죤 칼빈은 “외식하는 신자도 위급할 때는 기도할 줄 안다. 그러나, 위험에서 건짐을 받은 뒤엔 감사할 줄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뒤로, 선교사역을 하면서, 늘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강도의 위험도 받고, 폭풍 속에서 살아남기도 하고, 억울하게 매 맞고,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입버릇처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며, 늘 감사했습니다. 루터 킹 목사는, “나는 흑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고 했으며, 윌리엄 바클레이는, 기독교의 3대 덕목인 “믿음, 소망, 사랑”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감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역사 속에 있던 성도들은,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 전도사 시절, 집사님 부부가 심각하게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원인은, 남편이 가정 일에 너무 소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바탕 퍼붓고는, 무작정 시장으로 가서, 이것저것 둘러보는 가운데, “사과하고 감사세요”라며, 과일파는 아저씨의 소리를 듣는데, 그 소리가 “집에 가서, 사과하고,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렸답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그 길로 집에 가서, “아까, 미안했어요. 직장 일로 많이 바쁘고, 힘들 텐데...”라며, 사과하며, 남편에게 감사했더니, 남편도 미안해하며, 설거지를 해 주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기독교의 거성인 어거스틴이 소명을 받았을 때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방탕에 젖어 있을 때,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집어들어 읽어라”는 노래 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옆에 있던 성경을 펼쳐 읽었는데, 그 때 펼쳐진 말씀이 롬 13: 13 – 14이었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어거스틴은, 오랜 방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기독교의 거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집사님의 경우만을 보면, 설마하고 지나칠 수 있지만, 그와 비슷한 일이 어거스틴에게서도 일어난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서든, 그 분의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감사”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다”와 “토데”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마음의 샘 줄기” 라는 뜻으로, “감사가 마음에서 샘처럼 흘러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신약에서의 “감사”는, 헬라어 “유카리스테오”이며, 이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가식이나 부담없이 자원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감사를 뜻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의 사람들에게는, 생활에 필요한 조건이 72개였고, 절대적인 것은, 18개였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500가지이며, 절대 필요한 것이 50가지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은, 70년 전의 사람들보다 필요한 것을 더 많이 누리며 살아가기에, 그들보다 더 감사하며,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반대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대인 신학자인 “몬레피오”는 말하길, “생각하고 감사하라”고 했고, 토리 박사는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의 특징은 감사하는데 있다”라고 했으며, 요한 웨슬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적은 감사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올 2018년을 마무리하는 12월을 보내면서, 결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몇 번의 감사를 드렸습니까? 감사는 성도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마땅한 예물입니다. 그러므로, 한 해를 결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마음껏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라며, 본문을 통해, “감사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감사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서 살아갑니다.
본문 15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며 시작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평강”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강을 잃었다는 겁니다. 평강을 잃었기에,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그리스도로 보내셔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신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에, 우리는 천국을 소망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 14: 27을 보시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였으며, 요 20: 19을 보시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도, 평안을 준다고 하셨지만,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날 때도 변함없이, 평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 평강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빌 4: 6 - 7을 보시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평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대한, 답변을 추억 속의 동화인 “피노키오”에서 볼 수 있습니다. 피노키오는 사람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을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나도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합니다. 또, 듣고, 보고, 말하는 것을 못하는 삼중고의 헬렌켈러는, 그녀의 선생님인 “셜리반”으로부터, 말을 어렵게 배웁니다. 오직, 느낌을 통해서만 말을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 아이가 말을 하며, 소리치며, 뛰어다니고, 말썽피우는 것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감사의 비결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며,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해 지거나 잊을려고만 한다면, 그들에게서, 감사를 찾기란, 바닷가 모래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이처럼, 어렵거나, 찾기 힘든 곳에 있지 않습니다. 감사를 찾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눈과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음과 그의 죽으심으로 천국에 입성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감사하는 일은 적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천국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지심을,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생각날 때마다 잠깐 꺼내어보고는, 다시, 기억의 깊숙한 곳에 넣어두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매 순간 꺼내봐야 합니다. 책상이나 핸드폰이나 자신이 자주 접하는 것에는, 추억의 사진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들을 놓습니다. 그리고는, 자주 바라봅니다. 그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는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다고 하여, 당연한 것으로 넘겨서는 안 됩니다. 보름 전, 저는 가족과 어머니와 이모님을 뫼시고, 약 2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가운데, 졸음운전을 했습니다. 그러다, 가드레일을 살짝 스침으로, 차가 조금 긁혔습니다. 너무 감사드렸습니다. 졸음운전 하는 가운데, 다른 차와 사고나지 않아서 감사하고, 차에 동승한 가족들이 안전함에 감사드렸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세요. 그 속에서,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일주일동안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러한 감사를 알지 못하기에, 불만불평, 원망이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된, 우리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계십니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에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광받기 위해서 창조하신 겁니다. 세상의 모든 자연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며,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받고자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하박국 선지자는, 합 3: 17 – 18에서 고백하기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던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생활의 행복을 어디서 찾고 계십니까? 어디에 기준을 두고 계십니까?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 모양에서 찾지만, 결국은,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성도된 우리는, 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에서 찾아야 하며,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감사하는 성도는, 시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합니다.
