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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 1: 1 - 8 질투하고 보복하시는 하나님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18.03.18|조회수409 목록 댓글 0

인터넷에서 “agnes”라는 아이디를 가진 분의 Q. t를 보았습니다. 그는, 레위기를 읽는 가운데, 19장과 20장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두 얼굴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량없이 자비하고, 긍휼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19장에서 20장으로 넘어가면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리가 띵해지면서, agnes님은,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는 헐크와 하나님을 오버 랩하게 됩니다. 그는, 어쩌면, 그리도 온화하시던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하신 걸까? 하나님도 두 얼굴을 가지셨나?”라며, 어리둥절해서는, 본문의 글자를, 하나하나 뜯어 읽으며, 묵상하는 가운데, 두 얼굴의 하나님이심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비단같은 하나님이실지라도,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를 하거나, 하나님을 저주하는 신성모독등 율법에서 금한 죄를 행하는 겁니다. 이렇게, 묵상을 하는 가운데, 아이들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떠올랐습니다. 자신은, 두 아이의 엄마로서, 자녀들에게 한없이 자애롭고 싶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퍼주고 싶고,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자녀들 곁에 조력자로 있고 싶지만, 때로는, 엄마로서, 용납못할 과도한 것을, 자녀들이 요구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다른 가치관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q. t를 통해, 두 얼굴의 하나님을 만났고, 이로 인해, 자녀양육의 큰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안 되는 것 외에는, 양보하며, 끝없이 사랑해주자. 절대로 안 되는 일에 관해선, 무시무시하게 엄격한 엄마, 그러나, 나머지 부분에서는, 솜사탕보다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두 얼굴의 엄마가 되겠다는 겁니다. agnes님은, 19 20장을 묵상하는 가운데, 혼돈과 공허의 상태를 경험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보았던 겁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와 같이,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이 소개됩니다. 평소에는, 사랑을 앞세우는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공의를 앞세움으로, 마치, 세상에 대한 심판을 즐기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공의의 하나님, ? 심판의 하나님으로 보여지게 될까요? 이 문제는, 오늘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할 정도였고, 노예와 주인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본문이 기록된 나훔서는, 내용상으로 볼 때, 요나서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 성경에서는, 성경의 배열 순서에 있어서, 요나서 뒤에 나훔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서 전편, 요나서 후편이라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요나서와 나훔서 사이에, 100년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외침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왔던 앗수르가, 나훔 시대로 와서, 다시, 악의 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앗수르를 향해,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겠다며, 나훔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셨고,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이렇게, 앗수르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넘치던 분이, 갑자기 채찍으로 내려치고, 거칠게 분노하는 하나님의 두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사람들에게는, 사랑으로 가득했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며, 성부께 기도했던 예수님이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성 안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장사하던 자들을 향해, 분노하시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본문 2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 진노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에게 분노합니다. ? 그럴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괘씸함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반기를 든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입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악인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그들이 행하는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왜? 추방되었습니까? 때문입니다. 그 죄가 에덴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에도, 하나님께 순종한 노아의 가족들 외에는, 모든 사람들을 홍수 속에서, 수장시켰던 겁니다. 이렇게, 악인에 대해, 악과 함께 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본문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질투라고 함은, 불같은 감정이라든가, 소유욕에 의한 죄악 된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질투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질투는, 항상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해 품으신, 성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질투, 히브리어로 카노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얼굴이 붉게 변하는 것입니다. , 보복, 히브리어로 노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싫어하다, 앙갚음하다, 원수갚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첫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대로 읽으면, 질투하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가 됩니다. 그리고, 진노는 히브리어의 헤마, 뜨겁다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질투와 복수와 진노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이를 통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강한 지를,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가 누굽니까? 본문에서는 앗수르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생활자체가 우상숭배였지만,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23: 22을 보시면,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고 합니다. , 12: 3을 보시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앗수르가 하나님으로부터 공의의 심판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죄로 인해 타락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성민인 이스라엘을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당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 자신이 당하는 것으로, 동일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52: 4을 보시면,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전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에 거류하였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한 그 분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는 누굽니까? 이는, 하나님께 대항한다는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 자신의 지식과 경험만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 현대인들은 심각한 부도덕 속에 빠지는가? ? 우리는 도덕 불감증의 사회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윤리학자인 라인홀트 니버 박사는, 그것은 한마디로,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살전 5: 22에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성민인 우리가 을 품는 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 17을 보시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날마다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시간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성입니다. 이 죄성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이길 수 있고, 우리를 하나님께 내어놓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아픔과 고통, 환난과 고난에 대해, 하나님 자신이 겪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성도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을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다음 한 주간도 믿음 안에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먼저, 행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행하심에 있어서, 한 박자 늦게 행하신다는 겁니다. ?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시면, 거기에서, 벗어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후반부를 보시면,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관자이시기에, 온 천지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회오리바람은 히브리어로, 수파라 하며, 그 의미는, 끝내다, 앗아가다, 멸망시키다입니다. 그래서, “70인경에서는, 파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광풍은 히브리어로, 사아르라 하여, 그 의미는, 떨다, 두려워하다, 공포에 떨게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티끌은 히브리어로, 아바크라 하여, 그 의미는, 사라지다, 날아가다, 아주 미세한 먼지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은, 사람이 근접조차 할 수 없는 권능으로, 승승장구하던 애굽이나 앗수르에 대해, 흔적조차 없도록 파멸에 이끄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부당한 것에 대해, 불의에 대해, 일일이 심판하시며, 공의로 이끌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공의로 세상을 이끄신다면, 과연, 성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셨을까요? 가끔, 기독교인들 가운데,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안목대로 세상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며, 하나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이것은, 성령 훼방죄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으로, 그에게 아무런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끌고, 우리를 대하되, 우리에게서, 우리의 죄를, 먼저 찾아서, 살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먼저 찾으시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를 먼저 찾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 17을 보시면, 에덴에서 첫 사람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그들이 선악과를 먹자마자 죽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의 노하기를 더디하시며라는 말씀은, 심판의 대상인 앗수르가 이방국가라 하여, 무조건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 기회가, 요나서와 나훔서의 100년의 기간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분노의 구체적인 예를 들면, 노아의 홍수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6: 5 - 7을 보시면,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선, 당시의 세상에 대해, 대단히 분노하셨습니다. 그것은, 악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즉시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13절을 보시면, 우선, 노아를 택하여,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노아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는데, 그 기간이 무려 120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까지 기다리셨던 겁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심에 있어서, 서두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집행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의 공의는, 회개에 대한 촉구가 되기도 합니다. 기다리고 참으면서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때, 하나님의 공의는 최후의 수단으로 집행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인내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신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다림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의 중간을 보시면,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후 3: 9을 보시면,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합니다.

