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지도자들과 토론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의 확립과 전파를 도모하는, 트리니티 포럼의 선임연구원이었고, 미국 렉싱턴의 그레이스 채플에서, 약 40년간 목회를 했던 “고든 맥도날드”목사는, 영적 리더십의 고전으로 알려진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한 부류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부류는, “부름 받은 사람” 즉, “사명자”입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내면세계가 잘 정돈되지 않은 사람”이지만, “부름 받은 사람”은, “질서 있는 내면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쫓겨 다니는 사람의 특징은, 지나치게 분주하고, 일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는, 쉼을 모르고, 항상 이기려고 하며, 성공하고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난관에 부딪히면, 쉽게 무너짐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도 같습니다.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입니다. 그는 왕이 된 후, 스스로 왕권을 지키기 위해, 쫓겼습니다. 그랬기에, 늘 불안했고, 신경질적이었고, 트집을 잡아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시도를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부름 받은 사람은 규모 있게 행동하며, 소유하려 들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내면의 질서가 잘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합니다. 그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으며, 자신을 과대평가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사람들이 “네가 메시아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메시야가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간다고 했을 때, 전혀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신랑과 신랑 친구의 관계를 얘기하며, 기뻐했습니다. 요 3: 29 – 30을 보시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이를 현대어역으로 보시면, “군중이 그분에게 몰려가는 것은 당연하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한다. 나는 지금 그러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더 위대해지고 나는 더욱더 작아져야 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은 “쫓겨 다니는 사람”이 되며, 어떤 사람은 “내면의 질서가 잘 잡힌 부름 받은 사람”으로 살게 됩니까? 본문은, 여호수아서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본문 속의 이스라엘은, 여리고 전투에 이어, 아이 성 전투로,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가나안에서의 전쟁이 다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동과 전쟁으로 지쳐있는 백성들을 이끌고, 에발 산으로 향했습니다. 에발산은, 아이성의 북쪽 약 32Km지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겜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는 그리심 산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왜? 전쟁을 하는 가운데, 백성들을 이끌고 에발산과 그리심 산으로 이동했을까요? 전쟁이든, 경기에서든, 사기가 충천해야 합니다. 사기가 떨어지면, 다 이긴 것도 실패합니다. 그러기에, 여호수아는, 아이 성에 이어, 계속하여 진군하며, 승전을 위한 전쟁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에발산으로 인도했다는 것은, 아주 의외입니다. 이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리더쉽이었습니다. 또, 이것은, 병법에서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인도하여 에발산에 가서 행한 것은, 예배였습니다. 그곳에서 단을 쌓았고, 그곳에서, 율법을 낭독했습니다. 이것을 어찌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여호수아의 이러한 인도에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과 단을 쌓는 것과 율법을 낭독하는 것은, 가나안에서의 모든 전쟁을 마치고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굳이 예배를 드리겠다면, 현재,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머물고 있는 길갈에서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발산에 가서 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을 보는 가운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러한 인도는, 일이나 사건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는 성숙한 모습이었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축복의 선택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본문에서 전하는 에발산에서의 “아멘”은,
첫째, 삶 속에서, 예배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없다는 겁니다.
본문 30절을 보시면,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라고 합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면, “그 때에”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8: 28에서,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랐다”라고 할 때로, 아이성을 정복했을 때를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정복하자마자, 온 백성을 이끌고, 에발산으로 향했던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의 선택과 리더에, 아멘으로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이제, 가나안 지역에서 두 번째 전투를 마쳤을 뿐, 아직도 많은 적들이 연합해서, 이스라엘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기에, 에발산까지 이동하는 가운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급습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여자와 노인과 아이들까지 모두 이동시킵니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인도에 “아멘”할 수 있습니까? “여호수아가 인도하니까 무조건 아멘입니다”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벗으면, 어떤 모양으로든,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 때, 식량이 떨어졌을 때와 생수가 떨어졌을 때, 그리고, 출애굽 직후,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올 때, 이스라엘이 어떠했습니까? 모세를 향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며, 불평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원망과 불평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호수아의 이해할 수 없는 인도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것은, 신 27: 4 때문입니다. 여기를 보시면,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고, 여리고를 정복한 뒤, 교만 속에서, 아이 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것을 알았던 겁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셔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바로 그 정체성을 되찾고자, 이스라엘을 이끌고, 에발산으로 향한 겁니다. 삼상 17: 45을 보시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합니다. 바로 이 자세가 이스라엘에게 시급했던 겁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평소보다 2배나 더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해, 루터는, “급하기에 더욱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급할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급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예배에 두는 겁니다. 구약에서 제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겁니다.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린 사람은, 아벨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지만, 아벨의 믿음의 제사는 받았습니다. 그 다음은, 노아가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후에, 감사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 8: 20 – 22을 보시면,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또,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왔을 때, 처음으로 행한 것이, 예배였습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 12: 6 – 9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제단을 두 번이나 쌓았습니다. 보시면,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자, 조상들이 제사를 드렸던 그 세겜으로 가서, 제단을 쌓았던 겁니다. 청교도들이 영국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그들은, 예배당을 먼저 건축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입니다. 간혹, “너무 바빠서 정기적으로 예배드릴 시간이 없습니다”라는 성도들을, 부교역자 시절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전쟁과 같은 상황을 만났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전쟁을 치루지는 않았습니다. 계 3: 20을 보시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며, 엡 2: 13을 보시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이스라엘을 이끌고, 약 32km의 거리를 행군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선택한 것은, 전쟁의 승패가 인간의 지혜나 전략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 승리를 위한 최선임을 아이 성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께 먼저,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에발산에 세워진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시면,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라고 합니다.
