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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민 9: 15 - 23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20.03.01|조회수475 목록 댓글 0

2011년 크리스챤 문학 대상을 수상한 구장회 님의 여호와의 명을 따라라는 시가 있습니다. 소개해 드리면, 천성을 향하여 광야 길을 가는 성도 / 질서 있게 행진하자 / 상하 좌우 질서 지켜 하나님의 백성답게 / 성결을 유지하면서 / 목표를 향해 가자 / 제멋대로 가지 말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순종하며 가자 / 자기 비유에 안 맞고 어려운 고비 있다고 원망 불평 하지 말자 / 지도자에 대하여 도전하지 말자 / 언제나 성령의 인도대로 형통한 길 걸어가자라고 합니다. 삶 속에서, 우리가 빨리 해결되길 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이 모든 것들이 속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압박되어서 옵니다. 이럴 때, 어찌합니까? 좌절하게 되고, 마음은 상처입어 무너지고, 그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감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하여, 정신적 현상이라든가 신념에 의한 결과등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평소에는 신앙이 좋다고 해도, , 철저하고 강한 훈련으로 다녀진, 신앙의 소유자라고 해도, 똑 같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좌절감 속에, 갇히게 되면서, 자포자기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등을 돌리고 떠나게 됩니다. 참으로, 머무름의 위기, 우리에게 엄청난 발전을 주지만, 반면, 커다란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머무름의 위기가 우리에게만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갈대아를 떠남에서부터, 그는 이러한 위기를 곳곳에서 겪었습니다. 야곱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윗 역시,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될 것이라는 증표로, 기름부음을 받은 뒤로, 그는 평생의 절반을 머무름의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언제나 두려움이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행적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온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먼저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그 머무름의 위기 속에 갇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갇혔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가득찼다는 겁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있지 않았습니다. ?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불타는 시글락 성 앞에서, 600명의 장수들이 자신을 죽이려할 때도 하나님을 찾았고, 21장을 보시면, 호르마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맹독사인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지시로, 놋뱀을 만들어 높이 들고, 그것을 쳐다보게 함으로, 백성들을 구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다윗 그들은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함께 가는 파트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관계론으로 유명한 데일 카네기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는, 어디서나 지혜로운 자와 파트너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얼마나 많은 동료들의 노력으로, 내 인생이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파트너는 삶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삼고초려의 유비와 제갈량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한 번쯤은, 나의 영원한 파트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요한과 찰스 웨슬레 형제의 기념비가 있는 데, 여기에, 요한 웨슬레의 세 가지 명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군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셋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이 중의, 세 번째는, 요한 웨슬레에게 힘을 주었던 말씀으로, 그가 임종직전, 팔을 높이 들며, 승리의 기쁨이 넘치는 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라며 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젠, 이들과 같이, 하나님을 우리의 영원한 파트너로 정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라는 말씀이, 8번이나 반복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아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에서의 명령, 히브리어의 로서, 그 뜻은 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본문 15 16을 보시면,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라고 합니다.

 

