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작품에 내면을 그려내는 표현주의 화가 가운데,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뭉크”가 있습니다. 그의 그림 가운데, “절규”라는 그림이 있는데, 언뜻 보면, 어린아이가 무언가에 놀라서, 양 볼을 감싸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뭉크의 내면에 깊게 자리잡은, 심리적 공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배경은, 노르웨이의 수도인 오슬로에 있는, “피오르드 해안”입니다. 그는, 해질 무렵, 친구들과 함께 해안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경쇠약으로 극도의 피로를 느꼈던 뭉크는, 갑자기, 하늘이 붉은 핏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넓게 펼쳐진, 검붉은 피오르드 해안 위로, 불의 혀가 뻗어 나온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뭉크는, 두려움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다른 두 명의 친구들은, 이러한 뭉크를 모른 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계속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뭉크는, 이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뭉크가 실제적으로 들었다는 절규의 소리는, 그의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우리도 뭉크와 같이,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이러한 공황장애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트레스나 육체적 나약함, 아니면, 깊은 고민등으로 인한, 내면적 상황에 의해서입니다. 예전에, 지인들과 산행을 하는 데, 등산로를 잘못 잡아서, 약간 어두운 음침한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함께 한 일행 가운데, 뭉크와 같은 정신적 공황증세를 나타내는 지인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신경과민과 피로로 인한 현상으로 생각하고는, 조금 안정을 취하면 나아지겠지 했는데, 그가 느낀 것은, 공포였습니다. 결국, 그를 위해, 산행을 포기하고 하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느꼈던 공포는, 어릴 적 잘못을 범했을 때, 부모님이, 어두운 곳에 가둠으로, 생긴 두려움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치료가 되어서, 산행이든, 여행이든, 이제는 무리없이 잘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상황과 여건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아직, 코로나가 종료되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조심해야 하지만, 거리를 다녀보면, 행인들의 모습에서, 처음처럼, 코로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안색을 느끼지 못합니다. 휴일에 북한산을 오르거나 꽃구경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거나 거리두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면, 코로나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던 것이 맞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한 두려움도 있고, 자신이 가진 능력의 나약함에서 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결혼 전, 국제선 승무원이었던 정경주 사모님의 간증 가운데, 사모님이 탔던 비행기가, 일본 상공을 지나는 가운데, 우측 날개의 엔진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기장은, 기내 방송으로, 현재 상황을 알리며, 비상착륙을 말했습니다. 이 때, 평소에, 사모님의 믿음에 대해, 불평했던 승무원이, 사모님에게 와서는, “미스 정! 부탁해요. 날 위해 기도해줘요”라며, 두려움 속에서 간청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사모님은, 그와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사모님의 기도가 끝나고, 아멘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장으로부터,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측 날개의 엔진에서 발생한 화재가 저절로 꺼졌습니다. 예정대로, 김포공항에, 곧 도착하겠습니다”라는, 기내방송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때, 승객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사모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던 승무원은 그대로, 무릎을 꿇은 상태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답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고 합니다. 또, 시 91: 14 – 1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본문과 시 91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성도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 속에,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이 있습니다.
