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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출 16: 31 - 36 하나님이 날마다 내게 주시는 양식.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14.07.15|조회수82 목록 댓글 0

노숙자 출신으로 30대에 재벌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하루는 길거리를 다니는 데, 고급 세단차가 지나가더랍니다. 그것을 보고, 세상은 불공평하다 누구는 고급차를 타고 다니고, 누구는 깡통이나 차고 다닌단 말이냐? 하면서, 나무를 붙잡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결심했습니다. ‘나도 사업을 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겠다’하고는 사업을 위해, 세일즈를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는 고급차들의 차번호를 적어 그 차주의 주소를 알아내서 물건을 팔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도시의 유지급들을 고객으로 삼았는데, 유독 한 사람만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 주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이번에는 무작정 나무를 붙잡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가 붙잡은 말씀이 야고보서 1: 5입니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 이 책은 하나님께서 쓰신 줄로 믿습니다. 이 책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하고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를 읽고, “다른 사람은 다 만나서 제 고객으로 삼았는데, 이 사람만 유독히 저를 만나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했으니, 제가 이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요”하고 기도를 한 후, 떠오르는 데로 그 사장에게 보낼 편지문을 작성해서는 예쁜 박스에 담아서 비서에게 전달했습니다.

비서가 무엇이냐?고 묻자, 사장님이 늘 바쁘셔서 저를 만나주지 못하시기에 편지를 썼으니, 사장님께서 들어오시면 제대신 전해주십시오. 하고는 비서실을 나왔습니다. 비서에게 박스를 전달받은 사장은 호기심에서 열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편지 한 통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사장님, 저는 날마다 하나님은 만나는 데, 어째서 사장님은 한 번도 만날 수 없나요? 사장님이 하나님보다 더 높으신가요?” 사장님은 편지를 보자마자, 미안했는지 전화를 걸어 그를 만나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물건을 팔아주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도시의 유지급들 모두를 자신의 고객으로 삼고, 30대에 재벌이 되었답니다. 누군지 궁금하시죠? 폴 마이어입니다. 그는 자기 수입의 50%를 기부한다고 해서, 기부왕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폴이 일반 노숙자들처럼 일하기를 거부했다면, 그는 젊은 나이에 재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기도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16장 전체를 보시면, 온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약 한달 후, 그들은 신 광야에 이르자, 몹시 굶주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애굽을 떠나기 전, 약 한 달치의 식량을 준비하라하여 준비한 것이 이제는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둘씩 자신들에게 닥친 암담한 현실을 보고, 불평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 곳까지 오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보았기에, 또 그 결과에 대해 찬양했기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지도자인 모세에게 가서 의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함께 기도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문제가 생기자, 여지없이 불만 불평으로 돌아섰습니다. 이 때까지 자신들을 돌보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 그리고 인도하심은 온데간데도 없고, 오직 눈 앞의 참담함만 보입니다. 머릿 속에도 온통 참담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으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4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순종여부에 대해 테스트를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알고자, 그들의 현실적 필요성을 가지고, 그들의 순종여부를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불순종이 딱 걸렸습니다. 19절을 보시면, 아끼지 말고 모두 먹음으로 다음날까지 남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남김으로 벌레가 생겼고,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또, 26절에선, 분명 안식일에는 만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7절을 보니까, 안식일에도 만나를 구하러 나갑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이제, 본문 32 - 34을 보시면,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에게 주신 만나의 일부를 남겨서 “후손에게 증거삼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심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광야에서 40년간을 다니게 하면서, 낮에는 구름판으로 밤에는 불판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심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음을 후손 대대에 알리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그 분이 행하신 것이 당대에 찬양받고 영광 받는 것은 물론, 후대에 이르기까지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늘 채워주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며, 그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들을 주변에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간증입니다. 간증을 통해 자신을 내세우려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간증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는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보복을 피해 도망쳐서 숨어있던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런데 보면, 여기서의 떡은 본문에서는 만나로, 고기는 메추라기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분의 백성들에게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십니다.

여러분, 지난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더위 속에서 짜증은 나지 않았나요? 또 지내시면서 삶에 만족은 하셨나요? 삶 속에서 필요한 것은 없었나요? 부족한 것은 없었습니까? 있었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충족하셨죠?

저는 고2때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결같이 자기 일을 자기가 책임지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 일만 생기면 하나님을 들먹거립니다. 기도하는 것이죠.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때, 기도하지 않는 기독교인을 만났다면, 기독교인들을 다르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그만 일에서도 ‘주여 주여’를 찾고, 기도한다고 했기에 기독교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인이 참으로 싫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정말 존재감이 없는 자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존재감이 없는 사람으로 전염시키는 숙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 여러분도 존재감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구하세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한번 쯤 모른척하고 하나님께 요청해 보세요. 여러분이 직접 충당하려한다면, 하나님은 영원토록 여러분에 대해 뒷짐이나 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분을 뒷짐이나 지고 계신 분으로 대우하는 것은 그 분에 대한 경멸입니다.

