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가 신문기자로 근무했던 캔자스시티의 스타신문사 편집국장실에, 차림이 초라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손때 묻은 화첩을 들고 와서는, 편집국장 앞으로 가서, 내밀었습니다. 자신의 그림이 편집국장의 마음에 들어서, 신문삽화를 그릴 수 있게 되길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청년의 바램이었을 뿐, 편집국장은 화첩을 보자, 이내 탁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냉정하게, “전혀 대성할 싹이 보이지 않네요. 우리 신문사에서는, 당신의 그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면서, 내쫓았습니다. 그는, 실망으로 가득하여, 편집국장실을 나왔습니다. 이러한 그를 불쌍히 여겨, 목사님 한 분이 교회의 전도지를 그려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막상 기거하면서, 그림을 그릴 작업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쥐들이 우글거리는 교회의 작은 창고를 내 주었습니다. 여기서, 청년은, 외부와 단절된 채, 그림에 몰두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그림에 모델이 되었던 것은, 우글거리던 쥐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나왔는데, 그의 이름이 “미키 마우스”입니다. 이 청년은, 월트 디즈니입니다. 성공이라는 화려한 단어 뒤에는,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 자신과의 싸움을 했던, 삶의 시간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안장로교회의 원로이신 나겸일 목사님은, 세브란스 주치의 김병수 박사님으로부터 사흘이상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지만, 이에 승복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간암은 못 고치는 줄 알지만, 하나님은 세상도 창조했고, 인간도 창조했고, 간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붙드시면 간암이 나을 줄 믿습니다”라면서, 약 5: 15의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무모한 일입니다. 전문의가 사흘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죽기 전에 소원이라도 풀어보라는 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삶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았고, 이것을, 김병수 박사님은, “20년간 병원에서 주치의를 했지만, 이건 있을 수 없다면서, 100% 기적이라”고 하였답니다. 또, 여의도 순복음 교회 원로이신 조용기 목사님과 명성교회 원로이신 김삼환 목사님은 폐결핵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습니다. 이 분들이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가슴에 새긴 것은, 세상의 소리가 아닌, 오직, 주만 보고, 주의 음성만을 들으라는 것일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로, 본문에서부터 왕하 2장까지 그의 사역이 소개됩니다. 이러한 엘리야를, 우리는, “능력의 선지자”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워 승리했기 때문이고, 본문 1절에 제시된 것처럼, 그가 기도하기까지 3년 6개월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무덤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은, 왕하 2장을 보시면,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동화같은 내용입니다. 이러한 엘리야이지만, 본문은, 그에 대한 소개를 너무 간략하게 합니다. 1절을 보시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관심은, 엘리야의 출신이나 배경이나 나이와 같은 그의 스펙이 아니라, 그를 불렀을 때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그가 얼마나 순종했는지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엘리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지자로 준비되었고, 활동했는지를 살피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 - 4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고 합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는,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은 없다고 믿거나, 다른 우상들과 같은 존재로 여기던 시대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여러 신들 중에 가장 위대한, 하늘의 신인 바알만이, 참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성경의 위인들을 보면, 그의 족보가 나오지만, 엘리야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대상황이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본문 1절을 보시면,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아합은 당대 최고 통치자였고, 그 권세가 하늘에 달했던 왕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고, 뒤돌아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대로 당당하게 전하고 나온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어찌했습니까? 그것이, 지금 읽은, 2 - 4절입니다. 그릿 시냇가로 가서 숨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한 모세는, 그대로 행하자, 그를 불러, 다음 일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나약한 마음에 용기를 주었고, 확신을 주었고, 힘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을 살펴보면, 먼저, 그 곳을 떠나 동쪽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합니다. 다음은, 그 곳에서,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들을 통해 제공되는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생명을 무릅쓰고 일을 행한 자에게 주어진 것은, 도망자라는 신분이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주를 위해, 힘쓰고, 애썼건만, 돌아오는 것은, 낙망이요, 실패요, 좌절이요, 참기 힘든 모멸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신앙생활을 참으로 착실하게, 신실하게, 정성을 다해서 해 보셨습니까? 그러는 가운데, 주변으로부터 칭찬은 커녕, 모욕을 느끼고, 분노를 느끼게 했던 일을 겪어본 적이 있습니까? “애라 하나님은 무슨! 개뿔! 내 신세에 교회는 무슨 교회!”라며, 신앙생활을 단숨에 접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본문의 엘리야가 겪은 상황이 이와 똑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아합에게 가서, 하나님이 전하라는 말을 전하고 돌아왔는데, 영웅이 아닌 도망자로 전락했으니, 이것이, 기쁘고 감사할 일입니까?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일에 더더욱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목숨을 걸고 사지까지 가서, 충성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셨을까요? 그의 안전을 위해서일까요? 그렇다면, 아합으로부터 엘리야의 생명도, 보호하지 못하는 하나님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피난처인 “그릿”은, “자르다, 단절시킨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줄기는, 위치상 갈릴리 바다에서 사해로 이어지는, 요단강 줄기였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처럼, 우기에는 물이 넘치지만, 건기에는 거북등같이 바싹 말랐습니다. 그리고, 이 냇가는 지역을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으로 피했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었고, 분리였던 것입니다. 그럼, 이 곳에서 엘리야가 했던 것이 무얼까요? 그야말로, 아합의 추격에 대한 두려움 뿐이었을까요?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것을 “고립”이라고 합니다. 고립이란, 어떤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기간동안, 특정한 장소에 떨어져 있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어 세상과 단절시켰을까요? 그것은, 순종입니다. 세상의 소리도 아니고, 내 자신의 소리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소리만을 듣는 순종의 훈련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떠해야겠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하려면 할수록,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고, 고난 가운데 빠지게 될까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출 20: 4 - 5을 보시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왜? 