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과 “햄릿”으로, “연극의 대부”라는 호칭을 받았고, 아카데미 작품상, 오스카 최우수 남우 주연상을 받았던, “로렌스 올리비에”의 명성은, 로마의 명성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배우가 되고자 극단에 들어갔지만, 오랫동안, 배역을 받지 못한 채, 허드렛일만 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기회를 기다리며, 기약없는 허드렛일을 하는 가운데,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배역을 맡았던 자가 연극 무대에서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리비에가 그의 배역을 대신하게 된 겁니다. 이 때, 맡았던 역할은 간단했습니다. 궁궐로 뛰어가, 왕에게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리비에는 이 역할을 위해, 군복을 입고,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2 – 3시간동안 극단 주변을, 계속해서 뛰어다녔습니다. 마치, 멀리있던 전장터의 소식을, 왕에게 아뢰고자, 급하게 달려온 군인처럼 보이기 위함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의 차례가 오자, 그는, 수일을 뛰어온 사람처럼, 왕 앞에 털푸덕 엎드리면서, “폐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불과 30초의 장면이었지만, 올리비에는 이것을 위해, 극단 주변을 계속 뛰었기에, 아주 실감나는 연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단역을 계속해서 맡게 되었고, 다시, 조연으로, 그리고는, 주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최문경 목사님이, 평신도를 위한 성령론을 집필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순간을 살아서 영원으로”입니다. 책의 제목에,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책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소개되는 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이 “런던의 니콜라이 집사”이야기입니다. 소개해 드리면, 런던 켄터베리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를 하던 니콜라이는, 17세에 관리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청소와 심부름 같은 잡다한 일과 함께, 매일을 정확한 시간에, 5분씩 종을 쳤습니다. 그가 얼마나 정확하게, 종을 쳤던지, 런던 시민들은, 니콜라이의 종소리를 괘종시계의 소리처럼 여기고, 여기에 시간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앙 안에서 잘 양육된 두 아들이,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그러자, 아들들은, 아버지 니콜라이에게, “아버지, 이제는, 관리집사 일을 그만 하세요”라며, 관리집사의 일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그 때마다, “아니야, 나는 이 일을 끝까지 해야 해”라면서, 7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59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종을 쳤습니다. 그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최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둘러앉아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종을 칠 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종탑 아래로 가서, 약 2분간 종을 치다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야말로, 니콜라이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맡은 직무에, 죽도록 충성하였던 겁니다. 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감동을 받아, 니콜라이를 황실 묘지에 안장하도록 했습니다. 또, 그의 장례식 날에는, 런던에 있는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유흥업소들도 자진해서, 하룻동안 영업을 쉬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자연스럽게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위기 속에서도, 왕께 충성하는 용사들이 소개됩니다. 충성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계산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은,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고 따르는 겁니다. 그러기에, 충성하는 자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행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룬 일을 원하겠습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분께, 우리가 이룬 일이 보일까요? 그럼,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달란트 비유를 보면, 대부분이, 남긴 것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그 비유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충성이 보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했던 겁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과에만 몰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충성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4: 2에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충성이,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노아가 산 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을 때, 주변 사람들이, 노아를 정상으로 보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의 충성을 보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용사는, 이와 같이,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충성했던 자들입니다. 바라기는, 이 시간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어, 사명을 다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존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는,
첫째, 잘 들어야 합니다.
본문 14 – 15절을 보시면,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라고 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다윗의 세력이 더욱 강력해질 것을 염려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향해 선제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둘람 근처에 있는 산성으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이때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이었고, 블레셋은, 사울과의 길보아 전투로 인해, 베들레헴을 차지했을 때입니다. 다윗은, 적국의 점령지가 된 고향 베들레헴을 그리워했습니다. 고향을 근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다윗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쳤습니다. 그 가운데,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이 그리웠습니다. 어릴 적 목동으로 지낼 때, 늘 마시던 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향의 맛은, 전쟁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아!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고 싶다. 누가 나로 저 물을 마시게 할까?”라고 내뱉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그를 경호하던 세 용사가 들었습니다. 충성의 첫 번째는, 잘 듣는 겁니다. 이렇게 듣는 것은, 상대의 말 아래에, 내 자신을 내려놓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생활하시죠? 그 가운데, 어떤 이의 말은, 좌로 왔든, 우로 왔든, 반대쪽으로 훅하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어떤 이의 말은, 좌로 왔든, 우로 왔든,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안에서 둥지를 틉니다. 그러면서, 그의 행동이 눈앞에 자꾸 밟히지 않습니까? 언젠가, 런닝맨을 보는 가운데, 일본공항에서, 이광수씨에게, 전소민씨가, 인형을 사달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광수씨는 거절했지만, 결국, 전소민씨 모르게 인형을 사서, “너 이거 갖고 싶어했지?”라며 전해주는 것을 봤습니다. 자신을 전소민씨 아래에 놓았기에, 전소민씨의 말이, 그의 가슴 속에 들렸던 겁니다. 본문 15절에서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라고 한 것은, 지금 당장 마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부하들에게 당장, 떠오라고 명령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세 용사는, 그 말을 듣고, 적진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다윗 아래에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가졌던 지혜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그는 들었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셨을 때,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전무후무로, 지혜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듣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았고, 상대의 말을 들을 줄 알았고, 자기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도 들을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예화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예화만 기억하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예화는 잊으셔도 됩니다. 롬 10: 14을 보시면,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합니다. 결국, 믿기 위해서는, 전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겁니다. 마 13: 13을 보시면,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합니다. 듣지 않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에바다의 은혜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결단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라고 합니다.
