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별 경기가 있을 때, 전직 선수였던 몇몇 사람들이 나와 해설을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이영표 선수가 해설하는 방송을 봅니다. 그의 해설을 보면, 분위기를 중시하는 다른 이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실전에서 쌓은 경험과 수집한 자료등을 통해, 분석한 결과를 가지고, 경기진행을 예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선수의 해설을 듣다보면, 우리 선수 뿐 아니라, 상대 선수들까지도 파악되고, 경기 전체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이영표 선수를 좋아하게 된 것이, 2002 월드컵 때였습니다. 포르투갈과의 경기에 출전해서 승리를 한, 뒤였습니다. 그 때, 그 선수는, 발목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거의 불가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전한 뒤에, 승리로 인해,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신문사는, “크리스천 투데이”였습니다. 이곳의 기자가 이영표 선수와 전화로 인터뷰한 내용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기자는, 먼저, “부상회복이 빨랐고, 회복 후 처음 나간 경기에서 승리까지 거둔 소감”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 선수는, “처음에 6주 진단을 받았는데 8일 있다가 다시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오셨는데 막상 다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월드컵에서 쓰지 않으시려나 하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 때 욥기를 읽고 나를 위해 무한한 큰 것을 예비해 주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월드컵을 이틀 앞두고 다쳐서 아쉽기도 했어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기도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만져주셔서 회복됐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마지막 포르투갈 경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영광 돌리게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선수는 욥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을 정한 뒤, 이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자 본사 홈피에 들어가서 발췌했습니다. 출전에 앞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출전한 것은, 그의 신앙을 이끌어 준,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이고, 또, 본인도 성경에서, 믿음의 롤 모델로, 욥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기자가 한 가지를 더 물었습니다. “부상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다 맞는것 같아요. 고난은 또 다른 축복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고난과 축복은 세상적인 눈으로는 상반된 내용이지만 크리스천에게 고난은 축복이고 축복은 곧 고난이라는 것. 고난은 하나님께 축복받는 자가 받는 것이고 고난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고난은 축복과 은혜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은혜를 주기 원하시고 축복을 주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을 통해, 우리나라 축구에 한 획이 그어졌던 2002 월드컵은 지금 생각해도 감동적입니다.
월드컵 이틀을 앞두고 큰 부상을 당한 이영표 선수는 이로 인해,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을 수도 있었습니다. 신앙의 진실은, 시련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욥이 당한 시련과 고난이 너무 크고 깊기에, 영국의 평론가 “카라이”는, “욥기는 펜으로 기록한 것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욥은,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는,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치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도 않고, 그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욥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8 - 19을 보시면,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고 합니다. 갑자기, 욥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욥기는, 잠언, 전도서와 함께 “지혜서”에 속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잠 9: 10을 보시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며, 욥 28: 28을 보시면,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욥”이라는 이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이름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핍박받는 자, 미움을 받는 자”라는 뜻도 있고, 아랍어로는 “돌이키다, 뉘우치다”라는 뜻도 있고, 일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족장시대의 인물인 만큼,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흔한 이름으로, “아버지가 어디 계신가?”란 뜻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살던 곳이, 아라비아의 북쪽지역임을 볼 때, 이름의 바른 의미는, 아랍어의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하나님께 원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욥의 상황을 마치 대변이라도 하듯, 서양 격언을 보면, “불행은 결코 한 가지로만 오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또, 세익스피어 역시, “불행은 한 가지로 오지않고, 여러 면에서 온다”라고 합니다. 이 욥은, 출애굽 400년 전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증손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겔 14: 14 - 20에서, 하나님은,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을, “공의로운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욥이 고난을 겪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완전한 의인”이었습니다. 욥이 겪었던 상황을 보면, 순식간에 재산과 가족과 건강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또, 방문한 친구들은, 욥을 향해 부당한 비난과 정신적 고통을 주었습니다. 종합해 볼 때, 욥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모든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당하는 고난의 끝에 처하였고, 누구하나 도움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욥의 고난을 보면서,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믿음을 지키면,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롬 5: 3 - 4을 보시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며, 약 5: 11을 보시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고난 속에서, 욥은 인내했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고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요셉도 종으로 팔려가 감옥에서, 믿음의 인내를 연단 받은 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욥 23: 10을 보시면,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합니다. 31장 앞에서는, 간간히 자신이 의인임을 말하다가 31장에서는 자신이 의인으로서의 행한 행위를 말합니다. 또, 33: 9을 보시면,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고했던 욥이었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로는, 자신이 미천하고 무지한 죄인임을 깨닫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42: 5 - 6을 보시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욥은 고난을 겪으면서, 이론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믿음이,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깊은 고난 속에서 슬퍼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겪는 고난의 현장과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는, 욥의 상황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욥을 롤 모델로 삼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이루심으로, 속히 회복의 그날을 맞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0절을 보시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라고 합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겉옷을 찢고”와 “머리털을 밀고”라는 표현은, 중동사람들이, 자신이 겪는 슬픔에 대해 비통함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자신을 비천하게 낮추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머리털을 미는 행위는, 유대인에게는 율법에서 금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엎드려”는 히브리어로 “이팔”입니다. 