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40일 기간을 말합니다. 이렇게, 40일간의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은, 오락을 멀리하고, 조용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가에서 보여진, 예수님의 사랑과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가슴에 새기는 가운데, 전도하며, 사랑을 실천하면서 보냅니다. 본래, 십자가는, 페니키아에서, 흉악한 범죄자들을 처형하던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좌우에 있던 강도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십자가형을 받은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겐, 무슨 죄가 있어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을까요? 그래서, 하는 말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40과 관련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금식하던 기간이 40일이었고, 엘리야가 호렙에 이른 기간이 40일이었습니다. 또, 노아 홍수가 40일이었고, 예수님이 공생애를 준비하실 때, 40일간 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간 연단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의 공통점인 40은, “시험”이었고, “연단”이었습니다. 요즘, 길거리를 가다보면, 개와 함께 산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작은 강아지가 주인을 따라 잘 가더니, 갑자기 짖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주인이 가니까, 어쩔 수 없이 얼마를 따라가더니 또, 주인을 보고 짖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주인이 웃으면서, “너, 안아달라는 거지?”라면서, 안아 주니까, 주인의 품에 포근히 안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개를 키우는 가운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훈련을 시킵니다. 개 훈련 전문가인 “샐리 스타일스”는, “개를 훈련시키는 것이, 개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개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훈련을 통과한 개는, 주인의 명령을 따르기에, 주인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훈련을 통과하지 못한 개는, 쇠사슬에 메여, 훈련을 통과하기까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샐리의 글을 읽으며, 성도된 우리가, 영적 훈련, 믿음 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올 해의 사순절은, 지난 3월 6일부터 오는, 4월 20일까지입니다. 부활절 전 날까지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날 수는, 40일이 조금 넘습니다. 그것은, 주일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기에, 사순절 기간에서, 제외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을 무작정 보낼 것이 아니라, 사순절 보내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마 6: 21을 보시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연단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생각,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놓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도로서의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돌아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는 살되, 여기에 “다른 무엇”을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성도로서 양육이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찰스 스윈돌이 섬기던 교회에서 목회하는, “마이크 어”는, 그의 책, “하나님께 놀라다”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 강력한 메시지를 줍니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우리 마음의 구멍을 채워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대목이 없다. 아니, 하나님은 흔히 ‘정반대의 일’을 하신다.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에게 실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고 합니다. 또, “야곱은 단순히 하나님을 만나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그곳’에서 만났기에 놀랐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분이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그저 그런 곳에서도 우리를 만나 주실 수 있고 실제로 만나 주신다는 지식이다. 야곱은 하나님이 늘 거기 계셨는데 자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적인 잠에서도 깨어났지만, 영적으로도 깨어났다. 그저 그런 평범한 장소에서, 그의 아버지가 만났던 하나님이자 야곱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영적 성장은 죽 거기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고, 사람들에게 간청하거나 사람들을 매수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사람들의 욕구를 애써 채우려 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면, 얻게 될 이익에 대해, 구구절절 나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분은 단지, 하나님과 그 분의 나라에 대해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연단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로서의 풍성한 삶으로, 복 받고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마이크 어가 “하나님께 놀라다”에서, “하나님께 실망한다”는 표현을 왜 했겠습니까? 잠 25: 13을 보시면,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6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져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본문을 보시면, 앞서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경계했던 사도 바울, 본문에서는, 이에 대해, 대처 방법을 말합니다. 그것이,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입니다. 여기서, “이것”이 뭡니까? 앞의 5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와 함께, “감사함”으로 받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선포되는, 복음에 반대하는 자들이,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며, 그가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거짓된 교훈을 전함으로, 성도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깨우치면”이라고 합니다. 이는, 헬라어로 “히포티데미”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말을, 명령으로 강권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권유적으로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래에 두다”입니다. 곧,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세우라는 겁니다. 우리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아래에 서야 합니다. 그 위에 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서야,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먼저, 순종의 자리에 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다시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아래에, 성도들을 세우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끄셨지만, 그것은, 표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보다 더 심연 속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것은, 그들로 하여금, 더 좋은, 가나안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이스라엘의 생활환경을 바꿔주기 위함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 온 세상에,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고자 하셨던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존재의미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 성도로서의 삶을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진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복 받고, 형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우리로 하여금, 삶의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입니까? 우리를 성도로 삼으신 것은, 우리의 존재의미를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고후 3: 3을 보시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성도로 삼으신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가 되라는 겁니다. 즉,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세상에 선포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편지된 우리에 대한 표현을, 본문에서 찾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꾼”은 어떤 일꾼이겠습니까?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으로 잘 받들어 섬기는 자”입니다. 본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에 대해 강조한 말씀이 16절입니다. 보시면,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징검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제사장적 역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향해, 교회들에게 요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우리가 잘 실천하기 위해서는,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모아야 합니다. 마 5: 13 – 14을 보시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본문을 현대어 성경역으로 보시면, “이러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가르쳐 주시오. 그러면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따르는 믿음의 말씀과 건전한 가르침으로 성장하여 보다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연단하라고 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영적성장을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경건에 이르러야 합니다.