 

미국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인 로버트 잉거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설을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시계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순한 사람을 죽음으로 벌하신다고 했는데, 내가 시험해 보겠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하나님을 모욕하고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성경말씀처럼 하나님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자를 죽음으로 벌하시는지 보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욕한 나를 금방 죽이시겠지요. 5분간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4분이 지나자, 잉거솔은 입을 삐쭉거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5분이 지나자, 잉거솔은 다시 시계를 주머니에 넣으며, 여러분, 보셨지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셨다면 저는 벌써 죽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며, 강단을 내려갔습니다. 이 일이 그 지역에서 목회를 하던, 테오도르 파커목사님에게 들려지자, 목사님은, 크게 웃으시며, 그 양반은, 하나님이 겨우 5분도 인내하지 못하는 분으로 생각했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 다하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는 지,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피하는 자들에게 보호처가 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는 말씀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행할 당시, 가장 위로를 받은 말씀으로, 힘을 얻고 소망을 얻었던 말씀입니다. 18: 2을 보시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일이 평탄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요, 산성이요, 피난처이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환난이 닥쳐왔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지켜주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산성이 되지는 않는 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의 산성이 되실까요? 본문을 보시면,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고 합니다. , 오직,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산성이 되어 주십니다. 여기서, 피하는, 히브리어로 하싸입니다. 그 의미는, 의뢰하다, 의지하다입니다. , 아시느니라, 히브리어로 아다입니다. 이는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은, 가장 정확하게 아는 겁니다. 그렇듯,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아심으로, 환난 날에 산성이 되십니다. 3: 16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그 자녀를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을 알고, 보호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아시며, 그분의 보호하심을 받는 자입니다. 여러분!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분명, 질투하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질투와 보복은, 하나님이 아시는 자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자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위협하는 자에 대한 질투와 보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알며, 환난에서 건지시는 산성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가진 모든 무거운 짐을 내어맡김으로, 기쁨과 감사로 지내는, 한 주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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