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를 앞둔 1971년 12월, 그는 인도에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글을 읽을 수가 없었고, 오른손은 마비되어 글을 쓸 수도 없었습니다. 또, 누군가의 부축이 없이는, 혼자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중풍이라는 절망에 갇히게 된 그는, “하나님, 저를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으로 감사한 사실은 나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승리다”라고만 했습니다.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급히, 미국 보스턴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의 상태를 진료하던 의료진들은, 그가 노령임을 감안하여, 이구동성으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절망의 진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6개월 후에, 완쾌되어 1km이상을 걸었고, 오르막과 내리막도 다녔고, 14개월 동안, 50번이나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만일 당신의 삶이 조각조각 부서졌다면, 그 조각들을 모두 모아 하나님께 드리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조각들로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갑자기 나를 엄습한 뇌졸중 발작은 장애와 슬픔을 견디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애와 슬픔을 긍정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삶으로 보여줄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해질녘을 새벽녘으로 바꾸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를, 곁에서 지켜보던 사위는, “그 분의 노년은, 에녹처럼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삶을 통해 명백하게 입증된 메시지를 통해, 그가 남긴 마지막 하나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예스”입니다. 그의 이름은, “스탠리 존스”입니다. 그가 보스턴의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리고, 모두가 그에게 불가능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의료진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보실 때마다, ‘스탠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외쳐주십시오”라며, 부탁했습니다. 물론, 이 말에, 의료진들은, 웃었습니다. “선교사님, 저는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강권함으로, 어쩔 수 없이, 의료진들은, 그를 볼 때마다, 그렇게 외쳐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침상에 누워, 큰소리로 “아멘”으로 화답 했습니다. 의료진들은, 그의 부탁대로 그를 볼 때마다, 거듭, 거듭 외쳐주었습니다. 그 결과, 들것에 실려 들어왔던 그가, 6개월 후에는, 자신의 발로 퇴원하였습니다. 그가 의료진들에게 부탁을 할 때, 주변은 비웃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웃지만, 우리는 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한다고 무슨 병이 나을까? 심리적 안정이고, 의지이겠지”라며,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스텐리 존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었기에, 자신의 믿음에 대해, “아멘”이라며,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타임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하였고, 20세기 최고의 선교사로 불림으로, 사도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선교사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는 회복한 후, 그의 나이를 생각하여, 고향에서 편히 쉬라는 주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선교지인 인도로 돌아가서,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게네사렛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설전을 벌인 후의 상황입니다. 이로 인해, 사도 요한은, 요 1장에서,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이,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영접치도 않았다고 했고, 예수님은, 눅 9: 58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으로 오시자, 예수님께로 나와, 자신의 딸을 치료해 달라고 간구한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을 향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며 칭찬하십니다. 게네사렛에서는, 유대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지만, 이방 사람인,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원초적이었습니다. 눅 18장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합니다. 이 여인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행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행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무더위 속의 시원한 냉수였습니다. 올 2020년,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모든 소원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2 – 23절을 보시면,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오셨다는 소식이 퍼지자, 가나안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2세기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이며, 그의 딸은 “베레니케”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해, 막 7: 26을 보시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이라고 합니다. 본문과 막 7장의 차이는, 이 여인이, 혈통적으로는, 가나안의 수로보니게 사람이지만, 헬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라는 겁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 가운데, 옛 조상들의 원수였던 민족의 후손에 대해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며, 아주 경멸했습니다. 그랬기에, 민족적 열등감에 빠진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슬슬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방인 가운데, 한 여인이 “퀴리에 엘레이송” 즉,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예수님께 나온 겁니다. 이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조상들을 통해 약속하셨던 메시야이신 나사렛 예수여”라는 외침이었던 겁니다. 지금의 우리는, 문자를 통해 읽기에, 또, 이 시대의 시대적 상황, 감정들을 모르기에, 밋밋하지만, 이 여인의 외침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랬기에, 28절에서,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던 겁니다. 이것은, 딸을 위해 간구하는 어머니로서의 간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의 이러한 고백적 외침과 동일한 고백이 다음 장인 16장에 나옵니다. 어떤 고백입니까? 16절을 보시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고백을 담아 외친 여인에게,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시면,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외침을 묵살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으시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무시하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렘 33: 3을 보시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잖습니까? 그러니, 기도하면,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미동도 없으니, 이런 생각이 안 듭니까? 예수님은 본문에서, 여인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요청을 볼 때, 예수님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간청을 무시한 적이 있습니까? 삭게오가 뽕나무에 있을 때, 삭게오에게 네 집에 거하겠다고 하셨고, 막 10장을 보면, 바디매오가 소리침으로, 주변 사람들이 꾸짖었지만, 예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예수님은, 냉정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참기 힘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문제의 심각이나 경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시 116: 1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라며,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간구를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기도를 포기하게 되고, 허탈과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의 여인도 이와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외침을, 주변 사람들이 다 듣는데, 왜? 예수님만 못 듣는 겁니까? 이어폰이나 귀마개를 한 것도 아닌데, 왜? 못 듣는 거죠? 제자들은, 이 여인의 외침이 듣기 싫었습니다. 게네사렛에서 잔뜩 스트레스를 받으셨기에, 편히 쉬게 해 드리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인의 외침은 잦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소리칩니다. 여인의 외침은, 처절하며,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외침을 보면서, 우리의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어려움, 국가의 어려움, 개인의 어려움 등의 기도제목들입니까? 아닙니다. 이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간절함이 부재중”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만인의 성직자”라고 불리는, “노먼 빈센트 필” 목사님은, “누구든지 매일 아침 15분 정도만 기도하면 이 세상에서 실패할 인생은 아무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여건을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그것은 기도뿐입니다. 