본문 7 – 8절을 보시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합니다.
본문을 보시면, “경건에 이르도록”이라고 합니다. “경건”을 헬라어로, “유세베이안”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를 신약에서 찾으면, 15번 나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13번이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 중, 본서에서, 9번이 나옵니다. 이것은, “경건”의 의미를 아는 것이, 디모데서를 이해함에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통념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경건성의 내용이 되는 경외심과 사랑이 합쳐진 것”이라고 하지만, 칼빈은,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마음”이라 하였고, 존 스토트는, “비록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없다 하더라도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하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경험한 이들’의 영적 특성을 지칭하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 16: 8을 보시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경건에 대해, “소리도 없이 걷는 것 같은 걸음걸이,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은 대화, 하루 종일 십자가 앞에 엎드려 있는 듯한 몸부림”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 대한 모든 답을, 우리의 경험, 생각, 지식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이토록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라고 한 것은, “망녕되고 허탄한 신화”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교사들 때문이었습니다. 갈 2: 4을 보시면,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라고 합니다. 또, 벧후 2: 1을 보시면,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신비로움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였고, 율법을 중시여기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린 디모데가 목회하는 교회가 올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또, 디모데 역시, 하나님 앞에 올바른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로부터 배우고, 양육받은 것에서 벗어난, 망녕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했던 겁니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는, “영적 불량식품”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신앙을 도둑질 하는 망녕되고 허탄한 가르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통이며, 성경을 바르게 전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본문 당시,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 그 기준점을 찾아, 분별하고, 따라야 합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 둘은,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사는 것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우리를 연단해야 합니다. 본문에서의 “연단”은, 헬라어의 “귐나시아”로, “체력 훈련, 운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갑작스럽게,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네 자신을 연단하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시합을 앞둔 선수들이 체중을 빼고,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는 것은, 그 기술이 몸에 배이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 경기에서의 우승과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산악인들의 말을 들으면, 높은 산의 봉우리들을 볼 때마다 그 봉우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아, 가슴의 피가 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위협을 받아도, 계속해서, 그 봉우리에 도전한다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도 이와 같이, 하늘의 도성을 향해, 칠전팔기로 도전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냉랭하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 3: 14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무겁고, 우리가 행하는 훈련과 헌신 역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성도된 우리야말로, 가장 놀라운 약속의 수혜자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한 번 눈을 떠서, 앞에 있는 저 영광스런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기대와 소망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귀를 열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전심전력으로 하늘의 도성을 향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빌 3: 14을 보시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군은,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진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며, 세리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 마음을 두지 말고, 자신을 연단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디모데도,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을 보고 달려가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두도, 이러한 디모데와 같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푯대이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고 합니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우리나라 최고의 슈터인, 이충희 선수를 기억하십니까? 한번은, 방열감독이 그의 배를 치면서, “요즘 살쪘네”라고 했는데, 이 말을 듣고는, 한계령을 넘는 차에서,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한 겨울 운동복을 입고는, 내려서 경포대까지 가겠다며, 떼를 썼답니다. 그래서, 내려줬는데, 다음날 아침, 선수들을 집합시킨 자리에서 이 선수가 보이지 않자, 늦잠 자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숙소를 모두 찾았지만 없었답니다. 이 때, 이 선수는, 오히려, 농구공을 옆에 끼고, 택시에서 내려서 왔습니다. 사연인즉, 택시를 잡아, 농구대가 있는 곳으로 가자하고는, 볼을 받아주면, 택시비를 2배로 준다하며, 이충희 선수는 밤새도록, 약 1000번의 슛을 연습했고, 택시기사가 볼을 받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충희 선수는 우리나라 최고의 슈터였습니다. 그는 그 소망을 가지고, 운동을 했습니다. 행 20: 24을 보시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던 바울은, 그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갈급하니? 네 소망이 어디에 있니?”라고 말씀하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사순절을 보내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연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