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성도된 우리는 누구나 말하길,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하나님은 나를 좋아하셔”라고 합니다. 틀립니까? 맞죠? 또, 주변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 “하나님은 너를 좋아하셔”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미국의 외과의사로, 또, 공중보건 정책 전문가를 역임한, “아툴 가완디”의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불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를 보면, 현대 의학은 오류가능성, 불가사의,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의사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모르는가?”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저는, “제”가 그리고, 성도라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이 모르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 121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보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며, 지키며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이며, 사람과 같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그의 백성을 지키고,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는, 본문 2절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자에 대해, “돌보신다”며, 똑같이 말합니다. 여러분, 창 1: 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에도, 시 121편의 시인과 같은 고백이 있을 줄 압니다. 세상의 모든 것, 우주의 삼라만상이 “우연”이 아닌, 또는, 자연계 속에서의 큰 폭발로 인하여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주관하는 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권고함을 받는다면, 즉, 돌봄을 받는 다면, 이 보다 더 복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흔히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 용서하신다”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다 용서를 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또, 예수님이 마 25장을 통해, 심판날의 상황을 말씀하셨겠습니까? 또, 계 20: 12을 보시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통념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사랑과 용서”라는 말로,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되고, 방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광야 속의 이스라엘은, 행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삶,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도록, 본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난하다고 할 때는, “물질적 가난”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 5: 3을 보시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께 순종했던 무리들이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권세자도 아니었고, 귀족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민초”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돌볼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양”은,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합니다. 또, 시력이 약해서 멀리 볼 수 없기에, 앞의 양이 가는 데로, 무조건하고 따라갑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앞의 양이 해를 당하면, 뒤따르는 양도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상황을 알고, 그 곳을 피하여 달아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가 왜? “양”으로 비유됩니까? 이러한 양의 습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며, 성부께서는,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분 앞에 엎드리어 부복하며, 종이 간절한 눈빛으로 상전을 바라보듯,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본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겸손”을 말합니다. “교만”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우며,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이 모든 것 위에 올라서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잠 16: 18을 보시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가난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울이 왕이 될 때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왕이 되어서는,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신이 제사를 주관했고,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는 불순종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외면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기는, 다윗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본문 2절을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통회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에 통회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언행심사를 살피며, 그 속에서의 불순종, 부족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거역함으로 인해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눅 5: 8을 보시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밤새 못 잡은 고기를 잡음으로, 만선의 배를 이끌고 부두에 도착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 눅 18: 13을 보시면, 하나님께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세리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지도 못한 체,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라고 하면, 하나님께 대해 충성한 것 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슥 7: 12을 보시면,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라고 합니다. 이를, 현대어 성경역으로 보시면,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그 당시의 예언자들을 시켜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자신의 영으로써 들려주신 그 교훈과 경고가 듣기 싫어서 그들은 차돌같이 굳은 마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그토록 무서운 진노를 그들에게 내리셨던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목회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또,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그 분의 뜻을 전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향해, 귀를 막고, 마음을 막을 때가 많습니다. 마틴 루터는, 95개조 항의문 안에서, “성도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와 참회를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도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안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자이기에, 매일 자신의 죄에 대해, 통회하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애통은,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또,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성도가 애통하는 것은, 나의 부족함, 나의 불순종, 나의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 곁에서 나의 보호자요,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심령에 통회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본문 2절을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본문을 쉬운 성경역으로 보시면, “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다. 이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겸손하고 자기 죄를 뉘우치는 사람, 나를 두려워하고 내 말을 따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 사람도, 자신의 말을 잘 듣고, 따르는 자를 좋아합니다. 그렇듯,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를 좋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 12장을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또, 삼상 3: 10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부르실 때,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습니다. 이와는 좀 다르지만, 눅 7: 7을 보시면, 병든 하인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는 로마의 백부장에게, 예수님이 그 곳으로 가길 원하자,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백부장은 비록, 로마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일들을 보고, 그 마음에, 예수님은 성부께서 약속대로, 세상에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믿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어떠한 거리에 있든, 자신의 종이 병에서 나음을 입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겁니다. 겔 12: 2을 보시면, 하나님은 에스겔을 향해,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반역하는 족속”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 11: 15을 보시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고, 계 3: 6을 보시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하나님을 경외하심으로, 하나님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