고립시켰습니까? 왜? 세상과 단절시켰습니까?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면 할수록 힘들고, 어려운 일만 생긴다면,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고통을 겪으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합 왕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엘리야의 모든 활동을 중단시키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시켰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약속하신 대로, 까마귀들을 통해서, 음식을 공급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 8: 3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또한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동물입니다. 그런 짐승을 통해,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급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삼상 6: 12에 나오는 암소와도 같습니다. 보시면,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고 합니다. 새끼를 두고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입니다. 누가 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암소는 새끼를 생각하며,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 길로 곧게 갔습니다. 누가 이 암소를 훈련시켰나요?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행하심은, 우리로서는 알 수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 3: 11을 보시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들을 통하여, 음식이 공급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 때의 확신으로, 이후에 보면, 사르밧에 사는 여인의 아들도 살렸고,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까마귀를 아침, 저녁으로 보낸 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40년 동안 만나를 내리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주셨습니다. 한꺼번에 주셔도 될 것을, 매일매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매일매일, 한걸음, 한걸음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엘리야는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떡과 고기를 물고 날아오는 까마귀를 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또, 저녁에도 어김없이 떡과 고기를 물고 날아오는 까마귀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몸과 생각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기다리는 것이 새겨졌을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한 순간, 한 순간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바라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는 삶”을 쓴, 켄달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한 성공회 목회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교회에서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들이 하고 있는 일의 90%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이 계시지 않아도, 교회가 존재하고 일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들이 행하는 사역의 대부분이, 성령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회 뿐일까요? 성도된 우리는 예외일까요? 요한 웨슬레는 임종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고 했고, 빌리 그래함은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그 손을 내게서 거두시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다윗은, 시 51: 11에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아무리 열심으로 한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강하신 팔로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 순간마다, 매일 매일 붙잡아주시고, 인도해 주심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고 합니다. 고난 뒤에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지금까지 받은 훈련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까마귀를 통해서 음식이 공급된 것과 시냇물을 마시면서,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 아래서 영원히 흐를 줄 알았던 시내가 말랐습니다. 시내가 말랐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시기입니다. 시내가 마름으로, 엘리야는 그간 받은 훈련으로 인하여, “하나님, 시내가 말랐습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했을 겁니다.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9절입니다. 보시면,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음 단계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겨놓고는 잊은 것이 아닙니다. 사 49: 15을 보시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를 잊었다면, 하나님이 이런 말을 못 하시겠죠?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오늘의 우리에게는 “내가 너를 깜빡했구나”하지 않겠죠? 마 28: 19 - 20을 보시면, 하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분이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잊겠습니까?
우리는, 고난이 오거나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하거나, 나를 잊으셨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도 잊지도 않으십니다. 사 49: 16을 보시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었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힘든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40년씩이나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잊었습니까?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리게 했습니다. 요셉을 버린 것입니까?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시고는, 오랜 세월을 도망자로 살게 했습니다. 이것도, 다윗을 버렸거나 잊으신 겁니까? 왜? 이들이 당하는 고난에서는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까? 왜? 우리나라가 당하는 고난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까?
여러분, 우리 가정,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시내가 마른다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의 현실을, 우리 눈으로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경만 들고 왔다갔다 하거나, 예배당만 밟는다고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 갇혀있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 박제된 “죽은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일부 몇 사람만을 위한, 또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28년을 앞둔, 우리 신목교회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그릿 시냇가에 있는 엘리야처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행보를 잠시 중단하고, 그릿 시냇가로 가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를 보내고, 엘리야를 보살피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그릿 시냇가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다시 확인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교회를 위해서, 다시 한 번, 뜨거운 헌신과 믿음의 열정이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