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목요일은, 광복 74주년을 맞이하는 광복절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은, 오늘을 “광복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우리나라를 상대로, 수출 규제에 이어,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기까지, 잇다른 경제 보복 조치를 감행한 일본에 대해, 국민의 반감이 깊어지는 가운데, 일부 인사들의 주장으로 나라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성도된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깊은 잠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라를 위해 구국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기도를 받아서 해야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사 가운데, 뛰어난 전쟁을 선택하라면, 저는 우리나라의 명량해전을 선택하겠습니다.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전함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승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승입니다. “명량”은, 진도와 해남 사이에 있는 곳으로, 물살이 빠르기에 요란한 소리를 내는 데, 그 소리가 마치 우는 소리와 같다하여, “울돌목”이라고 불립니다. 이곳은, 폭이 500미터도 되지 않고, 수심도 약 2미터 남짓하는 좁은 곳이 있어서, 밀물 때는, 남해에서, 서해로 조류가 빠르게 흐르다가 썰물 때는, 반대의 현상을 보입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아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과 지형적 특성을 모르는 일본군의 싸움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일본은, 12척 밖에 없는 조선의 수군을 보고, “계란투석”이라며, 자만했습니다. 하지만, 폭이 500미터도 되지 않는 곳으로, 일본의 전함은 일제히 통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0여척씩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조류를 이용하여 침투한다는 욕심에, 닻을 내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수군들은 이미, 닻을 내려, 배를 든든히 고정시킨 상태에서, 일본의 수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밀물로 흐르던 조류가 바뀌어 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의 전함은, 거센 조류에 의해, 요동을 치며, 자신들끼리 부딪치는 가운데, 파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조선의 수군을 발견했지만, 그들을 향해, 포를 제대로 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닻을 내려서 조류의 변화에 안정적으로 대비했던 조선의 수군은, 일본의 전함을 향해, 준비된 포로 공격을 하였고, 그 결과, 일본의 133척 전함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여러분, 이 전투에서 조선의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인이 무엇입니까? “닻”입니다. 거센 조류가 뒤바뀐다 하여도, 든든한 닻으로 고정된 배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학시절, 충북 영동의 심천 미루나무 숲에서 열린, 한국대학생선교회 CCC 천막수련회에 참가했던 김상환씨는, 그 때의 체험과 성경 속의 한 구절에 대한 기억이 맞물리는 가운데, “영혼의 닻”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저, 시가 좋아서, 공부가 좋아서 묵묵하게 시인의 길을 고집했다는 그가, 문단에 등단할 때, 당시, 심사평을 맡았던 문덕수 시인은, “영혼의 닻”에 대해, “시에 대한 경건함과 내면의 응시”가 담겼다는 평을 했습니다. 이 시를 소개해 드리면, “달이 뜨지 않는 밤에 나는 심천 미류나무 숲 속에 슬픈 짐승처럼 쭈그리고 앉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타는 음성을 듣는다 원무를 그리며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간증의 불꽃은 삼경을 지나 더욱 간절한 몸부림으로 떤다 나는 살을 쥐어뜯으며 본향을 생각하다 꿈에만 출항하는 영혼의 뱃고동 소리에 시선이 멎다 어차피 모래알처럼 부서질 너와 나는 일어나 숲속을 헤메이다 새벽녘 깊이도 모를 바다의 숲속에 닻을 내린다”입니다. 얼마 전,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책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부적절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밝힘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한 “죤 B 필립스”는, “인생의 크기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죤은, 삶 속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얼마나 좋은 상황에서 출발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세찬 조류에서도, 든든한 닻을 내린 배는, 요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조류 속에서, 부평초같이 되어 닻을 내리지 않았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의 닻을, 하나님께 내림이 어떠하겠습니까?
첫째, 우리의 소망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라고 합니다.