세 용사는,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이 먹고 싶다는 다윗의 말을 듣고, 조용히 베들레헴 성문 곁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있던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약 50리 정도 됩니다. 그들은, 왕복 100리 길을, 오직 물을 구하러, 적진을 돌파하여 왕래했던 겁니다. 이 거리는, 왕복이 약 40km의 거리인데, 우리교회에서 신림동까지를, 적군을 피해, 왕복한 것과 비슷합니다. 이 세 명의 용사들이 행한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 한 병에, 자신의 생명을 건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들은, 어리석을 정도로, 다윗에게 충성했습니다. 이들의 행동이, 시작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성적인 판단이나 계산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주군인 다윗에 대한 충성, 그 자체였습니다. 아둘람 근처의 물은 좋지 않습니다. 그랬기에, 다윗은, 자신이 어릴 적 먹던 베들레헴의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더욱더 그리웠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지금, 전쟁터에 있는 군인으로서 잘못된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아는 세 용사는, 베들레헴에 주둔하고 있는, 블레셋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우물물을 길어왔습니다. 2011년에, 애플사의 제품을 너무 선호한 나머지, 자신의 신장을 팔아, 아이패드2와 함께 휴대폰을 사서 귀가한 17세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신장을 약 360만원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자신이 원했던 아이패드2와 휴대폰을 샀습니다. 그는, “아이패드를 너무나 사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인터넷에서, 신장을 팔면 돈을 주겠다는 광고를 보고, 연락했습니다”라면서, 신장을 팔게 된 동기를 밝혔습니다. 옛말에, “건강한 거지가 병약한 황제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년의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그리고, 애플사의 지나친 광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당장은 필요하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아이패드를 사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팔았다는 것은, 그 소년 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잘못된 가치관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어찌, 이 소년뿐이겠습니까? 이러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용사의 충성된 행위는, 해도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했습니다. 미국 연합 그리스도 교회의 목사였고, 콜롬비아 신학교의 교수를 지낸, “월터 브루그만”목사님은, 본문을 주석하는 가운데, “그들에게는 남다른 용기와 충성심, 그리고, 사랑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용기와 충성심에 있어서, 모델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라며, 극찬했습니다. 세 명의 용사들은, 다윗을 위해, 자신의 생명도 내놓을 만큼, 충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한 것에는, 포기가 있어도, 왕이 기뻐하는 것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피곤한 가운데서도, 왕 주변에서, 왕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충성이, 왜? 본문에 소개되었을까요?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피면, 이 내용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다윗에게 세 용사가 있었으니 그들은, 이러이러하다라면서, 18절 이하로 직결해도, 내용의 흐름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기록되었을까요? 이들은, 충성된 성도들의 모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섬기는 모습 속에서, 오늘날,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러한 충성을 먼저, 소개하고, 이어, 18절 이하에서, 그들의 뛰어난 능력을 소개합니다. 이곳을 보면, 그들은, 다윗의 수하에 있는 30명의 지휘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용사들이었습니다. 아비새는 일당 300의 장수였습니다. 또, 브나야는, 장대한 애굽 사람이 창을 들고 있어도, 막대기를 들고 싸워,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죽인 장수였습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의 머리를 친 것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세 명의 용사는, 다윗에게 충성하는데 있어서, 댓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다윗의 왕권 초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다윗이 왕권을 확립하기 전이기에, 그들에게 어떤 대가를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용사들은, 다윗에게 충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세 용사처럼, 하나님께 충성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계 2: 10절을 보시면, 환란과 핍박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우리도, 다윗의 세 용사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길어 오는 결단을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 더욱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고 합니다.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다윗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제로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라고 합니다. 세 사람이 떠온 물은, 물이 아니라, 그들의 피였던 겁니다. 세 용사는, 다윗에게,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피를 드렸던 겁니다. 다윗은, 이들이, 충성으로 떠온 물을 받고서야,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물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다윗이 왜? 이같은 실수를 했습니까? 본문을 보시면, 다윗이 하나님을 잊고, 자신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회개”라는 말을 하면, 죄도 없는 데, 왜? 회개해야 되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신뢰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회개”라는 말이, 가장 인기없는 말이 되었고, 은혜받는 설교에 있어서는, 금지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 속에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달리는 사슴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이 충성으로 전하는 물을 받는 것이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하들로부터 받은 물은, 물이 아니라, 피였음을 느꼈던 겁니다. 이와 같이, 회개는, 하나님 앞에 서게 함으로, 우리를 밝히 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고, 우리의 자리를 고집하며, 우리의 욕망의 자리에 있을 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회개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세 용사들이, 충성으로 자기에게 받친 물을 보고, 기가 막혔을 겁니다.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에, 충성스럽고 용맹한 세 명의 부하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다녀왔던 겁니다. 그들이 살아왔기 망정이지,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상하였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그 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들은, 내게 물을 갖다 주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적진으로 돌파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다시는 않겠습니다”라면서, 회개합니다. 이 회개는, 세 용사의 충성과 용맹을, 오직,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쓰이도록 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이러한 회개와 다르게, 마지막 구절이 뭡니까?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입니다. 즉, 세 용사의 충성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신 6: 5을 보시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목숨을 다하고”가 추가되어, 막 12: 30을 보시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놓으셨습니다. “목숨을 다한다”라는 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충성이고, 이것이 헌신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내 자리, 내 위치에 서서, 나의 만족함, 나의 부족함만 채우고 있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 용사가 다윗 앞에 있어서, 다윗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순종하여, 결단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 용사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