본문 15절을 보시면,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과 불이 성막 위에 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막을, 하나님께 임재하시는 처소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처소로 삼으셨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볼 수 없어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디로 이끄시는지를 알고 그 곳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성막이 성전으로, 성전이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임하셨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임하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입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된 우리 각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 하여, 세상에서 불러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16: 18을 보시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까? 이 반석 위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이 무엇입니까? 앞의 15 16을 보시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목하신 이 반석 위에, 베드로의 고백을 말합니다. 그럼, 오늘의 우리 각 사람이 불가시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사도 베드로와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후자는 어디이겠습니까?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로서, 예배당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주의 성령이 불같이 임했습니다. , 2: 46 - 47을 보시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모인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순간의 상황만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그것을 마음 속에서 다시 바라보면, 거기에, 욕심이 있음을 보게 될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찌무라 간조에 의해 시작된 무교회주의가 변질되어, 가나안 성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싫다는 겁니다. 그들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말합니다. 그들은, 혼자 성경읽고, 혼자 유투브나 케이블을 통해 설교를 들음으로 제각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불러, 곳곳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며, 그 곳에 교회를 세우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 11: 22을 보시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라고 하는 가운데, 예루살렘 교회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제각기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에 대한 상처로, 또는 다른 환경으로 인하여, 교회에 대한 열심이 식는 가운데, 예배에 자주 빠지면서, 영적침체기에 들어간 성도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영적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더 교회에 더욱 나와야 하고,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목회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입니다. 왕상 8: 29 30을 보시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하되,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우상시해서 기도했습니까? 솔로몬의 마음이 향한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다시,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 진영에 있는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과 불이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이 구름과 불은,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13: 5을 보시면,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28: 20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강조사항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갖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구해서 해결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62: 5을 보시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곳에, 우리의 영원한 파트너인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의 보호처가 되시며, 우리의 힘이 되어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본문 19절을 보시면,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행진은 이스라엘의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름과 불에 의해 정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구름과 불에 의해 정해졌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동도 하고, 멈추기도 했던 겁니다. 이들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여정을 보면,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궤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에 따른 다는 겁니다. 본문 속의 이스라엘이라고 광야생활을 계속하고 싶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지금, 광야로 캠핑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거친 환경과 두려움과 부족한 생활 속에서,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속히 목적지에 들어가서 정착생활을 하고 싶다며, 빨리 이동하자, 너무 많이 이동해서 힘드니 쉬어가자라며, 행진을 멈추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최선이며, 하나님이 적절한 시기에 맞추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두르지도, , 자신들의 의지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세로, 광야를 행진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경을 통해, 인내를 가르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인내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죄송한 비유이지만, 개를 훈련시킬 때, 가장 기초적인 훈련이 기다려” “안돼입니다. 왜 이것을 가르칩니까? 주인의 말에 복종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유가 죄송했습니다만,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생활 속에, 인내가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셨을 줄 압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고난은 짧고, 영광은 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자세를 가지고, 광야를 행진했다면, 그들은, 구름과 불의 인도함에서 벗어났을 것이고, 이로 인해, 멸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조급하게 행한다면, 우리의 의지대로 행한다면, 우리의 욕망을 이루려 한다면, 우리는 실패하게 됩니다. 21: 19을 보시면,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며, 10: 36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 1: 4을 보시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미국 노스웨스트 대학 창설자인 버터필드 목사가 지방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버터필터 목사를 위해 준비된 숙소는 노부부가 사는 허름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직들이 긴급회의를 해서, 버터필터 목사의 숙소를 바꾸는 것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젊은 부부가 살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말하자, 목사님은, 잠깐 기다리라며,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제직들은, 목사님, 숙소를 옮기시는 것까지 기도하십니까?”라고 말했지만, 목사님은, 하나님, 제가 젊은 부부들이 사는 곳으로 옮겨야 합니까? 아니면, 이 곳에 그대로 머물까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0: 7이 떠올랐습니다. 보시면,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입니다. 목사님은 제직들에게, 이 곳에 여장을 풀었으니 다소 불편해도 이 곳에 있겠습니다라고 머물렀습니다. 집회가 5일째 되던 때, 젊은 부부의 집에 장티푸스가 발생해서, 그 곳 사람들이 1개월간 출입을 금지 당했습니다. 이 간증을, 신기하고 놀라워로 볼 것이 아니라, 버터필드 목사님은 마치, 전쟁터의 다윗처럼, 일거수 일투족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물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주십니다. 바라기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힘들고 어려운 이 상황을 지내면서, 우리도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다는 것은, 주께서 머무는 곳에서 머문다는 겁니다.

본문 22 23을 보면,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를 맞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나안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않고에 대해, 이스라엘의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결정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순종 같으나, 밋밋한 삶을 살게 하는 것 같아, 원하는 이들이 참으로 적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7: 13 14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춘 삶이 쉽겠습니까? 이를 보면, 성도된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맞추려고 애쓰는 인내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따름에 있어서, 인내로서 따른 다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 이겠습니까? 본문 22절을 보시면,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이스라엘은 구름의 이동여부에 따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23절을 보시면,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사소한 모든 것까지 따름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함은, 고전 4: 2에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한 것처럼, 오직, 우리의 직임에, 우리의 자리에서 충성하는 겁니다. 이래서, 신앙생활의 길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크고, 굵직굵직한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가느다랗고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언뜻 봐서는 중요하지도 않는 사소한 일로 보이는 것에 충실할 때, 그에 연결된 큰 일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6: 10을 보시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우리 눈에 환히 드러나서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가나안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갑갑함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시적 성전이 되는 이 곳에 임재하시며, 성도된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앞서서 말씀드린 버터필드 목사님의 숙소 이동에 대한 예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지금껏 지내온 날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라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머무는 곳에서 머무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직임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승리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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