그 뜻은 “떨어지다, 자신을 밖으로 던지다”라는 의미로, 내 자신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욥이 당한 상황을, 일반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와 같은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환경이 철저히 무너진 상태이기에, 반사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한탄하기가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신에게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처한 고난 속에서, 그의 인생을 주관하시며, 그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엎드려 예배했습니다. 본문의 “예배”는, 히브리어로, “솨하”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절하다, 엎드리다”입니다. 주로, 하나님께나 왕에 대해, 공경의 표시로 엎드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구하는 겸손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며”라는 말에는, 고전 5: 18에서, 사도바울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라는 고백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종한다는 욥의 의지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겉옷을 찢으며, 머리털을 밀어 슬픔을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자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우리자신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복종시킴으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성숙한 믿음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욥은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닥친 재난으로 인해, 비탄에 잠겼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신구약 성경전체를 보거나,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만 봐도, 하나님과 분리된 이스라엘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떨어져서, 이스라엘이 개별적인 판단과 행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사사기 시대에 잠깐했다해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어불성설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본문의 욥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행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와도 같았습니다. 이를 볼 때, 성도인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의 개인적인 행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해하시겠지”는 우리 생각이고, 우리 바램이지,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판단이나 처한 상황보다, 언제나 하나님을 앞세운 것처럼, 우리도 언제나 우리의 판단이나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하나님을 앞세워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하나님을 앞세움으로, 어려울수록 더욱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침착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 40: 31을 보시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앙망하였기에, 비통의 순간에도,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욥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소에 예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의 재산이 다 있고, 가족이 다 있을 때나 그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했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서도, 하나님께 엎드려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중심은, 예배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삶 속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들이 줄 곧 일어납니다. 때때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평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승리가, 신앙과 삶의 승리이므로, 예배의 회복이 우선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으로, 말씀 안으로, 성령충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우리도 욥처럼, 예배를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1 - 22절을 보시면,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본문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과 사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를 보면, 여기서의 “그리로”는 앞의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몸이 모태로 들어간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당시의 생활은 “농업”이 중심이었기에, 여기서의 “모태”는, “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땅에서, 식물이 싹을 틔우고 자라는 것을 “출산”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창 3: 19에서,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어서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시오니”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풍성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사유였지만, 사유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한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5절을 보시면,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합니다.
욥은 이렇게, 날마다 경건 생활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갑작스러운 재난 속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고, 11절에서 참소한, 사탄의 예상을 뒤엎을 수 있었습니다. 또, 이것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하심이 옳았음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욥은 승리했고,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본문 전체를 보시면, 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은, 불신에서 나옵니다. 또, 자신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길 때 나옵니다. 또, 악한 습관 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은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10: 10을 보시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소망을 두고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을 의지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그랬기에,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보내신 것입니다. 본문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시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에서, “원망” 앞에, “어리석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티플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욥이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랬기에, 욥이,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은, 당연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가운데, 우리도, 우리의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참된 믿음의 시금석은, 고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나의 유익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것에 대해, 원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믿음과 삶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있는 세상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시험과 고난을 준비하여, 우리 앞에 놓지만, 우리는 욥처럼, 믿음과 예배와 찬송의 성도가 되어, 승리하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고난을 이겨내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