본문을 현대인의 성경역으로 보시면,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약속된 것을 받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변경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시려고 맹세로 그것을 보증해 주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보증”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책임지고 틀림없음을 증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법률적으로는,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할 경우에, 채무자를 대신하여, 채무 이행을 부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민법에서는, “보증채무”라 하고, “상법”에서는, “연대보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보증은, 약속을 보다 확실한 신뢰 위에 세우는, 상호간의 행위입니다. 본문에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것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전지전능하시기에, 약속으로 충분합니다.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보증까지 더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약속함에 있어서, 창 15: 17을 보시면,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으로만 하실 수 있었지만, 비쥬얼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나타내신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일에 대해, 계획을 준비하실 때, 한 가지의 경우만 가지고, 준비하십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세 가지의 경우를 가지고, 준비합니다. 그것은, 변수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변수가 없습니다. 사 14: 24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며, 사 55: 11을 보시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롬 11: 29을 보시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하나님에 대해,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축복하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는 가운데, 이러한 보증을, 하나님께 요구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에 대해, 그 증거를 요청하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이렇게, 요청하는 것이 “불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준곤 목사님이 풀러 신학교에서, 신앙 간증을 하자, “오늘의 학원복음화는 내일의 세계복음화!”, “우리세대에 지상명령을 성취하자!”는 슬로건을 앞세워, 미국에서 C.C.C를 창설한 빌브라잇 박사로부터, C.C.C의 동역자가 되어줄 것을 제안 받았습니다. 그래서, 귀국하여, “한국 대학생 선교회”인 C.C.C를 창설했습니다. 이러한 김준곤 목사님이, 사랑방 성경학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수 만 달러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맡긴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자금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유학당시 만났던 친구에게 찾아가, 3일동안 자금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귀국하려다가 다시 한 번, 마지막 용기를 내어, 친구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는, 둘 중에 하나를 택일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친구의 보증수표와 하나님의 보증수표 가운데 택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친구의 보증수표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믿음이 없어 보일 것 같아, 하나님의 보증수표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요일 5: 14을 읽어주었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입니다. 목사님은 순간, 그 친구가 얄미웠습니다. 분노가 일었습니다. 당장, 자금이 필요해서, 미국까지 왔건만, 친구가 행한 것은, 하나님의 보증수표라며, 성구를 읽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구의 말을 되짚어보면, 일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보증수표인 요일 5: 14의 말씀을 앞세워 기도했습니다. 후에, 목사님은 고백하시길,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셨고, 당시, 필요한 자금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셔서, 사용하고 남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그 분의 언약을 꼭 지키신다고 성경은 곳곳에서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평초와 같이 살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삶의 닻을 어디에 내리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오늘날에도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의 어떤 보증도, 하나님의 보증만큼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 닻은 필수입니다. “도시어부”를 보니까, 바다 한 가운데서, 선상 낚시를 할 때, 배의 선두와 선미를 닻으로 고정시키고, 낚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함이든, 낚시배든 바다를 항해하려면, 닻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서도 닻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어디에 두고 계십니까?
둘째, 우리의 소망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본문을 새번역으로 보시면, “이는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하여 나온 사람들인 우리가, 이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하여 큰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고 맹세하실 때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부분을 보시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이라고 하는 데,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사람의 진리는, 세월에 따라 변하기도 합니다. 또, 사람의 말은, 세월 속에서 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참된 안식과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후반부를 보시면,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소망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된 우리는, 이미, 안식을 찾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안식처 안에 우리는 거하고 있습니다. 막 4장을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커다란 광풍이 일어나 배에 물이 가득했습니다. 배가 전복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곤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고요하게 되었습니다. 또, 시 23편을 보시면, 하나님이 목자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라고 합니다. 이는, 소망이 불확실하다면, 이러한 표현을 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기자가, 이렇게 확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된 우리가 가지는 소망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를 걸고, 맹세했다는 겁니다. 창 22: 16을 보시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때,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입니다. 그리고는, 주신 자손이 몇 명입니까? 이삭 단 한 명입니다. 물론, 이스마엘도 있지만, 언약의 후손은 “이삭”한 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세상으로부터 계속하여 불려짐을 받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소망”은, “어떤 일을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에 해당되는 헬라어, “엘피스”는, “기대, 확신, 희망”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히브리서 기자가 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피력하겠습니까? 그것은, 히브리서의 수신자인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극한 환난 가운데 있었기에,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요 16: 33을 보시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합니다. 앞의 16절 후반부를 보시면,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고 합니다. “맹세는 결론이다”라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약속과 맹세”를 말합니다.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그 약속에서 위로를 받았던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도 당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 안에서, 우리도 위로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영혼에 닻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의 소망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내 영혼의 닻입니다.
본문 19 - 20절을 보시면,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라고 합니다.
본문 19절을 쉬운 성경역으로 보시면,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하여, 그 소망을 통해 하늘 지성소의 커튼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라고 합니다. 배가 항구를 떠나 출항을 한다는 것은, 목적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 목적지를, “소망의 항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 전투에 투입된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존슨일병인데, 적진에서 낙오되어, 2,000KM를, 4개월 동안 홀로 걸어, 본대에 합류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장거리를 걸어서, 본대에 합류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2,000km를 걸을 때, 참고했던, “지도”입니다. 존슨은, 주변의 질문에 대해, “나는 정글을 헤매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러나 이 지도를 보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라면서,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도 한 장을 꺼냈습니다. 어떤 지도이겠습니까? 놀랍게도, 미얀마의 정글지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지도는, 런던의 관광지도였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존슨이 런던의 관광지도를 보면서, 본대까지 찾아온 것은, 속히, 전쟁을 끝내고, 런던에 가서, 마음껏 관광하고 싶다는, 소망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런던에 대한 소망이, 존슨을 지켰습니다. 시 39: 7을 보시면,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축복의 시기나 심판의 시기나 성취의 시기가 언제인지 아는 분 계십니까? 우리 가운데 아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확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약속에는 변수가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에는, 변수가 없다는 겁니다. 곧,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에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가지는, 소망의 하이라이트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고 합니다. 여기를 보시면, 성도의 소망을 닻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닻은, 시작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물 속에 들어가서 배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럼, 우리의 소망이 닻과 같이 휘장 안에 들어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휘장 안으로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안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곳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안치된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있는 자가 들어가면 죽어서 나오는 곳입니다. 이 곳을 누가 들어갔습니까? 20절을 보시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 지내는 가운데, 신앙으로, 환경으로, 경우에 따라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이 되어, 전혀, 전후좌우를 분간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되시며, 영혼의 닻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이며, 영혼의 닻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영혼의 닻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림으로,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