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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사회 / Jean Baudrillard

작성자다반사|작성시간20.01.07|조회수148 목록 댓글 0

Jean Baudrill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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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사물'에 둘러싸여 있다. 사물에 둘러싸인다는 건 달리 말하면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엄청난 '풍요'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학자들과 사람들, 특히 민주주의 핵심인 평등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물'이 풍요롭지 않을 때에 평등은 모두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되었다. 따라서 사물이 풍요롭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평등' 즉 소유의 평등을 이루는 지름길로 인식되었고 그런 측면에서 산업 사회의 폭발적인 생산은 찬양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대가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고 사람들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두했지만 사람들은 물건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보다 그걸 어떻게 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관심은 '소비'의 문제로 옮겨오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생산의 시대에는 풍요가 분명 평등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비의 시대가 되면서 그러한 평등은 여전히 요원한 문제가 되었다. 사라져야할 평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상식 ― 생산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소비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 역시 흔들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개성적으로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개성 그 자체가 집단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풍요' 속에서 왜 평등은 오지 않는가? 보드리야르는 그 해답을 소비의 성격에서 찾는다. 소비, 즉 소유의 목적은 필요를 채우는 것인가? 답은 아니다. 만일 단지 소비가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면 우리는 불평등을 고민할 필요가 없고 '과소비'니 '충동소비'니 하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소비의 시대에 불평등, 과소비, 낭비, 그로 인한 공해 등은 너무나 흔한 말이 되었다.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지나쳐 버렸지만 우린 낭비나 공해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산의 시대와 소비의 시대의 시각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생산적 '번영'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번영의 지표로 GNP를 많이 거론한다. 그런데 GNP는 진정한 번영의 지표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엔 사회를 따뜻하게 물들이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은 반영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지는 폭발적 생산력은 단순히 통계화 될 수 없기에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나 공해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비용은 모두가 국가의 GNP 수치를 높여 우리의 '풍요'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시각이 소비의 시대에 맞게 바뀌었는가?
낭비, 공해가 우리의 풍요를 부풀리듯이 낭비 역시 우리의 풍요를 부풀린다. 필요 이상의 소비, 낭비는 필요 이상의 생산을 낳는다. 그러기에 그런 생산을 통해 '사물'은 넘쳐나고 우린 풍요의 바다에 허우적거릴 수 있다. 낭비와 공해는 우리가 그렇게 찬양했던 생산과 이를 통해 지향했던 '풍요'의 다른 얼굴이다.
이제 다시 소비의 문제로 돌아오자. 소비의 어떤 성격 때문에 풍요가 평등으로 연결되지 않고 과소비와 같은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가? 소비는 대중적이지 않다. 대중의 중심부 중산층에 의해 창조된 소비는 없다. 또한 밑바닥 층에서 생산된 소비가 상류계층으로 전달되는 경우도 없다. 거의 모든 소비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소비인 것이다. 맨 처음 상류층에 의해 생성된 소비 형태는 희소성을 띄며 향유되다 일반화의 길을 통해 대중에게로 전파된다. 소비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대중은 언제나 상향적이고 수동적이다.
그럼 왜 소비는 이런가? 사람들은 그저 필요만을 채우기 위해 소비하지 않는다. 소비가 가지는 가치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내가 타고 다니는 10년 가까이 된 프라이드나 오늘 뽑은 뉴그랜저는 사물의 기능에는 차이가 없다. 물론 조금 더 안정적이고 편한 것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만을 위해 상상하기 힘든 가격 부담을 담당하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고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면서까지 '필요 이상'의 소비를 하려 한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사려는 것일까? 프라이드와 뉴그랜저의 사물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는 가치의 차이를 소비하는 것이다. 뉴그랜저를 소비함으로써 소비자는 그것이 가지는 상징 ― 부유함, 상류사회, 특별함 등 ― 을 가진다. 또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소비를 하는 계급에 속하게 된다. 이런 소비는 궁극적으로 소비자를 사회 속에 특정 지점에 위치시킨다. 아니 그럼 사람들은 왜 이런 상징과 가치, 위치지음을 소비하려 하는가? 다른 이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기 위해서다. '차이화' 이것이 바로 소비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상류층과 같은 사물을 소비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상징과 가치를 향유하고 같은 계급에 속하는 '평등'을 누리려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같은 소비를 할 수 없는 자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고자 한다.
이 차이화에의 욕망이 바로 소비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필요에 대해서는 만족을 누릴 수 있어도 이 차이화에 대해서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차이를 '개성'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하려 하지만 우리는 쉽게 그 허점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랜저를 소비함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개성을 가지려 하지만 그는 그랜저를 샀던 사람들을 따라감으로써 개성을 상실한다.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고 싶다는 욕망이 많은 이들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우린 우리 시대 소비의 성격을 규정하고 또 가장 잘 보여주는 대중매체, 섹스, 여가생활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소비의 사회를 지탱시켜 주는 신화적 구조는 다양하지만 보드리야르의 난해하고 어려운 저술 속에 담겨 있는 내용 모두를 제대로 파악하는 건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머리 속에 정리되지 않고 떠오르는 여러 가지 관념적 파편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이마저도 쉽지가 않다.