성경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에발산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1.5m의 두께와 2.7m의 벽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가로 7.5m 세로 9m가량의 구조물이, 진흙과 재로 돋아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구조물 안에는, 짐승의 뼈들이 있음으로, 여호수아가 실제로, 단을 건립한 것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란, 채석장에서 나온 자연 그대로의 돌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는, 기교적이고 외형적인 미를 중시하기보다는, 천연적이고 내면적이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제단에서 드려진,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 헌신을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였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목적으로 드린 제사였습니다. 이것은, “번제와 화목제”가 시내 산에서 드려진 이후로, 약 40년이 지나 에발산에서 드려지는 것으로, 커다란 의미가 있었습니다. 먼저, 모세당시, 시내산에서의 사건을 회상할 수 있고, 또, 에발산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에 대해 흩어졌던 마음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던 겁니다. 여호수아 당시, 가나안의 이방종교에서는, 제단을 만들 때, 철 연장으로 다듬은, 네모반듯한 돌을 사용했습니다. 그랬기에, 자연석으로 쌓은 제단이, 멋도 없고 투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대상 13: 7을 보시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라고 합니다. 물건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는 것은, 블레셋의 문화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데에 사용했던 겁니다. 하지만, 민 4장을 보시면, 증거궤를 고핫자손이 메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 투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 하나님은 자연석으로 쌓은 제단을 원하십니다. 찬송가 214장 후렴을 보면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라고 합니다. 또, 롬 12: 1을 보시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듬은 것이 아닌, 자연석입니다. 시 51: 17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하며, 또, 요 4: 23을 보시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합니다. 눅 18장을 보시면, 바리새인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기도했지만, 세리는 가슴을 치며 상한 심령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자연석입니까? 다듬었습니까? 또한, 여호수아는, 에발산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저주가 선포되는 에발산에서, 번제와 화목제사를 드렸습니다. 축복이 선포되는 그리심산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이후로, 짐승을 잡아 불에 태우는 제사는, 드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제물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심 산이 아닌, 저주가 선포되는 에발산에서 제사를 드린 겁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에발산은, 갈보리입니다. 에발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앞두고 있는 성탄절은, 우리를 위해,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번제와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마 11: 28 - 30을 보시면,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본문 속의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으로, 살아있는 예배이며, 산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이로 볼 때,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 산이 축복의 산이 아니라, 나의 연약함, 나의 죄인됨을 알고,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에발산이 축복의 산이요, 긍휼의 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에발 산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에발산에서의 제사는, “아멘”으로 화답하는 예배였습니다.
본문 34 – 35절을 보시면,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고 합니다.
책들을 보면, 초판이 있고, 수정 증보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수정 증보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수정 증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여호수아는, 모세가 전한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했고, 이 모든 말씀을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과 동행하는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들려주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 때 낭독한 말씀이 신 27, 28장에 있습니다. 이 말씀들이 선포될 때, 백성들은 “아멘”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말씀을 읽으면, 제사장들이 그 말씀을 받아서, 큰 소리로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직선으로 약 3km이며, 산의 구조상, 각각 정상에서의 외침이 반대편으로, 전달이 잘 되는 곳이었기에, 에발산에서 외치는 말씀에 대해, 그리심 산에 있는 자들이 듣지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커다란 무리가 둘로 나뉘어, 두 산의 정상에서 외치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모습은, 참으로 장엄했을 겁니다. 고후 1: 20을 보시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파스칼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 “하나님을 탐구하는 사람”,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세 부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에겐,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탐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물음표만을 던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한다고 했습니다. 아멘의 의미는, “진실로 그렇습니다” 또는, “참으로 그렇습니다”입니다. 그러기에, 시 106: 48을 보시면,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겠다는 고백입니다. 칼 바르트는, 예배에 있어서, “신인식”을 강조했습니다. 즉, 예배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모두가 예배를 드려도, 각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다르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는 가운데, 일점일획까지 모두 낭독하고, 하산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는 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삶의 우선에 둠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