윤기 있는 마오리족 남녀는 이교의 신상을 연상시키는 모델로서 고갱에게 아주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정복자 코르테스의 현지처 말린체처럼 이국적 에로티시즘을 자극하는 테후라 임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처녀는 화가의 주요 작품에 단골 모델로서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 흥미있는 것은 인물의 배치와 구성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듯해 고갱이 겨냥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마네의 <올랭피아>에서처럼 테후라의 도발성이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 그들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자화상(1893~94)
1895년 파리생활을 청산하고 타히티로 떠나기 1년 전에 그린 그림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화상이다. 앞서 제작한 다른 2점의 자화상에 비해
훨씬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이 당시 고갱의 힘겨웠던 생할 환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배경 속에 집어넣고 있다. 그 그림은 1892년에 그린 <마니오 투파파우>로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신의 날(1894)
이 그림은 고갱이 1894년 일시 파리로 귀환해 그린 작품이지만
단순하고 명쾌한 색채 구사가 완전히 타이티풍으로 정착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브루타뉴 시절 고갱이 추구하던 종교적 체험을 화폭에 담는 제작 모티브는
여기서도 실행되고 있으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에서 추구하던
성서적 주제는 이제 토속신의 이미지로 대치되고 있다

다시 없을 타히티여 Never More, O Tahiti(1894)
고갱은 원시부족 신화와 이국적인 여체를 통해서 서양미술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염원을 끝까지 밀고 간다.
물론 긍극적으로는 서구 문화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내심을 보유한 채...
그러나 타이티 생활이 시간과 함께 정착되어감에 따라
자신의 이곳 생활에 대한 자부심을 점점 자주 표출한다.
병마로 인한 죽음의 시간이 가까와 올수록 "나는 고상한 미개인이다.
문명은 첫 눈에 그것을 알아챌 것이다.
나의 그림에는 이런 서구적 관념을 초월하는 회화정신이 배어있다.
결코 그 누구도 이를 모방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만년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자부심과 애정을 드러내었고,
그 심정이 이 그림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Paul Gauguin : Van Gogh Painting Sunflowers(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 Oil on canvas. Rijksmuseum Vincent van Goug, Amsterdam, the Netherlands.
1888년 10월 고갱은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성격도 다르고 그림에 대한 생각도 달랐던 두 사람의 만남은 한동안은 평화로왔으나,
12월 23일 고갱이 고흐를 떠나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흐가 자신의 왼쪽 귀를 면도칼로 자르면서 비극적으로 끝을 맺는다.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게 되고
고흐가 귀를 자른 진짜 이유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고갱과 고흐 두 사람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