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만종”을 보면, 삶의 애환 속에서 느끼는, 위로와 평안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뒷 이야기도 있지만, 밀레가 사실주의자로서, 고관대작이 아닌, 하루 종일 감자 밭에서 감자를 캔 부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그 감자 바구니를 보면, 감자가 얼마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수확한 감자를, 밭주인이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모자를 벗은 남자의 머리를 보면, 엉클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하루종일 밭에서 일함으로, 지쳐있습니다. 그럼에도, 얼마담지 못한 감자 바구니를 앞에 놓고, 하루의 일과를 마치게 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들 부부의 모습에서,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라며, 외치는, 다윗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부르짖음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고, 하나님의 보호를 간절히 바라는 자의 모습입니다. 인터넷을 살피는 가운데, 이런 만화를 봤습니다. 한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딸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우리가 이사가는 동네에도, 교회가 있어요?” 그러자, 엄마는, “우리가 이사가는 곳은, 작은 시골 동네라서, 교회가 없단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딸은, “주일에 교회를 가야하는데” 하고는, 장면에서 사라집니다. 딸이 사라진 것을 모르고, 정신없이 이삿짐을 꾸리던 엄마가, 딸이 사라진 것을 알고는, 딸을 찾아 문들을 열어보니, 딸이 방 한 구석에서, “하나님, 오늘 우리 가족이 이사가요. 그런데, 그 곳은, 작은 시골 동네라서 교회가 없대요. 저는 계속, 교회를 다니고 싶지만,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수 없게 되었어요. 하나님, 안녕히 계세요”라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딸의 기도를 들은 엄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습니다. 이 가족이 이사를 하고, 두 달 만에, 그 작은 동네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작가는 이 짧은 만화를 통해, “진실한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했던 겁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의인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래서, 시 51: 6 – 11을 보시면, 다윗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잠 15: 8에서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잠 10: 29에서는,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기도가 정직한 기도이겠습니까? 눅 18: 10 – 14을 보시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의로운 기도로 받으셨습니다. 시 51편에서의 다윗의 기도와 눅 18장에서의 세리의 기도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여기서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아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므로, 내가 고통 중에 거할 때, 주께서 침묵하시면, 나는 고통과 상처로 뒤범벅이 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미국의 기독교 작가인 조셉 베일리는, “내 인생의 성시”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눈물로 주님께 부르짖나이다 / 말로 할 수 없어서 눈물로 울부짖나이다 / 두려움, 고통, 슬픔, 실패, 상처로 인해 말을 잃었으나 / 내 말 없는 기도를 /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 당신은 들으십니다 / 주님 내 눈물을 / 내 모든 눈물을 씻어주소서 / 먼 훗날 그리 마옵시고 / 지금 여기서 닦아주소서” 우리와 이심전심이 되는 기도죠? 정직한 기도는,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가 당하는 형편과 그에 대한 심정을, 솔직하게 내놓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정직한 기도를 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첫째, 정직한 기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온갖 “죄의 유혹”을 받지만, “경건한 삶”을 살게 합니다.
본문 2 – 3절을 보시면,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본문 2절에서,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라고 합니다. 이를, 공동번역으로 보시면, “‘너는 죄 없다.’ 판결하소서. 당신의 눈은 결백한 사람을 알아보십니다”라고 합니다. 앞의 1절에서는,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이라고 했고, 본문에서는, “주의 판단”과 “주의 공평함”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뒤의 3절에서는, “시험하시고”,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시험하다”는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샅샅이”라 하였고, 우리말 성경역에서는, “자세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기도 속에 있는 몇몇 단어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다윗의 결백함이 느껴집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음을 밝히는 겁니다. 즉, “이제까지 나의 모든 것이 주의 앞에 낱낱이 파헤쳐져 있는 데, 또 무엇이 필요합니까?”라는 겁니다. 인터넷에서 어떤 목사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원주에 사는 분인 것 같았습니다. 그 분이 평소에 도로를 달릴 때는, 100km 이상으로 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교통경찰이 태워달라고 하여, 동승해서 그 도로를 달렸는데, 정속주행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경건”에 대해, 어떤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근엄한 모습입니까? 성경에 밑줄이 그어졌고, 작게 메모가 적힌 겁니까? 언제나 웃음으로, 따뜻한 말로 건네는 것이 경건입니까? 모세는, 시내산에서 돌판을 가지고 내려와서는, 이스라엘 앞에서, 돌판을 산 아래로 내던졌습니다. 또, 광야에서는, 자신의 지팡이로 바위를 탁탁 때렸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경건했습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제자도가 없는 현대의 기독교가 변하기 위해서는, “성도와 제자의 정체성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 달라스 윌라드가, “영적 성장과 생명력은 우리가 실생활 속에서 행하는 것과 우리가 형성하는 습관과 그 결과 속에서 생성된 성품에 연원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영성을 말하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기독교인의 영적 성장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 본문 속에서의 다윗은, 하나님 앞을 떠난 다윗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비추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경건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겐, 바리새인의 경건만 있을 뿐입니다. 다윗은 어디서나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에,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 “주의 판단, 주의 공평”, “주의 시험, 주의 감찰”이라는 말을 언급했던 겁니다. 다윗이 이렇게 살았다고 해서, 새 장에 갇혀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참된 경건은, 우리를 새 장에 가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코람데오의 삶”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본주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잠 30: 8 – 9절을 보시면,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경건은, 자기중심의 생활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생활에서 나타나는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그러기에, 마 16: 24을 보시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며, 고전 15: 31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기도를 드렸던 다윗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발자취가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중심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기도를 하는 가운데, 다윗과 같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발자취가 풍성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정직한 기도는 어려운 “선택의 자리”에 섰을 때, “말씀의 인도”를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라고 합니다.