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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벧후 1: 1 - 11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20.01.12|조회수788 목록 댓글 0

194318살의 위르겐 몰트만은, 그가 살던 지역이, 독일군을 향한 영국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인해, 처참하게 폐허가 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이때, 40,000여명 가량이 영국군의 공습으로 죽었습니다. 몰트만은, 수세에 몰리는 독일군을 돕기 위해, 공부하던 친구들과 함께, 공군 부대로 가서 돕는 가운데, 영국군의 공습으로, 친구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자신만 살아남습니다. 그가 이러한 비극을 맞기 전까지는, 아이쉬타인과 같은 물리학자가 되겠다며, 물리학을 꿈꾸던 학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이후로,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 인생이며, 과연, 사후의 생애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인생의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가 발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려준 구절은,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 하나인, 내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며, ,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던 말씀입니다. 이 두 구절을 통해, 몰트만은,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하나님이 없는 부와 명성을, 이 땅에서 누리기 위해, 물리학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하신 사랑 앞에, 제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를 받아주시옵소서라며, 기도를 했습니다. 훗날, 몰트만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나를 전쟁의 참호 속에 몰아넣었고,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자신이 꿈꾸었던 삶의 변화에 대해, 몰트만은, 자신의 선택과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고, 하나님의 개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신학자가 되어,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아니라, 삶의 경험 속에서의 신학으로, 하나님께 대한 고백 가운데, 자신의 신학을 형성합니다. 그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세상 끝에서 일어나는 종말이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희망의 종말이라며, 희망의 신학을 집필합니다. 여기에는 희망과 약속이라는 두 축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희망을 빼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절망을 가리켜,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희망으로 나갈 때, 우리가 어디를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71: 5을 보시면,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푯대로 삼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14: 6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며, 2: 28을 보시면,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워치만 니의 글 가운데, 초 신앙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기차로 여행을 하는 가운데, 함께 앉은 사람들이, 카드놀이를 청했습니다. 이 때, 그는,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카드놀이를 모르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할 줄은 알지만, 이 손이 제 손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은 의아해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라고 하자, 그는,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와 신앙을 간증하고는, 이제는, 자신이 주님의 몸이 되고, 주님의 손이 되었기에, 그 손으로 카드놀이를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사양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둔 성도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가장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이 기록된 베드로 전후서는, 험한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라는 주제와 함께, 로마황제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이것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림으로, 대대적인 핍박이 가해지던 시대에 기록되어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환난 속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신앙을 어떻게 지키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 4절을 보시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2020년이 암중모색이라는 표현 가운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와 영적 교제를 나누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본문 속에서, 우리의 빛이 되시며,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심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성도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본문을 보시면, 신성한 성품이라고 합니다. 이를, 직전 성경이었던, 한글 개역판에서는, 신의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 이것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시면, 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2천여 년의 교회사를 보면, 예수님을 닮고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닮는다고 해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이는, 닮을 수가 없습니다. , 본서의 배경처럼,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의 희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거룩이라고 합니다. 교회사를 볼 때,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 성 프란시스코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프란시스코는, 그들이, 내 속을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여기 가장 큰 죄인이 있다고 말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가끔, 지방을 다니다보면, 논밭이 있는 곳에, 저수지나 물웅덩이가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들이, 프란시스코를 가리켜, 예수님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면서, 그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봤지만, 그는, 영혼의 샘을 저장한 저수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거룩을 통해서만, 영혼의 샘이신,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묵상집을 기록한 오스왈드 챔버스, 거룩은, 예수님의 생명이, 내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거룩한 삶의 경이로운 비밀은, 내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함이, 나의 부패한 육체를 통해, 은혜로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이것을 잘 표현한 찬송가가 289장의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입니다. 1절을 보시면,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핍박과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단순하게 믿는 자리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본서의 수신자가 되는 이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주변의 상황과 타협을 하고 싶었을 것이고,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 편하게 살고도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돌이키게 한 것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랐다가 변화하신 예수님을 목격합니다. , 유대인의 조상이었던, 모세와 엘리야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예수님과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많은 기적들을 봤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 한 마디에 순종함으로, 만선이 되어 귀항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본성의 욕망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처해서, 고난과 고통 속에서의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러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에게는,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위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라고 합니다. 