본문 8 – 9절을 보시면,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성도의 담대함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입었다는 정체성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심에 있어서, 세 가지 호칭으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자녀를 부를 때, “~야”라고 부르듯, 본문에서는, “~아”라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합니다. 먼저, “종”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굴욕적인 생각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것은, “노비, 노예”등으로, 타인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의미로서가 아니라,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밀접한 관계”라는 의미로서 말씀하신 겁니다. 즉,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했고, 가나안에 들인 겁니다. 또, 성자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막역한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우리의 행위, 우리의 공로, 우리의 순종, 우리의 열정이 있었기에,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출 19: 5 – 6을 보시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하게 지목하여, 하나님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그 다음의 호칭은, “내가 택한 야곱아”입니다. 여기서의 “야곱”은, “이스라엘”의 또 다른 호칭입니다. 이러한 호칭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행한 행위나 자격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지목해서 택함을 말합니다. 신 7: 6 – 8을 보시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강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또, 수효가 많은 민족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일찍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민족입니다. 그러한 민족을, 하나님은, 선택하셨던 겁니다. 그것은, 그들을 특별히 사랑했고, 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또 하나의 호칭은,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으로 불린 것은, 그의 특별한 영광이었고, 또, 그의 후손된 이스라엘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 8: 33을 보시면,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라며,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에 대해, 자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직접,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요 15: 14 – 15을 보시면,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무엇을 조건으로 우리를 친구라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명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사람입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땅 끝에서부터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나온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주 보잘 것 없는 곳에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불렀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랐다고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요 1: 46을 보시면,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도가 된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며,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 겁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입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담대한 믿음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본문은 우리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 하나로, 자주 암송하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본문을 암송하는 분이 계실 줄 압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또는, 시작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할 때, 암송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권능이 나를 보호하신다는 확신이 생김으로, 더욱, 힘이 되고, 용기를 갖게 합니다. 이 구절이 이렇게, 우리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을 자세히 읽으시면, 5가지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하나님이 금하며, 위로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읽으십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근거없는 말, 이유없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또, 지키지 않을 말도 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마 1: 23을 보시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는 어찌했습니까? 요 14: 16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서나,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또 하나, “놀라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출 15장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양했는데, 이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전체적인 호칭을 할 때와 “나의 하나님”이라며, 단독적인 호칭을 할 때의 마음이 다릅니다. 1인칭의 호칭을 사용할 때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막역한 관계, 허물없는 관계와 같이 느껴집니다. 가까우면 실수도 하고, 싸움도 한다는 것처럼, 하나님과 너무 허물없는 관계라는 것에 몰두하다가, 실언하는 분도 가끔 있지만, 그래도, 3인칭의 호칭보다는 1인칭의 호칭을 사용할 때, 우리에게 더욱 힘이 솟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웨슬레 목사님이 배를 타고 가던 중, 풍랑으로 인해, 배가 전복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여인과 아이가 포함된 한 무리가 한 곳에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풍랑 속에서도, 고요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요란한 풍랑 속에서도 고요함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에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웨슬레 목사님께, “아직, 하나님을 모르십니까? 하나님을 믿으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랐고,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기에,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을 모르십니까?”라는 말이 그의 가슴에 박혔습니다. 성경에서, 다윗의 고백이 있는 시나 기도를 보면, 다윗은, 어느 한 순간에서만,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매 삶이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웨슬레가 하나님을 몰랐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서의 확신과 경험이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과거에 만난 것은, 과거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이, 오늘의 만남이 될 수 없고, 미래의 만남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현재에 있습니다. 과거에 잘 믿었고, 과거에 열심으로 기도했고, 과거에 열심으로 봉사했고, 과거에 열심으로 전도한 것은,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시면, 본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미래입니까? 현재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격려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붙들리라”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 속에 갇혀있는 나를, 연약함 속에 있는 나를, 굳세게 하며, 도와주며, 붙잡아 주겠다고 하십니다. 시 91: 4 – 7을 보시면,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영국의 항공기 설계자로, 세계 최초로 쌍발 폭격기를 만든 “핸드리 페이지 경”이, 고난도의 에어쇼를 하는 가운데, 비행기 안에서, 생쥐 한 마리가 전선을 갉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선이 잘라지거나 합선이 된다면, 비행기는 아주 커다란 위험에 놓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핸드리 페이지 경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에어쇼에 열중하며, 창공으로 높게 치솟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바라봤더니, 창공으로 높게 솟아오르자, 생쥐는 산소부족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굳세게 하는 하나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한 주간을 보내는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 가운데 담대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에, 우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끝을 보시면, “내가 너를 도우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앞의 10절에도 있지만,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힘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겁니다. 마치, 막 4장에서 나오는 풍랑이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며, 깨웠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일어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음으로, 잔잔하게 됩니다.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갇히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믿음이 아니라, “나 혼자”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사람의 약속을 빵 껍질에 비유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은, 빵껍질이 아니라, 영원불변합니다. 그래서, 시 121편을 보시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합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줄 때, 어떻게 합니까? 자녀들이 처음 탈 때는, 두려움을 갖고 타기에, 뒤뚱뒤뚱하다가 넘어집니다. 하지만, 부모가 뒤에서 잡아주면, 아무리 뒤뚱뒤뚱 거려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 속에서, 뒤뚱거리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시작에서 드렸던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이제는, 그 두려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올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붙잡고, 나와 함께 하며,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주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