저는 가끔 낭만논객을 봅니다. 거기 나오시는 김동길 박사님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하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라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되실 것이라고 생각하죠? 초등학교 교사를 맡아도 잘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을 초등학교에 계시게 하는 것보다, 대학 강단에 보내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 분이 낭만논객에 출연하시는 것도, 방송을 통해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도 그 사람의 역량에 맞게 직분을 맡겨야 하는데,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우리의 삶 한 쪽 구석에 모셔둔다면, 그 분을 대우하는 것일까요? 그 분을 믿는 것일까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 분을 바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알라딘의 램프요정처럼, 하인으로 부려서는 안 되겠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이 그 분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이 감추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온 세상으로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행하심보다 내가 행한 것을 앞세우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이 됩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이라는 것을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교만’ 국어사전에서는 ‘잘난 체하고 뽐내고 건방진 것’이랍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약간 다릅니다.

성경 속에서의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신 것들, 하나님의 흔적들은 모두 들추어서 알려지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외의 것이 행한 행위에 대해서 그것이 알려지는 것은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이란, 하나님과 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즉,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행위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감으로 선악과를 먹게 된 것도 창 3: 5을 보시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영광받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혼자서 드러나길 원하시기에 하나님의 행적들에 있어서는 자취를 남기십니다. 그래서, 만나도, 홍해의 돌들도, 요단강의 돌들도 모든 것에 흔적을 남겨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행하심에 영광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원하심에 따르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으려는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은 교만이라 하며,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후손들에게 알리라고 하신 것은, 교육면도 있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을 시간을 초월해서 모든 이들에게, 모든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남긴 이것들을 보고, 그들이 조상들처럼, 하나님께 경배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확신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십니다.

둘째로, 35을 보시면, 40년간 만나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 약속의 그 땅을 찾아 올 때까지 하나님께선 계속해서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준비한 양식이 떨어지자, 그들 스스로가 양식을 충족시킬 때까지 공급하십니다. 수 5: 12을 보시면,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와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자력으로 땅의 소산물을 먹게 되자, 만나공급을 중단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때, 그 분은 우리에게 손을 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떼실 때 즉, 만나를 주시지 않아도 될 때가 언제입니까? 여러분의 현재 목표를 달성했을 때입니까? 자녀들이 부모가 원하는 목표에 달했을 때입니까? 언제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공급하시던 만나를 공급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만나공급이 끝나는 그 시기를 이 땅에서 찾아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면서까지 그 분이 목표로 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그 곳에 이르러 그 곳의 과실을 먹게되자 그제서야, 만나공급을 중단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이때가 언제일까요? 우리의 인생여정을 광야길이라고 표현하죠? 그러기에, 가나안 땅을 천국에 비유하는 것이 무리가 되진 않겠죠? 찬송가에도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가 있잖습니까?

천국에 들어가서 그 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킬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각 개인에게 필요한 만나를 계속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만나를 공급받는 것은, 아버지가 가족들의 만나를 모두 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부모의 만나를 대신 받는 것이 아니라, 5살, 6살의 어린 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각자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부모된 자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만나를 공급받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 합니다. 그리고, 메추라기를 먹다가 고기가 입에서 씹히기도 전에 징계를 받은 것을 기억하여, 언제나 하나님께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또한,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잠 22: 6을 보시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평생 자신이 필요한 만나를 공급받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르치지 않기에, 자녀들이 성장해서는 하나님을 곁을 떠나기도 하고, 하나님을 건성으로 마치, 삶의 악세서리격으로 믿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부모의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참으로 신실한데, 자녀가 형편없는 것을 종종 봅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을 가나안 지역으로 이끌어서 가나안을 정복한 1세대들은, 여호수아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 여호수아의 맹세와 함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라고 수 24: 16에서 맹세를 합니다. 하지만, 삿 2: 8 - 10을 보시면, 이렇게 맹세한 1세대들이 다 가고 난 뒤에, 일어난 세대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잠 22: 6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광야길을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만나공급을 받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지속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면서 지내야지, 하나님의 은혜쯤이야? 하실 분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지켜주지도 않고, 하나님께 간구할 줄도 모른다면, 교회는 왜? 나오고, 하나님은 왜? 믿습니까?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기에, 지켜주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따라 행하니까 하나님께서도 방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가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이 아닌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에, 그 분을 경배하러 일찍부터 서둘러 나오셨죠?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시간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로 채워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처음 시작할 때의 예화에서는 기도를 말씀드렸고, 말씀강론에 있어서 첫 번째에서는 증거삼을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증거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간증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에서는 은혜받으며 살아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식량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자, 원망했지만, 결국 하나님께 아룀으로 즉, 기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만나를 공급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공급받은 것처럼 우리는 매일매일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받은 만나를 별도의 항아리에 담아서 후손에게 증거를 삼았듯이, 우리는 우리가 삶 속에서 받은 은혜우리만 알고 우리 안에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우리 각 자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으며, 그 은혜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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