이것과 바꾸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신의 성품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의 삶이 아니라는 겁니다. 딤후 4: 8을 보시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란, 하나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이는 곧, 성도란, 믿음으로 사는 자임을, 명확하게 선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2: 20에서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강조하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삶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방식 외에는, 우리가 의지할 만한 삶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4: 13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바라기는, 2020년에는 우리 모두가 성경에 씌여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가운데,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본문 5 - 7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앞의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도들과 함께, 본서를 받는 수신자들에게도 주셨다고 합니다. , 2절에서는, 수신자들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아는 가운데,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본문에서는, 이미 받은 이 모든 것들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이 사랑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아가페입니다. 필레오가 아닙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향한 출발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의 완성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견고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완고견고는 다릅니다. 애굽의 왕인 바로는 완고했고, 모세는 견고했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면, 완고한 자가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견고한 자가 됩니다. 샤를르 드 푸코, 하나님을 대적하여 서면, 완고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면, 견고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감나무 아래서 입 벌리고 누워,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러기에, 베드로는,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라며, 성숙한 믿음의 자리로 나가라고 합니다. 본문 7절에 쓰인, 더하라의 헬라어는, 에피코레게사테입니다. 이는, 무대의 공연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로, 공급하다, 마련하다, 제공하다, 보탠다, 보충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더해야 하는 사랑 은, 앞의 3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받은 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흡족하게 살지 못하며, 생각의 공간을 채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위에, 우리가 더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협동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공로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고전 15: 10을 보시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가 받은 그 은혜들이 헛되지 않기 위해, 그는 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 수고가 사람을 위해서 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했습니다. 조셉 드 뷰포트, 잠시 만나서, 대화를 했던 로렌스 형제와의 만남을 통해, 신앙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면서, 그의 기록에, 로렌스 형제의 말을 인용합니다. 보시면, 나는 가장 분주한 시간이나 조용한 기도 시간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소음이 가득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부엌에서도 나는 정해진 시간에 기도할 때처럼 평화롭게 하나님의 임재를 유지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라이팬 속의 달걀을 뒤집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면 나는 내게 일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그분께 내 전부를 바치는 예배를 드립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라면 땅에서 지푸라기를 하나 줍는 일에서도 만족을 느낍니다라고 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이런 자세로 15년간 수도원의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교회에서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경험하는 삶이, 진정한 성도로서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지금, 본문 7절에서, 사랑을 더하라고 하면서, 8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미, 2절에서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말했던 겁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맹인이 되어 멀리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십자가에서의 구속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필레오가 아니라, 아가페입니다. 본문에서 제시된 7가지를 다 채워도 마지막,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더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적맹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7가지이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 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가페를 더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0 - 1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합니다.

 

최초의 한글성경을 보시면, 본문 10절에 대해, 부르심과 택하심을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인 역으로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더욱 힘써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선택해 주셨다는 데 대한 확실한 경험을 갖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택하셨다는 것은, 지목받았다는 것으로, 빼내었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별도로, 우리를 빼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되었기에, ,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었기에, 영생을 얻어, 천국가는 것에 대해, 지당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시면, 그것이 아닙니다. 특히, 본문에서, 굳게 하라는 말은, 확실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해, 확실한 확신을 가지라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의 구원은, 자판기의 커피가 아닙니다. , 동전을 넣었다고 해서, 나오는 커피가 아니라는 겁니다. 본문 10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시고 뽑아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절대로 빗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행함에 있어서, 믿음이 없어서도 못하지만, 하나님의 때에 대한, 기다림의 인내가 없기에, 응답을 받지 못하거나 실패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여러분, 경건은 점잖은 것이 아니라, 말 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경건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에게는 공의가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본문 11절에서,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2020년 새해입니다. 새 해를 출발하며, 꿈과 소망이 얼마나 많습니까? 할 일도 매우 많을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우리의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아가페를 더하고,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짐으로, 우리 모두가 신성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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