여러분, 믿음 생활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도저히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바라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눅 18장의 기도하는 세리처럼, 우리의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하며, 또,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통곡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랐던 것처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믿음 생활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눅 18: 7을 보시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합니다. 올 2020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우리의 모든 간구, 우리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여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4 – 2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며, 재청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까지 나서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요청함으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죠? 그것이, 본문입니다. 참으로, 냉정하기가, 한 겨울의 칼바람보다 더 쌀쌀합니다. 본문 24절을 보시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이 여인은, 이방여인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의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내 알바 아니다”라며 거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야박스런 대답입니다. 그토록 목청껏 소리쳤는데도 침묵하시더니, 간신히 한 마디 하시는 것이, “내 알바 아니다”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이, 이 현장에 있다고 한다면, 또는, 여러분이 이 여인이라고 한다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우리가 문자를 통해서 보기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께 욕설을 퍼붓거나 분노함으로 등을 돌릴 마음이 없습니까? 신앙상담 자료나 간증들을 보면, 목회자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목회자를 향해서 갖은 욕설을 퍼붓거나 마음의 상처로 가득해서, 교회를 떠난다고 합니다. 그들이 받는 상처에는, 목회자의 잘못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잘못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받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목회자에게 욕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냉정한 답변을 받은 이 여인의 반응은, “퀴리에 보에쎄이” 즉, “나를 도우소서”입니다. 이 여인은, 앞의 “불쌍히”보다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도우소서”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이 모욕을 당하면, 자리를 뜹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모욕에 대해, 불쾌함도, 반감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만을, 더욱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께 성큼성큼 다가왔던 겁니다. 그랬기에, 앞의 22절에서, 예수님을 향해,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던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교재에 나오거나 목회자들을 통해서 들은 것이 아닌, 여러분 개인의 고백으로,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다시, 이 여인에게, “떡”이라는 해결점을 두고, “자녀”와 “개”라는 구분으로 대답합니다. 이 구분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입니다. 그러기에, 앞의 24절 말씀을 강조하면서, 비참한 말로 대답합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유대인들에게 실제로, “개” 취급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생각까지도 미리 아셨는데, 이 여인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여인을 테스트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믿음의 인내와 신앙의 성숙을 위해,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침묵을 길게 하시든, 짧게 하시든, 또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단지,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으로, 우리가 지쳐 쓰러지거나 낙담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감당할 만한 시험을 한다고, 고전 10장에서 말씀합니다.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시험은, “침묵의 시험, 거절의 시험, 멸시의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소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에 대해,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참으로, 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저를 도우소서”라고 했습니다. 경제인들이 예견한 “암중모색”의 한 해를 지내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침에 대해, 우리의 간청에 대해,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겁니다. 올 2020년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더욱 간구하심으로, 여러분의 모든 간구가, 응답되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7 – 28절을 보시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합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과 함께, 간청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강조와 함께 비참한 표현이 담긴 대답을 받은 여인은, 그대로 수용합니다. 사실, 당시로서는, 주인이 식사할 때, 개들이 곁에 와서, 주인이 던져주거나 떨어뜨리는 부스러기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그러한 “부스러기의 은혜”라도 주시길 간청한 겁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흡족하게 여기며,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을 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다른 것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칭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마 25장에서 말씀하시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을,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이 여인을 만나기에 앞서, 예수님을 만났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이방인인 이 여인보다도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눅 13: 30을 보시면,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연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생활은 성경지식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은, 혈통으로도,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도, 이 여인과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믿음은 한 없이 부족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나에게 맞추어, 내가 중심에 서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내 생각, 내 뜻, 내 말대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커다란 떡덩이가 되길 원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만났을 때, 자신에게 나와, 넙죽 절하며, 친절하게 안내하지 않고, 시종을 보내어, 더러운 요단강에서 목욕하라고 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되돌아가려 했습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떡덩이가 아니라, 부스러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라는 장벽을 만났고, 여인의 소리를 거절하는 제자들의 장벽을 만났고, 침묵과 무시라는 예수님의 장벽을 만났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오직,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신 예수님의 칭찬이 무엇입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겁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보면, “귀나이 메갈레 피스티스”로, 여인의 믿음을 “메가톤급 신앙”이라고 칭찬하신 겁니다. 여인은, 자신의 간청대로, 딸의 병이 그 시로 나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메가톤급 신앙의 소유자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교리적이지도 않았고, 지식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원초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 여인처럼, 믿음을 칭찬받은 이방인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누구죠?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했죠? 여러분, 올 2020년에는, 가나안 여인을 모델삼아 큰 믿음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이 여인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 믿음으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과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으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소망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올 2020년에는, 우리에게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하나님의 칭찬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