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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딤후 1: 6 - 8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18.03.25|조회수192 목록 댓글 0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 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인 것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은, 왕으로서의 입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화려하지 않는, 겸손한 가운데서의 입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수난의 길로 나아가신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껏 지내온, 사순절에서와 같이, 이 한 주간동안은, 오직,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맞춰야 합니다. ? 이 땅에 오셨나? ?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 고난을 당하셔야 했나? ? 십자가에서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죽으셔야 했는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주일에 맞이하는 부활절이, 매년 행하는 연례행사가 아니라, 그 부활절이 있기에, 나에게 소망이 있으며,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나 또한 부활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불가능이 없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기에, 10, 20년을 믿어도, 언제나 변함없이, 처음 믿는 자가 되어,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절정이며,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고,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증표입니다. 결혼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반지가 필요한데, 첫째는, “약혼반지이고, 둘째는, “결혼반지이고, 셋째는, “고난반지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의 반지를 다 갖고 계신 분 계십니까? 이 말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생이 시작되는 곳에, 고난도 함께 시작된다라기도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많은 자들과 경쟁을 하는 가운데, 수 많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솔제니친은 서방에 진정한 작가가 없다면, 그것은, 서방에 진정한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라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진정한 문학을 창출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고통이 없다면 예술과 문화는 매우 제한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삶 속에서의 고난은, 복음의 영양과 가치를 높여줍니다. 탈무드를 보면, 사람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님께서 검은 동자를 통해서만, 사물을 보도록 하신 것은, 고난을 통해서, 밝은 빛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고난 속에서, 인생은 더욱 빛나며, 고난 속에서 피운 꽃은, 더욱 향기롭습니다. 골프공이 우둘두툴합니다. 저는 골프공이 처음부터 그랬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탁구공과 같이, 매끈했답니다. 그런 가운데, 더욱 멀리 날아가는 것을 연구하면서, 딤플이라는 홈을 내어보니, 그로 인해, 더욱 멀리 가더랍니다. 그래서, 홈을 많이 내었고, 공에 따라서는 420개의 홈을 가진 공도 있다고 합니다. 이 홈으로 인해, 공기의 저항을 헤치며 날아가고, 회전도 하게 된다고 합니다. 119: 67을 보시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합니다. 시인이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된 것은,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복음 안으로 더욱 들어가게 되고, 말씀 앞에 엎드리게 되고, 순종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 벧전 3: 14을 보시면,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편하게 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것이 복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해서는,

 

본문 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은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신비한 것이기에,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은사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을 볼 때, 은사는 신비한 것이 아니고, 비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믿고, 의지하는 성도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사라는 말을, 누구에게 주어진 선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일반적인 선천적인 재능과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인 은사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선천적인 재능을 보면, 모차르트의 작품은, 어릴 적에 쓴 것이나 청년 시절에 쓴 것이나 비슷하다고 합니다. 여섯 살 때부터 작곡을 했다는 모차르트는, 태어날 때부터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주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능에는, 제한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진 재능을 통해, 성공할 수 있어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부르심으로, 그가 선천적인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의 재주로, 교회를 세우거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중심적이기에, 무엇을 하든, 자신을 위해서 하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행할 뿐입니다. 하지만, 은사를 사용하는 자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성도들에게 주의 은혜를 전달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천적인 재능을 사용하는 자와 은사를 사용하는 자의 차이는, 하나님 중심이냐 자기중심이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히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물을 주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 더욱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겁니다. , 다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둘씩 팀을 이루어, 전도실습을 보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놀라운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을 다녀오는 사이에, 제자들은, 아무것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을 보면,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를 행했지만, 자신과 디모데를 위해서는, 행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나 사도바울이 행했던 것이, 그들의 재능이라면, 어디서든 행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재능이 아니었기에,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행하시는 은사가, 디모데에게, 다시 일어나도록, 바울은, 디모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지금, 매우 침체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의지하며, 아버지와 같이 여기고, 목회의 멘토였던 사도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고난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바울은 다시 불일 듯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원어적으로 보면, 불타오르게 하라는 겁니다. 디모데 안에 있는 사명이 다시 불타오르게 한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생활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다보면, 하나님도 생각나지 않고, 기도도 강 건너 가고,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성난 노도와 같이 밀려들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밀려가면 안 됩니다. 그러한 성도들의 곁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바울과 같은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구역모임이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각 기관, 각 부서의 모임이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교제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은사를 왜? 주실까요? 자랑하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은사받았다고 힘주고,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들을 봅니다. 은사는 선물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우며, 다른 성도들을 더욱 잘 섬김으로, 교회에 유익이 되라고 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더 큰 일들을 행할 수 있도록,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려야 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함으로, 믿음 안에서 깨어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더 많은 일, 더 큰 일들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 유익이 되어, 주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침체된 디모데로부터 생각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단,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침체되었다는 것은, 두려움에 빠졌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키텔이라는 성경사전을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서, 360번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어떤 이는, 1365일 동안,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니,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장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왕들과 싸워서 승리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후손이 없다고 하자, 하늘의 뭇별과도 같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시, 그의 백성, 그의 종이 두려움에 있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약속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해야,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조건 세 가지가 본문에 나옵니다.

 

첫째는, 능력입니다.

능력뒤나미스,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입니다. 산을 가르고, 커다란 바위를 쪼개는 강력한 힘, 강력한 능력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능력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능력이었던 겁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그래서, 4: 13을 보시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던 겁니다. 이제, 이 믿음을, 디모데에게 다시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능력을 믿습니까? 이 능력의 주관자가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안에 이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까? 이것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예수님의 부활로 증명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행할 때는, 실패와 좌절 뿐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움에 둘러 쌓이게 됩니다. 이제는, 이러한 내 자신을 떠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시며, 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부활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 능력은, 사망권세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 복음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 능력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킨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떠난 뒤, 제자들은 두려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해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아십니까? 기억하십니까? 제각기 다른 질문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 중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우리가 압니까? 기억합니까? 믿습니까? 자신의 아들이 간질로 인해 고통을 당하자, 그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이든 행하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합니다. 15: 13 14을 보시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압니까? 기억합니까? 믿습니까?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나를 위해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랑을 무엇으로 들려주며, 무엇으로 확신시켜 준단 말입니까? 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보다 더 큰 것이 무엇입니까? 이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겁니다.

 

셋째,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본문을 직전 성경인 개역성경은,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행에 있어서, 삼가고 조심하려면, 절제하려면,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나태함, 게으름 속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안에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믿음의 고백이며, 확고하게 성도로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마구잡이 세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세례를 받고도, 믿음 안에서 잠자는 자, 나태한 자, 게으른 성도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벧전 5: 8을 보시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합니다. 26: 41을 보시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합니다. 21: 36을 보시면,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6: 18을 보시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하며, 4: 2을 보시면,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믿음에서 깨어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복음 때문에 갇힌 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어느 시대나 고난을 동반합니다. 고난을 동반하는 것이 복음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고난을 동반하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1: 16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본문에서,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아니면, 고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랬기에,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고난이었지만, 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고난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 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던 겁니다. 여러분, 바울은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찾았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뒤를 따라 목회자로, 사명자로 살아갈 디모데에게 믿음의 다짐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지하던 바울이 옥에 갇혀 어려움에 처하자, 의기소침했던 겁니다. 찬송가 339장을 보시면, 1절에, 내 주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를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으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딤후 4: 8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합니다. , 8: 18에서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과 의의 면류관을 위해, 삶 속에서, 복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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