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보시면, “남들이야 무얼 하든지 이 몸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입니다. 또, 우리말 성경역으로 보시면, “다른 사람들이 어떠하든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으로 멸망하는 사람들의 길에서 나 자신을 지켰습니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신목예배당이라는 장소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저의 설교를 함께 듣고 있지만, 이에 대한 마음의 생각은, 제각기 다를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의 자리”에, 서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라고 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방법을 찾아, 아니면, 주변의 흐름에 따라 결정하지만, 다윗은, 그러한 방법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다윗에게는, 그가 선택해서 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인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비가 일반화된 뒤로는, 타지에 갈 때, 지도를 펼치거나 주변에 묻거나 하는 사람들이 극히 줄었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네비가 없을 때, 가족들을 태우고, 시골길을 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주변이 숲이라서, 가로등도 없고, 불빛도 없었습니다. 오직, 앞에 가는 차들의 후미등만 보였고, 제 차의 헤드라이트만 앞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보니, 앞선 차들이 직진하면, 커다란 대로임에도 불구하고, 우측으로 돌아 작은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 사람들이겠지”라며, 저는 대로로 곧장 직진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차들이 없었습니다. 희미한 가로등만 있었습니다. 느낌이 음산해서, 차를 세우고, 내려서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어디에 있었을까요? 공동묘지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시 119: 105을 보시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입구에 문이라도 설치하던가, 안내문이라도 해 놓을 것이지 덩그러니 커다란 입구만 만들었기에, 저는 그곳이 대로인줄 알았습니다. 이 일을 겪은 뒤로, 네비가 보급될 때, “이제는, 지방에 가더라도, 차를 세우고, 지도를 펼치거나 공동묘지로 직진하는 일은 없을 거야”라며, 너무 기뻤습니다. 다윗에게는 인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어지는, 5절을 보시면,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쉬운 성경역에서는, “나는 주께서 가라고 하신 길로만 갔고, 곁길로 간 적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인도자가 있습니까? 다윗은 정직한 기도를 통해서, 말씀의 인도를 받았기에, 자신의 무지와 시행착오 속에서,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지만, 우리는 언제나, 내일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있죠? 우리에게는, 내일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일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가로등도 없고, 통행하는 차량도 없는, 캄캄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공동묘지 한 복판으로 들어간 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야하는 경로 주변에 무엇이 있으며, 휴게소는 어디에 있고, 목적지는 어디이며, 얼마가 남았는지를 알려주는 네비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한걸음, 한걸음씩 인도하여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잠 3: 6을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며, 또, 잠 16: 3에도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약 1: 5 – 8을 보시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이쪽 갔다 저쪽 갔다 하는 것으로, 양쪽을 저울질 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간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 되면 내가 생각한 쪽으로 가겠다는 마음을 품는 겁니다. 다윗이, 선택의 자리에서, 말씀의 인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알고, 그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력이 없고, 넘어졌으면, 넘어진 대로 그 곳에 있었습니다. 삼상 30장을 보시면, 다윗이 장수들과 전쟁터에서 돌아와 시글락 성에 도착해보니, 이미, 성은 초토화되었고, 가족들은 아말렉에게 인질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모두가 지치도록 큰 소리로 울고는, 6절을 보시면,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합니다. 다윗을 따랐던 장수들과 백성들이, 가족을 잃었다는 분노 속에서, 다윗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두 마음을 품었다면, 다윗이 하나님을 인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어찌했겠습니까? 우리는 팔랑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이 본문에서 고백하는 것이 뭡니까? 다윗의 인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많은 선택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리 개인을 위한 선택, 가족을 위한 선택, 교회를 위한 선택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선택의 자리에 있게 될 겁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길잡이로 삼겠습니까? 우리에게, 본문 속의 다윗과 같은, 인도자가 있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정직한 기도는 무서운 “원수의 핍박”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를 받게 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대적들이 일어나 자신을 치려할 때, 자신은 반사적으로 하나님께 피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오른 손으로 구원하시는, 다윗을 향한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다윗에게 나타낸 기이한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이어지는 8절을 보시면,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입니다. 우리 몸에서 민감한 곳이 몇 군데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눈”입니다.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는, “눈”이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신속하게 반응하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 또,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는, 출 19장을 보시면, 독수리의 날개로 업어 인도하였다고 하며, 또, 출 25장에서는, 그룹들이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었다고 합니다. 신 32장에서는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았다고 하며, 룻 2: 12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또, 출 33: 22 – 23을 보시면,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셨고, 하나님의 “날개”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다윗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성도된 우리에게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장 큰 목표는 무엇입니까?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열심으로 하겠다고 다짐은 하지만,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습니다. 마치, 24시간 언제든지, 내가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도록, 판매를 하는 편의점처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일 4: 10을 보시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합니다. 찬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가사를 보시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한 영혼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찬양이 안 나온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 속에서, 다윗을 지켰던 눈동자와 다윗을 덮었던 날개가 언제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