본문을 보시면,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라고 합니다. “가르친다”는 것에는, “먼저, 배웠다, 먼저, 경험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지식으로 가득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머리와 가슴이 가득차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잘 가르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때,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가득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딤전 1: 7을 보시면,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며, 약 3: 1을 보시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였던 겁니다. “우찌무라 간죠”를 잘 아실 겁니다. 그의 시 “괴롭지 않았더라면”을 보면,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도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이라고 합니다. 우찌무라 간죠에게는, 자신이 당하는 육체의 가시가 감사의 조건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마치, 고후 12: 7에서 보는, 사도 바울의 감사와도 같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질을 앓는 가운데, 잠시, 듣는 것과 보는 것과 눈꺼풀 움직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마비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어린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어머니가 성경을 펴놓고, 일 나가시면, 돌아오실 때까지 그 곳만 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장수를 넘길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읽고, 또 읽었던 겁니다. 이러한 가운데, 말씀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좀 전에 읽어드린 고후 12장을 종일 읽었답니다. 그러는 가운데, 9절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을 읽으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 말씀이 우찌무라 간죠의 마음에 새겨진 겁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훗날, 그는 책과 방송을 통해, 유대인들을 회개시킨 세례요한처럼, 일본인들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사도로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사도로 쓰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그 은혜 가운데 산다면서, “아무리 이해심이 많고 열심히 뛰어난 행동을 한다 해도 하나님을 향한 높은 감사가 없다면 생명있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빈 곳에는 반드시 채움이 있습니다. 성가대 여러분, 머리에서 가슴까지 약 30CM가 됩니다. 그런데, 머리에 있는 성경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는, 3 – 40년이 걸리거나 그 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어떤 이는, 평생, 내려오지 않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머리에서 가슴까지 몇 년에 걸쳐 내려오겠습니까? 몇 년전에는, LTE속도가 가장 빠른 것으로 소개되었는데, 요즘은, 이보다 20배가 더 빠른 5G가 우리의 생활이 되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시간이 이 보다 더 빠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내려보냄으로 텅 빈 머리는,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욕구충족으로 채우지 말고, 하나님으로 채우세요. 그래서, 복음성가인 “날 구원하신 주 감사”의 “길가에 장미꽃 감사 / 장미꽃 가시 감사 /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라는 가사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있죠? 무작정 흥얼거리며 부를 것이 아니라, 그 가사를 통해, Q. t도 하고, 그 가사를 통해, 기도문을 적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 찬양하라고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노래입니다. 이렇게, 찬양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은혜의 자리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과 실라가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는 빌립보 감옥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생활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뜨겁게, 찬송하는 가운데,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감사하는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본문을 보시면,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성도로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새겨 넣으라는 겁니다. 창 24장을 보시면, 아브라함의 종이 나홀의 성에 도착해서는, 자신의 임무수행에 대해 기도를 합니다. 또, 그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는 감사를 드립니다. 이 때, 하나님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또,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뭐라고 소개합니까? 이 종은, 기도할 때나 응답받아 감사할 때나 자신을 소개할 때나 한결같이, “아브라함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존재가 아브라함 안에 있다는 겁니다. 성도인 우리가, 무엇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것은, 이 종과 같이, 우리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살아난 자 있습니까? 그래서, 요 14: 13 – 14을 보시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우리의 이름으로, 행하려고 합니다.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습니다”가 아니라, “내가 했습니다”로 나타내려고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거나 알려지지 않으면, 서운함을 갖기도 합니다. 죽은 자에게 이름이 있습니까? 명예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감사하는 것이, “절대감사”입니다. 이것은, “상대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감사를 알기에, 엡 5: 20에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하며, 빌 4: 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 고백들이 오늘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