르시클라주
영어로 하면 리사이클링 정도가 되나? '재교육', 오늘날의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멈춰서 있지 못하도록 한다. 세상의 변화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요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재교육'의 장으로 내몬다. 그런데 '재교육'은 교육적 개념이 아니다. 시대에 부응한다는 것, 이건 다름 아닌 유행에 부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옷 입는 법에 있어서도 재교육이 필요하고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을 사용하는 법도 재교육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변하고 따라서 사물도 변하고 그 사용법도 변하기에. 사람들은 시대에 부응해, 그리고 유행에 따라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사고 또 그것을 이용하는 법을 '재교육'받아야 한다. 소비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키취
소비의 사회는 모든 신성한 것을 대중화, 상업화 시켜 세속화시킨다. 박물관의 진열품은 길거리 노점상의 싸구려 민속품이나 기념품으로 둔갑해 소수가 누리던 고급스런 향유 문화를 대중이 누리는 '유희'로 바꿔 놓는다. 팝 아티스트들은 소수에 의해 고급스럽게 향유되던 '예술'에서 신성성을 제거하고 대중적인 유희, 복제 가능한 상품으로 변화시킨다.

자기실현적 예언, 대중 사회의 총아 광고
사람들은 소비 사회의 광고를 보며 그것이 소비를 부추기고 거짓된 정보를 전달한다고 비판한다. 사람들은 광고의 내용이 진실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고는 진위의 여부와 관계되지 않는다. 광고를 비롯해 미디어는 자기실현적 예언이라 할 수 있다. 삼성카드의 광고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를 보며 삼성카드가 과연 회원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삼성카드는 광고를 통해 능력을 보여주는 카드가 되어 가는 것이다. 삼성카드의 특성을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통해 삼성카드는 회원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카드가 되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다.

시뮬레이션, 의사(擬似)체험
도시를 비롯한 인간의 사회에서 자연은 상실되었다. 도시 사회에서 이웃간의 친밀성도 상실되었다. 그래서도 사람들은 도로 주변에 가로수를 세워 놓고 마치 자동차를 타고 '자연'속에 있는 듯한 거짓된(擬似) 체험을 '소비'한다. 인간관계 역시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 점원의 미소, 안내원의 이상한 말투와 같이 친밀함을 만들어서 마치 우리가 친밀한 인간관계를 거짓 체험함으로써 누리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어질 수 있는 '상품', 곧 '사물'이 되었다. 더 이상 자연을, 동물을 체험할 수 없게 된 인간은 동물원을 만들어 자연 속의 동물들을 의사 체험하며 그것을 소비한다. 식물원도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보면 분재니, 화분이니 하는 것도 아파트라는 사회에서 우리가 소비하는 의사(擬似)체험일 뿐이다.

몸의 해방, 육체의 소비
섹스와 인간의 몸은 언뜻 인간 해방의 사상이 낳은 결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린 해방되지 않았다. 육체는 이제 투자의 대상이자 자본이 되었다. 내 몸은 내가 가지고자 하는 모습을 위해 끊임없이 투자되고 소비되는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이런 육체에의 소비, 예를 들어 요즘 열풍이 일고 있는 성형수술, 고급스럽고 불필요하기까지 한 의료서비스는 또 하나의 계급적 차이화를 가져오는 '상품'이 되었다. 육체가 투자와 소비의 대상이라는 것을 성형수술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현대의 사회는 물신(物神)의 사회이다. 육체가 소비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곧 그것이 사물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또 다시 하나의 신(神), 곧 우상이 되는 것이다.

여가, 시간의 문제
시간 역시 그 절대성을 상실했다. 노동 시간만이 생산의 체계와 관련되는 시기는 끝났다. 여가 역시 생산의 체계와 관련된다.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 것인가가 역시 다른 이와 계급적 차이화를 가져오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여가를 많이 누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 여가를 통해 풍요를 누리며 포틀라치(북미 인디언, 원시 사회에서 힘의 과시로 행해지던 선물 공세)를 행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처럼 말이다. 이제 여가는 그냥 주어졌기에 편안히 누리는 여유의 시간이 아니다. '남들처럼' 보내야 하는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여가는 휴가철이 되면 남들처럼 해변에서 캠핑을 해야 하고, 겨울이면 빚을 내서라도 스키장을 다녀와야 되는 그런, 어떻게든 소비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폭력
이제 이유 있는 폭력의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이유 없는 잠재되어 있다 겉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폭력을 우리는 보고 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맨 처음 살핀 내용을 되짚어야 한다. 풍요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가? 풍요가 욕구를 충족시킨다면 폭력을 사라져야 한다. 폭력은 사회적 불안과 부조화의 증거이기에. 그러나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욕구도 충족되지 않았는가? 그렇다. 욕구, 욕망은 양면적이다.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충족되기를 강요당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가 하면 이에 저항하는 부정적 충동과 욕구가 있다. 풍요한 사회는 잠재되어 있던 이 결핍된 욕구를 건드리고 마침내 폭력은 폭발하고 풍요의 사회에 대한 저항성을 드러낸다. 이유 없는 무기력함, 만성적 피로 역시 폭력과 마찬가지로 풍요의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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