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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상 19: 9 - 14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작성자하늘의 평화|작성시간20.11.15|조회수626 목록 댓글 0

여러분, 하나님을 참되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도 좌절을 경험할까요?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갈등하는 고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좌절에 두지 말고, 회복에 두라고 합니다. 그것은, 좌절은, 사람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좌절 가운데, 깊은 절망에 빠진 엘리야의 회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과 낙심과 자포자기에 빠진 엘리야를 회복시켰습니다. 엘리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앞의 18장에 나오는 갈멜산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는 여기서, 이세벨의 비호를 받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을 합니다. 그것은, 제단을 쌓고, 기도함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우는 신이 참 신이라는 겁니다. 그 결과는, 엘리야의 승리였습니다. 엘리야가 믿고 의지하며, 전하는 하나님만이 참 신이기에, 이 승리는 신기하거나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그 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반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였음이 밝혀짐으로, 이들은 모두, 기손 시냇가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세벨이 대노하여, 엘리야를 죽이고자 한 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두려움 가운데, 호렙산에 있는 동굴로 숨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때, 엘리야의 대답은, 자신이 열정적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이세벨의 위협임을 말했습니다. 이 대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저는 더 이상 주님을 위해 일할 능력도, 의욕도, 힘도 없습니다.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우는 것을 목격한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저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저의 목숨을 노리기에, 저도 얼마나 살지 모릅니다라는,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엘리야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작 때, 물었던 물음을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참되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도 좌절을 경험합니까? , 맞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때로는 좌절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절망과 낙심과 자포자기에 빠지고, 영적 침체에 빠진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하나님은 좌절 속에 있는 성도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를 그 곳에서 회복시켜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요, 삶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처럼,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393장의 가사를 보시면,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라고 찬양합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 엘리야를 회복시킨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1 - 1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망에 빠진 엘리야를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본문을 보시면, 너는 나가서라고 합니다. 이는, 엘리야로 하여금, 고통을 겪고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엘리야는, 이세벨로 인해, 절망과 낙심과 자포자기 속에서, 영적으로 심각한 침체의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서 나가라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지금,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라고 합니까? 어둡고, 침침한 호렙산의 동굴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동굴은, 엘리야에게 있어서, 이세벨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안심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엘리야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던 그 곳은, 아브라함에게 안심처였고, 안전처였지만, 그 곳은, 아브라함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며, 예수님 앞에 나온 서기관은 거절했지만, 세관에 있던 마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질 때,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그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참으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자, 절망과 낙심과 자포자기 속에서, 영적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그 곳에서 나가 하나님 앞에 서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논리로는 증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길 원합니다. 동굴에서 나가 하나님 앞에서 산에 서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강력한 바람, 온 천지를 뒤흔드는 지진,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을 보여줍니다. 이 모두가 엘리야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좌절시키는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 속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 세미한 하나님의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을, 내 생각 안에서 내 뜻에 따라, 내 취향 안에서 제한한다면, 엘리야처럼 절망하고 낙심하며, 영적으로 침체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서만,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매 순간마다 계속되는 진행적인 만남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정체성을 일깨웁니다.

 

하나님은, 침체와 두려움 속에 있는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본문 9절을 보시면, 호렙산 동굴에서 엘리야를 만났을 때 하셨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네가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있느냐고 합니다. , 엘리야가 지금 있는 호렙산의 동굴은, 엘리야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 등,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사명을 행해야 했습니다. 그 동안, 엘리야가 행한 일들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지만, 지금은, 이세벨의 위협 속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길은, 고난의 길이었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가 갔던 이 길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칠병이어를 행하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렸고, 38년된 병자와 친구들에 의해 들것으로 실려온 중풍병자를 치료하셨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절망과 낙심과 자포자기 속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계속적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자신이 있어야 할 그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받은 요나는, 자신의 의지대로,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가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서, 평안을 느끼며, 곤하게 잠을 잘 때, 하나님은 풍랑을 통해, 그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도, , 엘리야에게도,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라고 합니까? 악인의 꾀를 거부하고, 죄인의 자리를 거부하는 곳이라고 합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가 오늘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성도된 우리가 삶의 자리 속에서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미한 소리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가 있어야 곳은, 하나님 앞입니다. 성도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도 하나님 앞, 코람데오입니다.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엘리야는 절망으로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여전히 낙심 가운데 있습니다. 본문의 대답은, 본문 9절에서, 하나님이 물었을 때의 대답과 똑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무엇을 묻는지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만 나열할 뿐 이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무엇을 하다 왔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어느 어느 교회목사로, 또는, 장로로 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마치, 명함을 내밀 듯, 세상에서 가졌던 직업과 직분으로 답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마음에 가득 쌓인, 울분과 오열로 답하겠습니까? 엘리야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린 가운데, 자기만 혼자 남았지만, 이 생명도 바람 앞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충성했으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남들과 달랐음을 앞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풍전등화와 같은 자신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너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섬길 자를 엘리야뿐만 아니라, 7천명을 더 남기겠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절망으로 여겼기에,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해, 절망으로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둘 이상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지진, 불을 볼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지 못하기에, 엘리야처럼, 절망 속에서, 절망의 생각, 절망의 마음, 절망의 말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모두가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지함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절망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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