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로 하여금,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했던, “노인과 바다”는 불후의 명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은, 나이가 많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째 물고기를 잡지 못해 동료 어부들에게 무시를 당합니다. 하지만, 85일째 먼 바다에서, 마침내 청새치 한 마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그 청새치는 몸집이 너무나 거대해서, 노인이 탄 배를 끌고 다님으로, 밧줄을 잡은 노인의 왼손은, 마비가 되었고, 밧줄을 감은 등은, 밧줄로 인해,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노인은, 청새치를 포기하지 않고, 잡아서 배에 매달고 귀항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의 공격으로, 청새치는 뼈만 남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역시나, 청새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고 귀항합니다. 노인은 말하기를,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라고 합니다. 또,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희망이 없다는 것은 죄악이야”라고 합니다. 노인은, 자신이 잡은 청새치가, 이제는 앙상하게 뼈만 남았기에, 자신의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 허무했음을 인정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뼈만 남은 청새치를 매달고, 귀항합니다. 그리고는, 피곤 속에서 깊은 잠을 자며, 아프리카 사자의 꿈을 꿉니다. 세상에 고난을 반기며,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단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 삶 속에서 고난이 생기면, 피하려 하거나 원망과 불평을 하며, 고난의 원인으로 다른 사람을 탓하며, 좌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통해,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며, 희망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합니다. 이를 볼 때, 성도된 우리 역시, 고난 속에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히 12: 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된 우리가 고난 속에서 좌절을 한다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게 되는 겁니다. 욥 1: 1을 보시면, 욥에 대해,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욥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이에 대해, 욥은, 23: 10에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하며, 또, 13절에서,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라고 합니다. 욥은 이렇게, 고난의 깊음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또, 롬 8: 28을 보시면, 여기서도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 좌절을 눈 앞에 둔 성도가 소망을 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본문에서 전하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받는 위로는,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임을 기억하여,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처럼, 믿음으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의 소망이 더욱 견고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 – 4절을 보시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고후 11장에서 사도바울은, 동족에게 수없이 매를 맞고, 죽을 뻔 했던 일들과 유대인들에게는 태장을 맞으며, 바다에서는 파선했던 일, 그리고, 여러 곳에서 동족과 강도들의 위험, 또, 수고하고 애쓰는 가운데, 피곤과 굶주림의 고통을 겪은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커다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는 도망자의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삶을 살아도, 고난은 면제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 4절을 보시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면제되지 않는 고난이지만, 이 속에, 특별하게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위로”는 헬라어로, “파라칼레오”라고 하는 데, 그 의미는, “불러서 곁에 둔다”는 겁니다. 즉, 고난 속의 성도는, 하나님의 곁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이기에, 그는, 고난 속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룁니다. 출 2: 23을 보시면,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고난 속에 있을 때,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 애굽에서 나가게 했습니다. 시 86: 7을 보시면,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라고 하며, 시 50: 15을 보시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경험하지 않고,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는, 성도로서의 흉내는 낼 수 있으나 삶은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 119: 67을 보시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본문 3 – 7절까지, “환난”이나 “고난”이라는 단어는, 각각 4번씩 나오지만, “위로”는 10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환난이나 고난은 받으면 받을수록, 거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는 배가 되어 넘친다는 겁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 - 9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고난으로 소망이 견고하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처한 상황이 매우 긴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8절의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는 것과 9절의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이 상황 속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는 겁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익혔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이 지니며, 누리고 있었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롬 15: 13을 보시면,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또, 빌 4: 13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렘 29: 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질투로 인해, 애굽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며, 견디고 견뎠습니다. 그 결과, 창 41장을 보시면, 바로의 명을 받아,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하며, 좌절할 수 있었습니다. 또, 형들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자신의 소망을 더욱 견고하게 했습니다.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신원시켜 주신다는 겁니다. 이렇듯, 성도된 우리도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다시 보시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며 더욱 확고하게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 즉, 자기 자신까지도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갈 6: 17에서 사도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또, 엡 3: 13에서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며,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을 영광으로 묘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요,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 속에서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금이나 여러 보석을 얻는 것보다 더욱 값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심으로, 우리의 소망이 더욱 견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1절을 보시면,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이제껏 말했던, 고난을 감사의 이유로 제시합니다. 고난 속에서 감사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사도 바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으며, 본문에서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더욱 배가 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불멸의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는, 시력이 나빠, 악보를 정확하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시력을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토스카니니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시력이 점점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토스카니니의 마음에, “차라리, 악보를 모두 외워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악보를 외워서 첼로를 연주했습니다. 이로서, 그는 불멸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응답하신 겁니다. 토스카니니는 비로소, 자신의 기도대로, 하나님이 시력을 회복시켜 주지 않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극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인지를 알아, 소망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또,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행할 수도 없고, 권할 수도 없는 겁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험한 자만이 행하며, 권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라기는, 성도된 우리가 비록, 고난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는 가운데, 우리가 받는 고난보다 배나 갑절로 많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우리의 소망이 더욱 견고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